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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의 테마, 360도 관점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역사 인물 미디어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대하사극 '천추태후'를 고려 성종이 봤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by 길승수 / 2021.10.20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은? 영화, 드라마 등 일반 시민들에게 익숙한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소개되고 있는 역사 속 특정 장면들은 그 앞뒤로  어떤 시대적 상황과 맥락, 역사적 진실과 논란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걸까. 역사 전문가들의 친절한 소개와 설명을 통해 그동안 피상적으로 접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가깝게 다가가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천추태후' 제작진들은 사료를 상당히 수집해서 극에 반영했다. 전투 장면에도 많은 공을 들인 것이 눈에 띈다. (중략) 그럼에도 역사 왜곡 논란에 시달린 것은, 고려-거란 전쟁 시기를 다룸에도 역사적으로 별 관계 없는 천추태후를 주인공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천추태후'는 대하사극보다는 디즈니 판타지 영화인 '뮬란'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고려 성종(成宗, 재위 981∼997)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손자로 고려의 6번째 왕이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성종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타고난 기품이 엄정하면서도 인품이 관대했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절개와 의리를 널리 권장했으며,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고 백성을 성심으로 돌봤다. 그의 정치에는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고려 후기의 학자 이제현은 성종을 이렇게 평했다.


“성종은 백성을 올바르게 이끌어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 생각했다. 또한 생사의 이치에 통달했으니, 이른바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함께 일할 수 있다’는 말에 적합한 분이 아니겠는가!”



드라마 천추태후 中 유학을 바탕으로 국가 체제 정비에 나선 성종

성종은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고려의 기틀을 잡은 왕이었다. (이미지 출처: KBS1 역사저널 그날 121회: 천추태후, 위험한 사랑에 빠지다, 2016.04.24. 방영분)



대하사극 '천추태후'의 배경



고려가 건국될 당시(918), 고려 서북쪽에는 거란이 나라를 세웠고 동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



고려는 918년, 거란은 907년 건국된다. 발해는 698년에 건국되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고려는 918년, 거란은 907년 건국된다. 발해는 698년에 건국되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거란과 발해는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다가, 결국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다. 그 여파로 수많은 발해인이 고려로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게 되며, 고려 태조 왕건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거란을 적대시하게 된다. 결국 고려와 거란은 전쟁 상황으로 치달으나, 당시 거란의 황제였던 태종 야율덕광(902-947. 耶律德光)이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서로의 충돌은 후대로 미루어지게 된다.


야율덕광이 사망하고 50여 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한다(993년). 그 뒤 고려와 거란은 여러 번 대규모 전쟁을 하게 된다. 당시 거란의 국력은 최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강대한 거란을 상대하느라 고려는 여러 번 위기 상황에 몰리지만, 다행히도 이 시기 고려에는 뛰어난 왕과 신하들이 있었다. 고려 성종과 현종, 서희, 양규, 강감찬, 강민첨 등이 그들이다.


이들 중 성종은 고려군의 군사제도를 개편하고 방어전략을 수립하여, 결국 거란군을 막아내는 기반을 만든 사람이었다.


이 고려-거란 전쟁 시기를 다룬 KBS 대하사극이 '천추태후'인 것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주인공이 천추태후(964~1029)이다.



역사서에 기록된 천추태후



제4비 신정왕태후 황보씨, 태조 왕건, 제3비 신명왕태후 유씨, 대종 왕욱, 대목왕후 황보씨, 광종(제4대 왕), 성종(제6대 왕), 헌애왕후 황보씨(천추태후), 헌정왕후 황보씨, 경종(제5대 왕) / 그날

성종과 천추태후(헌애왕후), 헌정왕후는 친남매 사이였다. (이미지 출처: KBS1 역사 저널 그날 121회: 천추태후, 위험한 사랑에 빠지다, 2016.04.24. 방영분)



