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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이들의 몰락, 혹은 예측 가능한 실패담

-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그리고 약간의 우디 앨런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하창수

2022-03-18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은? 세월을 견디고 오래 사랑받는 문학 작품들은 대개 성공보다 실패를, 대답보다는 질문을, 상식보다는 상식 밖을, 중심보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다룬다. 놀랍고 기이한 것은 그 쓰라린 실패담, 난처한 질문, 보잘것없는 주변의 이야기가 우리의 인식과 지각을 깊이 파고들어 종내는 강력한 아름다움으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코너에서는 국내외 문학작품 속 인물들의 서툴고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삶, 알고 보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이야기들을 작가들의 소개로 만나본다.


헤밍웨이는 생사를 넘나들며 세계의 거의 모든 전장들을 누볐으나 죽음의 순간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마침내 세계와 자신에 대한 권태를 철저히 정복했고, 피츠제럴드는 아내 젤다의 재능을 보호하고 그녀의 일탈까지 끝내 함께하며 ‘돈’이 가하는 무게에 철저히 짓눌림으로써 작가로서는 역설적으로 승리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부유하고 잘난 자들의 실체를 묘파한, 위대한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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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설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좌)와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 포스터(우)(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위키백과)

미국 소설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좌)와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 포스터(우)(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위키백과)



1919년 가을과 겨울, 약관의 소설가 지망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듬해 출간되어 하루아침에 그를 유명 작가로 등극시키게 될 장편 〈낙원의 이쪽〉을 개작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직은 제목이 바뀌지 않아 〈낭만적 이기주의자〉인 채로의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친 뒤 스크리브너 출판사의 탁월한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로부터 출간 허락을 받은 상태였지만, 대법관의 십 대 딸 젤다 세이어와의 사랑의 줄다리기로 지친 데다 얇은 주머니는 좀체 채워지지 않았다. 그해 12월, 피츠제럴드는 (평생 그를 신뢰하고 지켜주었던) 에이전트 해럴드 오버에게 편지를 보낸다.


“영화 대본을 쓰면 돈이 좀 될까요? 시나리오도 팔아줍니까?”


