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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우리를 단일민족이라 불렀는가?

- 이달의 답변-

박대재

2021-06-11

인문쟁점은?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인문학적 과제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깊은 사색, 허심탄회한 대화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매월 국내 인문 분야 전문가 두 사람이 우리들이 한번쯤 짚어봐야 할 만한 인문적인 질문(고민)을 던지고 여기에 진지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이달의 질문] 우리는 단일민족인가요? / 질문자 - 최슬기(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원)

 

Q. 우리는 단일민족인가요? 우리는 언제부터 이와 같은 생각을 했으며, 이 생각은 어떤 질곡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나요?



[이달의 답변] / 답변자 - 박대재(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A. 언제부터 우리를 단일민족이라 불렀는가?



1948년 8월 국민국가 수립이라는 시대적 당면 과제 앞에서 민족과 국가의 단일성(통일성)을 강조하는 정치적·사회적 담론이 필요하였다. 당시 이병도와 손진태는 모두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특히 손진태는 문교부 편수국장(차관)으로서 새로운 ‘국사’ 편찬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순혈성을 강조하는 단일민족론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근대 이후 유럽에서 등장한 ‘민족’이라는 용어



민족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민족(民族)’은 ‘Nation’이란 용어가 19세기 말 일본에 알려지면서 한자어로 번역된 신조어이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단일민족’이란 한 나라의 국민이 단일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민족을 가리키며, 그러한 나라를 ‘단일민족국가’라고 부른다. 즉 단일민족은 단일민족국가의 구성원으로 다민족국가의 복합민족과 상대가 되는 말이다.


‘민족’은 원래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용어이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기 유럽에서 등장하여 19세기 이후 사용된 ‘Nation’이란 용어가 19세기 말 일본에 알려지면서 한자어로 번역된 신조어가 ‘민족(民族)’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근대 이전부터 사용하던 ‘종족(種族)’이란 용어와 비교해 ‘민족’의 가장 큰 특징은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을 가진 구성원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또한 대외적으로 자주적인 독립국가의 국민이라는 점도 중세의 종족과 다른 민족의 근대적인 면이다. 종족이 혈연적·문화적 동질성에 기반한 집단이라고 한다면 민족은 정치적·지역적으로 묶인 좀더 포괄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민족을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이라고 하는데, 그 형성 시점을 둘러싸고는 근대 이후로 보는 근대주의와 근대 이전으로 소급해 고대부터 민족이 존재했다고 보는 본질주의가 대립하고 있다. 민족이란 용어는 근대 이후 등장했지만 그 실체의 본질은 이미 고대로부터 원초적으로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후자의 입장이다. 한편 근대주의적 입장에서는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 보거나 민족 정체성을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보면서 민족을 근대적 현상이나 정치적 산물로 이해한다.


최근에는 본질주의와 근대주의를 절충해 신화, 기억, 상징 등의 오래된 집단 정체성을 매개로 근대 이전의 종족과 근대 이후의 민족을 연결해 보려는 종족·상징주의가 대두하고 있다. 종족·상징주의에서는 민족을 ‘역사와 운명의 공동체’로 본다는 점에서 이를 역사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1945년 광복 이후 ‘단일민족’ 용어 첫 사용



한반도

단일민족이란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였다.



이상 어느 입장에 서든 민족이란 단어가 들어간 ‘단일민족’이란 용어는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민족’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에 들어와서이다. 그런데 일제 시기까지 ‘민족’이란 용어는 많이 썼지만 ‘단일민족’이란 용어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단일민족이란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 국민국가의 건설 시기부터였다.



역사학자 손진태(좌)와 손진태의 저서 『朝鮮民族說話─硏究』, 孫晉泰著 乙酉文化社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사학자 손진태(좌)와 손진태의 저서 『朝鮮民族說話─硏究』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는 다시 여기서 우리는 다른 민족처럼 현저한 복합민족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는 물론이요, 혈액적으로도 유사 이래로 비교적 순수한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논고하여 보겠다. 엄밀한 의미의 단일민족은 사실상 존재하지 아니하나 한 민족 중에 어떤 종족의 혈액이 그 8·9할을 점유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단일민족이라 하여도 결코 과오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조선민족을 단일민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혈액 중에 한족(漢族), 몽고족, 남방족, 중세 여진족 기타 백인종의 혈액까지도 혼류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비율은 전체에 대하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략) 처음에는 부여, 고구려, 낙랑(고조선의 후신), 백제, 신라, 가락(금관 혹 가야) 등 대체로 6개 왕국을 이루었다가 낙랑은 313년 고구려에 흡수되고, 부여는 494년 또한 고구려에 흡수되고, 가락은 562년(혹은 532년) 신라에 병합되어, 그때부터 완전히 삼국이 정립 쟁패하다가, 668년 신라의 삼국통일로부터 현 조선민족의 모체가 결정적으로 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1300년간 단일민족의 단일국가로서 전승되었다.


손진태, 『朝鮮民族史槪論』上, 1948.12



1948년 12월 발간된 손진태(역사·민속학자, 1900~?)의 글에 의하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단일민족’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와 같이 비교적 단일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단일민족의 전통은 1300년 전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해서 개시되었다고 한다.