천추태후 조카 대량원군 독살 시도 / 태조왕건,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천추태후, 성종, 목종 / 왕건의 아들은 12명 그러나 후손들은 크게 번성하지 못함

천추태후와 경종(景宗, 재위 975∼981)의 사이에서 목종이 태어났다. (이미지 출처: KBS1 역사 저널 그날 121회: 천추태후, 위험한 사랑에 빠지다, 2016.04.24. 방영분)



천추태후는 고려 제5대 왕인 경종(재위 975~981)의 비(妃)이자, 6대 왕인 성종의 여동생이고, 7대 왕인 목종(980~1009. 재위 997~1009)의 어머니였다. 천추태후와 경종은 4촌 간이었지만 당시에는 족내혼(族內婚. 친족끼리의 혼인)을 하였으므로 경종의 3번째 비가 되어 목종을 낳았다. 그런데 목종이 태어나고 불과 1년 뒤 경종이 사망하고 만다. 목종이 너무 어렸으므로 천추태후의 친오빠인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고려 시대는 남녀의 연애가 자유로운 때였다. 과부가 된 천추태후도 연애를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김치양. 『고려사』 김치양 열전에 의하면 성격이 매우 간교했다고 한다. 따라서 천추태후의 친오빠인 성종은 김치양을 못마땅하게 여겨, 곤장을 친 후 먼 곳으로 유배 보낸다.



천추태후 김치양을 만나다

천추태후와 김치양. (이미지 출처: KBS1 역사 저널 그날 121회: 천추태후, 위험한 사랑에 빠지다, 2016.04.24. 방영분)



성종이 아들이 없이 사망하여, 천추태후의 아들인 목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997년).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천추태후는 섭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목종의 나이는 18살이었다. 목종의 나이가 당시 기준으로 성인이었으므로, 일반적인 경우라면 왕의 어머니가 섭정하는 경우는 없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천추태후는 유배 중이던 한 사람을 신속하게 자신의 최측근으로 불렀다. 그 사람은 자신의 옛 애인인 김치양이었다.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불러들여 관직을 주고, 곧 고위직인 우복야(정2품)로 승진시켰다. 고위직에 오른 김치양은 인사권을 한 손에 장악한다. 따라서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심었다. 『고려사』를 보면, ‘김치양의 친척들과 일당들이 온통 요직을 차지하고 온 나라에 권력을 휘두르고 뇌물을 공공연히 챙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권력을 거머쥐었으니 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공공연한 연인 사이가 되었고, 결국 둘 사이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태어난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으나,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여기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과 김치양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목종의 후계자로 삼아서 다음 왕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과감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목종이 남자를 가까이했기 때문이었다. 목종이 동성애자였는지, 양성애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결과적으로 한 명의 아이도 갖지 못한다. 목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다음 왕위에 오를 사람은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이었다.



태조 왕건, 천추태후, 목종, 안종 욱, 헌정왕후, 대량원군

‘안종 욱’의 이름은 왕욱(王郁)이고, 『고려사』에는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미지 출처: KBS1 역사 저널 그날 121회: 천추태후, 위험한 사랑에 빠지다, 2016.04.24. 방영분)



친자매였던 천추태후와 헌정왕후는 동시에 경종의 비가 되었다. 경종이 사망하자 천추태후가 연애를 시작했듯이, 헌정왕후 역시 연애를 시작한다. 그 상대는 왕욱(王郁). 왕욱은 태조 왕건의 아들로 헌정왕후에게는 배다른 삼촌이었다. 이 연애에서 왕순이 태어났다. 따라서 왕순에게 천추태후는 이모였다. 그런데 천추태후는 왕순을 제거하려고 했다.