할리우드의 매력과 가능성, 시나리오와 각색 작업이 신인(이라고 하기에도 아직은 2% 부족한) 피츠제럴드를 충분히 유혹하고도 남았으리란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이자 단편소설 한편 값이 당시 미국 교사의 일 년치 봉급과 맞먹었던 인기 작가의 이미지와는 도저히 부합하지 않는 장면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십 분 뒤의 일’을 알 수 없는 법이고, 더구나 그의 이런 유치하도록 솔직한 편지는 소설가 피츠제럴드에 대한 매우 또렷한 정체 하나를 형성한다. 천재적 재능과 탁월한 지성, 수려한 외모, 세련된 문장의 소유자 또한 몰락의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오히려 그들의 실패담은 매우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사실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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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좌)와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표지(우)(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교보문고)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좌)와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표지(우)(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교보문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명작 중편 〈킬리만자로의 눈〉에는 사냥을 하다 총기 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쳐 서서히 죽어가는 주인공 해리 스트리트가 더 이상 이루지 못할 소설가의 꿈을 쓸쓸하게 회억하는 장면이 나온다.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하더라도 …… 그는 …… 부자들에 대해서도 쓰지 않을 것이다. 부자들이란 멍청하고,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거나 지나치게 주사위 노름에 빠지는 인간들이었다. 그들의 멍청함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만든다. 가난뱅이 줄리언이 부자들에 대한 자신의 경외감을 그린, ‘엄청난 부자들은 당신이나 나와는 달라’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독백풍의 이 지문에 등장하는 ‘줄리언’은 바로 스콧 피츠제럴드였고, 줄리언이 썼다는 소설은 피츠제럴드의 단편 〈부잣집 소년(The Rich Boy)〉이었다. 실제로 〈킬리만자로의 눈〉 초판에는 ‘줄리언’이란 이름이 ‘스콧’으로 되어 있었는데 출간된 뒤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꿔달라는 피츠제럴드의 부탁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파리에서 처음 만나 알게 된 후 돈독한 우정을 쌓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헤픈 씀씀이와 끊임없이 상류사회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에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피츠제럴드의 그런 삶의 방식이 더 좋은 작품을 써낼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헤밍웨이의 우려와 반감이 타당했다는 점은 〈위대한 개츠비〉와 〈밤은 부드러워〉로 대표되는 피츠제럴드의 장편들은 물론 거의 모든 중단편에서 실제로 확인되며, 이런 시선이 피츠제럴드 소설에 대한 폄훼가 아니라 정당한 평가의 한 축을 이룬다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츠제럴드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 대부분이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들과 잘생긴 젊은 남자들이라는 것, 소설의 주요한 사건들이 모두 그들의 연애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부잣집 소년〉의 “대단히 부자인 사람들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그들은 당신이나 나와는 다른 존재들이다”라는 실제 문장에 드러나듯 부와 명성에 대한 피츠제럴드의 경도와 집착을 입증하는 질료들이다. 이것은 열세 살(1909)에 첫 단편을 발표하기 시작해 알코올중독에 의한 심장마비로 마흔네 살(1940)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피츠제럴드가 발표한 160여 편에 이르는 작품들 전체를 가름하는 데도 유효한 기준이 될 만큼 부와 명성,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좇는 인간 군상은 피츠제럴드 문학의 중요한 소재일 뿐 아니라 주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피츠제럴드 문학의 아이러니, 혹은 그의 문학에 대한 비평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서 발현한다. 부유함과 상류사회에 대한 그의 경도와 집착, 경외와 헌신은 전혀 다른 지평을, 즉 부와 상류계급에 대한 경멸과 위선, 환멸과 질시를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피츠제럴드만큼 부자와 상류사회의 속성을, 그 허상과 실체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문학으로 설파해낸 작가는 많지 않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피츠제럴드 소설의 외연을 이루는 화려하고 열정적인 연애사건들은 그 자체로 부와 명예를 극단적으로 누리거나 좇는 자들의 허위의식과 그들의 지리멸렬한 행보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기실 피츠제럴드가 진정으로 경도된 것은 부와 명예를 갑옷이나 허울처럼 걸치고 있던 상류사회가 아니라, 갑옷과 허울 때문에 이룰 수 없었고 그것을 벗었을 때에만 겨우 이룰 수 있었던 그들의 사랑이었다. 이런 점에서 전기작가 스콧 도널드슨(Scott Donaldson)이 명명한 ‘바보처럼 사랑을 추구했던(fool for love) 작가’라는 말은 피츠제럴드의 감성적 면모가 잘 집약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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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화감독 우디앨런(좌)과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포스터(우)(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미국 영화감독 우디앨런(좌)과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포스터(우)(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헤밍웨이의 피츠제럴드에 대한 인정과 사랑, 질시와 우려는 어디까지나 문학 안의 일이고 해석과 비평의 대상이지만, 우디 앨런이라는 천재가 작심하고 타임 슬립 판타지를 쏟아놓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통해 우리는 1920년대로 돌아가 두 사람의 이해와 갈등의 진면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


할리우드에선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지만 정작 간절히 쓰고 싶은 건 소설이었던 길 팬더, 그러나 누구보다 응원해 줘야 할 약혼녀마저 그냥 시나리오를 쓰는 게 좋지 않겠냐는 데는 힘이 쪽 빠진다. 까닭‘있는’ 우울에 젖어 호텔로 돌아가다 길을 잃고 파리의 뒷골목을 서성이던 그의 귓전에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고, 여섯 번쯤 울렸을 때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처럼 골목 저쪽에 나타난 금색 구형 푸조. 열두 번째 종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자동차 문이 열리고 검정 슈트 차림의 멋쟁이 남자가 함께 파티에 가자며 손짓을 한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1920년대 문학의 거장들! 넋이 나간 표정을 한 채 장 콕토의 집으로 들어선 길 팬더를 맨 처음 맞은 건 피츠제럴드(와 그의 문제적 아내 젤다)였고, 그는 길 팬더를 헤밍웨이에게로 데려간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는 친밀과 반목이 양편에서 팽팽하게 당기는 줄 위에 서 있다. 그 줄 위에서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를 향해 “화려함을 좇느라 그대의 문학이 망가지는 걸 지켜볼 수가 없네”라고 독설을 퍼붓고, 그것은 자신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주인공 해리 스트리트가 회한에 휩싸인 채 줄리언(실은 스콧)이라는 소설가를 힐난하는 대목의 오마주가 된다.