천추태후, 조카에게 자객을 보내다

왕순은 천추태후에 의해 중이 되어 삼각산(三角山, 서울특별시 북한산) 신혈사(神穴寺, 지금의 진관사)에 보내져 있었다. (이미지 출처: KBS1 역사 저널 그날 122회: 천추태후, 조카에게 자객을 보내다, 2016.05.01. 방영분)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가 쿠데타를 일으킨다(1009년). 결국 목종은 강조에 의해 폐위되고 대량원군 왕순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사람이 바로 현종(고려 8대 왕. 재위 1009~1031)이다. 강조는 김치양과 그의 아들 등 일곱 명을 처형하고, 그 일당 30여 명을 유배 보냈다. 목종 역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한다. 천추태후는 다행히도 해를 당하지 않고 고향인 황주(黃州, 황해북도 황주군)로 가서 살다가, 말년에는 개경으로 돌아온 뒤 사망한다(1029년).



대하사극 '천추태후'의 장단점



이 사극을 꼼꼼히 보면, 제작진들이 상당한 자료를 모았다는 것과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세세한 부분을 꽤 자세히 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허접스럽게 만든 사극은 아닌 것이다.


또한 극 중에 천추태후 역을 맡은 채시라 배우의 활 쏘는 모습은 일품이다. 역할을 위해 많은 연습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은 부분인 것 같지만 사극에서 이런 고증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드라마 〈천추 태후〉에서 국궁 사법(射法)을 제대로 보여주는 채시라 배우(좌)와 〈불멸의 이순신〉에서 서양식 양궁 사법과 비슷한 방식으로 활시위를 잡은 김명민 배우(우). (이미지 출처: KBS)

드라마 〈천추 태후〉에서 국궁 사법(射法)을 제대로 보여주는 채시라 배우(좌)와 〈불멸의 이순신〉에서 서양식 양궁 사법과 비슷한 방식으로 활시위를 잡은 김명민 배우(우). (이미지 출처: KBS)



역사의 기록에서 살폈다시피, 천추태후가 고려-거란 전쟁 시기(993년 소손녕의 1차 침공 이후, 1010~1019년 사이에 5차례 더 침공함)에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천추태후가 섭정한 기간은 997년부터 1009년 사이로 이 기간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천추태후를 주인공으로 함으로써 방영 당시에 역사 왜곡의 논란이 매우 많았다.


특히 성종은 소손녕이 침공하자 직접 전선에 나갔으며, 영토를 확장하고 방어전략을 수립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천추태후'에서는 나약한 사대주의자로 묘사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성종은 직접 군대를 지휘, 천추태후는 참여 안 해



993년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하자, 성종은 즉시 군대를 조직하게 했다.


군대의 지휘관으로는,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上軍使)로,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中軍使)로,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下軍使)로 임명하여, 안북부(평안남도 안주)로 보내 거란군을 막게 했다.


그리고 성종 역시 가만히 개경에 머무르지 않았다.


“지금 인근의 적이 침입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니, 짐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적을 물리치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성종은 이렇게 말하며 거란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스스로 최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고려 침공 14년 전(979년), 거란군은 송나라 태종이 이끄는 10만 군사와 싸워 그들을 거의 몰살시켰으며 송나라 태종을 포로로 잡을 뻔했다. 7년 전(986년)에는 20만에 달하는 송나라 군대를 궤멸시켰었다.


당시 거란군은 최강의 군대였고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성종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을 상대하기 위해서 몸소 최전선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성종은 안북부(평안남도 안주)와 서경(평양)에서 전체 전략을 진두지휘했다. (이미지 출처: KBS 드라마 〈천추 태후〉)

성종은 안북부(평안남도 안주)와 서경(평양)에서 전체 전략을 진두지휘했다. (이미지 출처: KBS 드라마 〈천추 태후〉)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도 고려 성종이 몸소 갑옷을 입고 거란군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행차한다. 역사적 사실에 맞게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도 나약한 겁쟁이로 그려진다. 왜냐하면 극의 주인공 천추태후 역시 갑옷을 입고 전장으로 나서기 때문에, 영웅적인 천추태후와 겁쟁이 성종의 구도를 만들어 천추태후를 돋보이게 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천추태후가 이 전쟁에 참여한 기록은 없고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서희와 소손녕의 대치



고려의 선봉군은 급사중(고려시대 종4품 관직) 윤서안이 이끌었는데 대령강을 넘어 봉산군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이 선봉군이 거란군에 패하고 말았다. 선봉군의 규모는 3천 명 정도로 추정된다.


서희(942~998년)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봉산군을 구원하려고 했다. 즉 선봉군이 야전에서 패했지만, 거란군과 승부를 보려고 한 것이었다. 당시 고려군과 거란군은 대령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서희와 소손녕은 대령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서희와 소손녕은 대령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서희가 외교 담판을 벌인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군대를 지휘하여 거란군을 상대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천추태후'에서는 서희가 대령강 방어선의 요충지인 태주에 주둔하며 거란군과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어느 정도 묘사되어 있다.



서희는 최전선에서 소손녕과 대치했다. (이미지 출처: KBS 〈천추 태후〉)

서희는 최전선에서 소손녕과 대치했다. (이미지 출처: KBS 〈천추 태후〉)



이 사실은 그동안 사람들이 잘 몰랐던 부분으로, 극의 중요 장면이 될 수 있었음에도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이 역시 천추태후가 말 타고 활 쏘며 거란군을 물리치는 장면을 부각시킴으로써 서희의 역할을 크게 축소시켰기 때문이었다.



항복론 vs 할지론, 성종의 선택은?



고려 성종은 서경에 있었다. 고려의 선봉군이 패하자, 항복을 요구하는 소손녕의 편지가 연이어 도착했다. 대책 회의에서는 다음 2가지 의견으로 모아졌다.


“성상께서는 개경으로 돌아가시고, 중신들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항복을 빌게 하소서!”


이른바 항복론이었다.


“서경 이북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고 자비령(황해도에 위치한 고개)을 국경선으로 정하소서!”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이었다.


신하들이 항복하거나 영토를 떼어주자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었다. 고려의 신하들이 항복론과 할지론을 주장한 것은, 아군의 선봉대가 패했다는 사실이 결정적이었다. 선봉대는 고려의 최정예 군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의 정예 용사들인 것이다. 그런 군사들이 패했으니 고려의 군신들이 느끼는 충격은 엄청났다. 또한, 송나라가 전력을 다했음에도 거란군에 연이어 대패했다. 그렇다면 송나라보다 국력이 더 작은 고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성종이 생각하기에 항복은 불가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영토를 떼어주는 할지론이었다. 성종은 이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한다.



성종은 자비령까지 방어선을 후퇴시키기로 했다. 자비령은 서경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로 험준하기로 유명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성종은 자비령까지 방어선을 후퇴시키기로 했다. 자비령은 서경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로 험준하기로 유명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성종은 이 명령을 전군에 하달하고 서경을 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서경의 곡식 창고를 개방한 후 백성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다. 그래도 아직 남은 곡식이 많자, 적의 군량미로 사용될까 우려해 대동강에 던져버리게 했다.


'천추태후'에서는 성종이 겁에 질려 할지론을 선택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극의 주인공 천추태후는 맹렬히 반대하고 결국 성종은 할지론을 철회한다. 실제 역사에서 성종이 할지론을 철회하는 이유는 천추태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이었다.



“승부 걸어야” 설득 나선 서희, 현장 지킨 성종



그 사람은 서희였다. 서희는 최전선에서 군사들을 지휘하다가 자비령으로 방어선을 후퇴시킨다는 명령이 하달되자 즉시 서경으로 달려갔다.


서희는 성종을 보자마자 이렇게 일갈했다.


“전투의 승부는 국력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의 빈틈을 보아 기동하는 데 있습니다!”


서희는 거란군과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따라서 식량을 버리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어찌 급히 식량을 버리라는 명령을 내리십니까! 하물며 식량은 백성들의 생명입니다. 차라리 적에게 이용될지라도 어찌 헛되이 강에 버리겠습니까!”