이쯤에서 헤밍웨이가, 혹은 〈킬리만자로의 눈〉의 주인공이 힐난했던 작가의 문제적 소설 〈부잣집 소년〉의 실제‘시작’부분을 들여다보자.



『세계문학단편선.27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1』,의 표지(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벤저민 버튼에게 일어난 기이한 현상 외 13편 하창수 옮김 Francis Scott Fitzgerald

『세계문학단편선.27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1』,의 표지(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사람을 먼저 보면, 그 사람을 알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떤 유형인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유형을 먼저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이유는 우리가 저마다 괴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얼굴과 목소리의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런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혹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 기이한 면모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평범하고, 정직하고, 열린 놈’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남자를 볼 때면 나는 뭔지 모르게 평범하지 않고 끔찍하게 비정상적인 면모를 감추려고 그렇게 얘기하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평범과 정직과 개방은 가히 은닉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세계문학단편선.27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1』, 현대문학사, 하창수 옮김, p.562-563)



과거를 동경하는 모습

과거를 동경하는 모습



부유한 자들에 대한 피츠제럴드의, ‘동경’으로 오인하기에 딱 좋을 만큼이나 끔찍하도록 적나라한 깊이의 ‘해석’이 다시 한 단락 이어지고 난 뒤 헤밍웨이, 혹은 〈킬리만자로의 눈〉의 해리 스트리트가 힐난한 문제의 대목이 나온다.


대단히 부자인 사람들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그들은 당신이나 나와는 다른 존재들이다. 그들은 풍족하게 가진 채 태어나 즐기는 삶을 살며, 그 삶이 고스란히 그들의 행동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대목에서 그들은 여유롭고, 우리가 신뢰를 부여하는 대목에서 그들은 냉소적인데, 어떤 점에서 부자로 태어나 보지 않았다면 이걸 이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뼛속 깊이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한 보상과 피난처를 우리 힘으로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 세계로, 혹은 우리보다 더 아래로 곤두박질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들은 다르다. 내가 앤슨 헌트라는 젊은이를 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치 그가 외국인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내 관점을 완고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만약 한순간이라도 그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길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겨우 터무니없는 영화 한 편을 보여주는 것 정도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위의 책, p.563-564)


흥미로운 것은 헤밍웨이와 〈킬리만자로의 눈〉의 주인공인 해리 스트리트, 피츠제럴드와 〈부잣집 소년〉의 화자인 소설가 줄리언을 서로 동일한 두 인격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각기 다른 네 명의 인격들로 볼 것인가에 따라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사이의 ‘부유한 존재’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극명해진다. 만약 줄리언이라는 소설가에 대한 힐난이 헤밍웨이가 아니라 해리 스트리트가 한 것일 뿐이라면 피츠제럴드의 문학의 무게중심이 “부자들에 대한 동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월감으로 가득한 부유한 자들의 허세와 실상에 대한 조롱과 폭로”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 〈미드나잇 인 파리〉에 등장하는 헤밍웨이의 ‘독설’까지 본인의 진심을 담았다기 보다 자신이 만든 인물인 해리 스트리트의 입장에 잠시 빙의해 전한 것으로 소급해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런 필자의 오지랖 넘치는 해석을 너그럽게 봐줄 독자가 과연 있을지 장담하기는 힘들다.