성종은 강건한 사람이었다. 즉시 서희의 말을 알아들었다. 곧 식량을 버리는 것을 중지시키고 땅을 떼어주는 계획 역시 취소시켰다.


서희는 비록 선봉군이 거란군에 패했지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서희가 꿋꿋이 말했다.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萬世)의 치욕입니다. 신 등으로 하여금 적과 전투를 하게 해주십시오. 승부를 본 후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다.”


서희는 거란군과 승부를 볼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성종은 서희의 말에 따라 전투를 다시 준비했다.


그리고 서희는 성종에게 개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다. 아무래도 국왕이 전선에 너무 가깝게 있으니 군 지휘관에게는 매우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성종은 서희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만 개경으로 돌아가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솔선수범하는 것이 군주의 책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천추태후'에서 묘사한 겁쟁이 성종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안융진 전투, 천추태후 활약은 사실과 달라



안융진은 청천강 하구에서 교통로를 통제했다. 안융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안융진은 청천강 하구에서 교통로를 통제했다. 안융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고려군과 거란군의 대치 중에, 거란군은 우회 기동하여 고려의 안융진을 급습한다. 청천강·대령강 방어선과 고려의 주력군이 있는 곳을 피한 기습작전이었다. 어느 정도 규모의 군대가 동원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규모 부대를 이용한 작전이었을 것이다.


이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이 거란군과 싸워서 이긴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이 안융진 전투에서 천추태후가 결정적인 활약을 한다. 드라마 속에서 천추태후는 모든 전장을 누비며 활약하는데,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두고 제작되어야 하는 대하사극에서는 너무나 과한 설정이다.



서희와 소손녕의 두루뭉술한 협상



안융진에 대한 기습이 실패하자 소손녕은 감히 다시 진군하지 못했다. 결국 고려와 거란은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 서희가 소손녕에게 요구한 강화 조건은 이랬다.


“우리나라(고려)가 바로 고구려이니,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고 도로가 통한다면 거란에 조공을 하겠다.”


이 조건을 소손녕이 받아들여 강화가 성립하게 된다. 사실 회담의 합의는 매우 두루뭉술했다. ‘옛 영토’의 의미 등을 서로 다르게 해석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의 땅을 개척하게 되고, 거란은 요동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된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소손녕이 전쟁에서 실패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당시 거란 조정에서는 성공한 정벌이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적대적이었던 고려가 조공을 하게 되었고, 고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요동의 지배권까지 확립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요동에는 거란에 적대적인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다.



거란에 보복하려고 송나라에 사신 보낸 성종



성종은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듬해인 994년 6월, 성종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송나라에 원군을 요청해서 거란의 침략 행위에 보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는 거란에 연이어 대패하여 수세에 몰려 있는 상태였다. 송나라는 경솔한 군사 행동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고려가 송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것을 거란이 알게 되면서 거란과의 외교적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었고 또다시 거란의 침략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런데 고려의 움직임을 눈치챈 거란은 군사적인 압박보다는, 사신단을 고려에 보내 좋은 말로 성종을 달랬다.


'천추태후'에서는 성종이 사대주의자이기 때문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것으로 묘사했는데, 전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다. 고려와 거란의 분쟁은 끝나지 않았고 송나라의 도움을 끌어낼 수 있다면 시도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었다.



고려와 거란의 축성. 강동 6주의 탄생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 결과는 서로 이득이 되는 것이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 결과는 서로 이득이 되는 것이었다.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고려와 거란이 강화를 맺었으나, 전쟁은 종결된 것이 아닌 휴전 상태에 가까운 것이었다. 전쟁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농후했다. 따라서 시급히 방어선을 확보해야 했다. 성종은 이 일의 총책임자로 서희를 임명한다. 서희는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족을 쫓아낸다. 그 결과, 994년에는 장흥진, 귀화진, 곽주, 구주에 성을 쌓고, 995년에는 안의진, 흥화진에, 996년에는 선주, 맹주에 성을 쌓는다. 이 지역을 후에 강동 6주라고 부르게 된다.


소손녕 역시 신속히 움직여서 요동성과 압록강 사이에 5개의 성을 쌓았다.


'천추태후'에서도 서희가 성을 쌓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긴 한데 상당히 아쉽다. 서희가 조정에서 벌어진 정치적 싸움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북쪽 변경으로 가서 성을 쌓게 된 것으로 묘사한다.


실제로는 성종과 서희는 단순히 성을 쌓은 것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전 국가적 방어전략을 수립했다.



거란의 여인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 성종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 고려 성종이 거란의 황실 여인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양측의 기록이 모두 간단하여 정확한 세부 사정은 알 수 없다. 하여간 성종의 배필이 될 여인은, 바로 소손녕의 딸이었다.


소손녕은 월국공주(요나라 황제인 경종의 딸)와 결혼한 부마였고, 소손녕은 대대로 황후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다. 즉 소손녕의 딸은 고려 성종과 결혼할 만한 공주급 신분이었다.


여기서 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데, 성종이 송나라와의 관계는 아주 끊어버리고 거란과 각별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거란에서 강동 6주 이상의 땅을 성종에게 주기로 약속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그런데 소손녕의 딸은 고려로 오지 못했다. 성종이 1년 후 사망하기 때문이었다(997년). 이때 소손녕 딸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추정은 가능하다. 어머니인 월국공주의 나이(당시 20세)로 보았을 때, 소손녕 딸의 나이는 많아야 4살 정도거나 생후 몇 개월인 젖먹이였을 가능성도 있다.


'천추태후'에서도 이 사실이 묘사되어 있다. 극의 설정에는 소손녕의 딸은 이름이 ‘소찰리’라고 하며 나이는 20세 가량이고, 실제 고려로 와서 생활하는 것으로 나온다.



주인공이 역사에 없는 인물, 사극 아닌 판타지물로...



'천추태후' 제작진들은 사료를 상당히 수집해서 극에 반영했다. 전투 장면에도 많은 공을 들인 것이 눈에 보인다. 특히 주인공 천추태후를 맡은 채시라 배우는 국궁을 연습해서 멋진 활쏘기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역사 왜곡 논란에 시달린 것은, 고려거란전쟁 시기를 다룸에도 역사적으로 별 관계 없는 천추태후를 주인공으로 세운 것이었다. 따라서 '천추태후'는 대하사극보다는 디즈니 판타지 영화 〈뮬란〉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거란은 고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침공했다. 그러나 고려는 결국 그것을 막아내고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 기반을 만든 사람이 성종인 것이다.


아직 고려-거란 전쟁을 제대로 다룬 대하사극은 없다. 근래 KBS에서 새롭게 대하사극을 제작한다고 하니, 조만간 성종 등 고려 영웅들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사극을 기대해본다.



* 본 칼럼은 필자의 소설 『고려거란전기, 겨울에 내리는 단비』와 향후 출간될 〈고려거란전쟁에 대한 역사서(가칭)〉와 동일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대하사극 '천추태후'를 고려 성종이 봤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 지난 글: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영화 〈포화 속으로〉 신파적 서사 속에서 사라진 역사적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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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승수
길승수
역사작가
고려가 거란을 극복하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소재임에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고려거란전쟁에 대해 10년 이상 연구하며 그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 1010년 거란의 2차 침공을 다룬 역사소설인 『고려거란전기, 겨울에 내리는 단비』를 펴냈고, 지금은 그 다음 이야기인 『고려거란전기, 구주대첩』을 집필 중이다. 방송 활동으로는 고려거란전쟁을 다룬 역사다큐인 JTBC <평화전쟁 1019>의 대본을 썼으며 전문가로 직접 출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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