물론 〈미드나잇 인 파리〉의 덕목은 다른 데 있거니와 우디 앨런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은 저 헤어날 길 없는 환각에 젖어 자정의 파리 뒷골목으로 빠져들던 주인공 길 팬더에게 던져준 “지나간 시대에의 속절없는 동경”에 대한 냉혹한 경고였다. 지난 연대를 아무런 의심 없이 ‘황금시대’로 확정하는 것은 실은 지금·이곳의 더없는 불만이 만들어낸 환각일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것은 길 팬더가 마침내 다다른 아픈 자각이지만, 당연히 우리 시대 예술 종사자들에게 우디 앨런이 건네는 소중한 선물이다. 이 선물과도 같은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이야기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고민하게 하고, ‘지난 시대’의 찬란한 영광에 매몰되어 있는 한 지금·이곳은 그 영광의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며 여기에 붙들리는 한 우리는 여전히 별 볼일 없는 신세한탄에 빠져들 뿐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한다. 옛것에 대한 동경이 속절없는 미화(美化)에 바쳐질 때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라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합리는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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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스틸컷(이미지출처: imdb)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스틸컷(이미지출처: imdb)



모든 추억은 아름답다는 언설에 대한 아스라한 도발로 받아들였을 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그리고 그 안의 수많은 거장들은, 비로소 지금·이곳의 우리를 ‘리얼하게’ 자극한다. 내게 각별한, 각별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를 포함하면 셋이지만) -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는 그 리얼한 자극의 정점에 있다.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소설가였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의 적지 않은 작품들을 우리말로 옮긴 개인적 사연이 작용한 탓에 영화 속 그들의 표정과 동작, 그들의 목소리는 전혀 배우의 것이 아니었다.


더러 정치적 선전관을 자처하고 자신의 짓을 문학 행위로 철저히 호도하는 어줍은 작가가 없지는 않지만, 고백컨대, 작가는 그 어떤 종류의 ‘나팔수’도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 이 언설의 순도가 적어도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에게만큼은 온전히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을, 같은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자로, 장담할 수 있다. 헤밍웨이는 생사를 넘나들며 세계의 거의 모든 전장들을 누볐으나 죽음의 순간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마침내 세계와 자신에 대한 권태를 철저히 정복했고, 피츠제럴드는 아내 젤다의 재능을 보호하고 그녀의 일탈까지 끝내 함께하며‘돈’이 가하는 무게에 철저히 짓눌림으로써 작가로서는 역설적으로 승리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가 처한 상황에서 써낼 수 있었던 최선의 작품들을 써낸, 극단적으로 엇갈린 것으로 해석될 수는 있으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부유한 자들의 실체를 묘파한, 위대한 작가였다. 그리고 우디 앨런은 그들이 살았던 1920년대를 ‘황금시대’로 착각한 우리의 멱살을 틀어쥐고 지금·이곳으로 끌고 온 소중한 천재다.


삶이란 누구도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권태롭고 별 볼 일 없는, 언제 죽는다 해도 안타까울 일 없는, 실패자로 만듦으로써 권위와 명예로 자폭하는‘시간’의 행패 앞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그저 이 애처롭도록 볼품없는 사업을 거창하게 시작하고 묵묵히 이끄시는 신만이 가여울 뿐인, 참담하고 참혹한 실패 서사의 유일한 소재이며 질료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삶이란 또한 맹렬하게 달려드는 사자와 맞섰던 헤밍웨이와 ‘잃어버린 세대’의 대변자로 사랑과 상실과 허무를 노래했던 낭만적 이상주의자 피츠제럴드를, 그리고 두 사람을 끌어와 온갖 찌질한 스캔들로 파멸해가는 지금·이곳을 또 다른 ‘황금시대’로 둔갑시킨 우디 앨런을 존재하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주제가 아니겠는가. (끝)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잘난 이들의 몰락, 혹은 예측 가능한 실패담

- 지난 글: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내가 사랑한 ‘K-입소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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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창수 작가
하창수

소설가, 번역가
1987년 계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한국일보문학상, 현진건문학상 수상. 중단편집 <수선화를 꺾다> <서른 개의 문을 지나온 사람> <달의 연대기>, 장편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 <1987> <봄을 잃다> <미로> <사랑을 그리다> 외 다수. 옮긴 책으로 주요 영미작가들의 소설과 <과학의 망상> <명상의 기쁨> <오늘부터 다르게 살기로 했다> <저널 포 조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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