[손진태의 단일민족론] 고조선(낙랑)-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락(가야) : 6국 → 고구려-백제-신라 : 3국 → 통일신라 : 1300년간 단일민족-단일국가 전승

손진태의 단일민족론



‘단일민족’이란 용어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관련해 직접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손진태의 글보다 조금 앞서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야에 나온 이병도(역사학자, 1896~1989)의 글부터였다.



“신라의 세력범위는 겨우 대동강으로부터 덕원 부근에 이르는 일선을 북경으로 삼아 그 이남의 땅을 차지한 데 불과하였다. 신라의 통일은 지역적으로 보아 물론 완전한 의미의 삼국통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제의 고지와 유민을 온전히 아우르고 고구려 고지의 일부와 그 다수한 유민을 합치었으므로 사가(史家)는 다소 과장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이라 일러온 것이다. 하여튼 신라가 반도의 유일한 주인공이 되고 반도의 민중이 비로소 한 정부 한 법속(法俗) 한 지역내에 뭉치어 단일민족 단일국민으로서의 문화를 가지고 금일에 이른 것은 실로 이 통일에 기초를 가졌던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을 대체로 보아 우리 민족의 부락 할거시대라 한다면 정립시대를 민족소통일시대, 신라통일 이후를 민족대통일시대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신라의 반도통일은 우리 역사상에 큰 의의를 갖고 큰 시기를 획한 것이라 하겠다.”


이병도, 『朝鮮史大觀』, 1948.7



이병도 역시 손진태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우리 민족 단일화의 결정적 계기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양자 모두 신라의 삼국통일 이래 우리는 단일민족(단일국민)의 단일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병도와 손진태가 1920년대에 쓴 글을 살펴보면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우리 민족의 계통과 구성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복 전엔 민족 구성 ‘복합성’ 주목 시각도



역사학자 이병도(좌)와 이병도의 저서 『朝鮮史大觀』, 李丙燾 著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삼성출판박물관)

역사학자 이병도와 이병도의 저서 『朝鮮史大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삼성출판박물관)



먼저 이병도는 1923년 9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朝鮮史槪講」의 서론에서 “숙신, 예맥, 한(韓)을 조선인(조선민족)의 선조”라고 보면서 이들은 모두 우랄·알타이족 계통에 속한다고 보았다. 손진태 역시 1927년 3월 『』신민』에 발표한 「朝鮮民族의 構成과 其文化」란 논문에서 “지금 조선 민족의 혈액 중에는 만주족, 몽고족, 한족(漢族), 시베리아족, 인도지나족, 일본족 등 혈액이 흘러” 있는 혼혈된 민족 구성에 주목했다. 이는 1948년 발표된 두 사람의 글에서 민족의 복합성보다 단일성을 더 강조한 시각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1920년대 이병도와 손진태의 글에서 확인되는 복합적 시각은 두 사람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이들보다 먼저 20세기 초에 우리 민족의 구성에 대해 언급한 신채호와 박은식 역시 우리 민족이 다양한 계통의 종족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였다.



역사학자 신채호(좌)와 신채호의 『讀史新論』‘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니, 아아, 역사가의 책임이 그 또한 무거운 것이다.’, 단재 신채호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YES24)

역사학자 신채호와 신채호의 저서 『讀史新論』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YES24)



먼저 신채호(역사학자, 1880~1936)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에서 우리 민족을 ‘동국민족(東國民族)’이라 부르며, 부여족을 중심으로 한 선비족, 지나족, 말갈족, 여진족, 토족(土族, 韓族) 등 여섯 종족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박은식(역사학자, 1859~1925)도 1914년 서간도에서 저술한 『대동민족사』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분포한 부여, 예, 맥, 숙신, 옥저,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고대의 예맥족, 한족(韓族), 만주족을 모두 ‘대동민족(大東民族)’이라 묶어 개념화하면서 우리 민족의 범주로 파악하였다.


신채호와 박은식은 민족의 순혈성보다 복합성을 통해서 민족의 외연을 확대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무대가 일제에 의해 강점당한 한반도를 벗어나 만주까지 확장되어 있던 당시 민족운동의 움직임과 결부된 민족주의적 역사 의식의 발로였다.


이처럼 일제 시기까지는 다양한 종족들의 복합으로 우리 민족의 구성을 이해하던 시각이 광복 이후 1948년에 이르러 단일민족의 순혈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앞서 글머리에 비쳤듯이 ‘민족’이란 용어가 가지고 있는 근대적·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특징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정부 수립 앞두고 국가 단일성 강조 담론 필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 (이미지 출처: 국가기록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 (이미지 출처: 국가기록원)



1945년 8월 민족 해방에 이어 1948년 8월 국민국가 수립이라는 시대적 당면 과제 앞에서 민족과 국가의 단일성(통일성)을 강조하는 정치적·사회적 담론이 필요하였다. 당시 이병도와 손진태는 모두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특히 손진태는 문교부 편수국장(차관)으로서 새로운 ‘국사’ 편찬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순혈성을 강조하는 단일민족론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오게 된 것이었다.


이병도와 손진태 두 선학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래 1300년간 과연 한 계통의 단일민족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가 세계의 다른 국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단일한 민족 구성으로 이루어진 단일민족 국가에 가깝다고 하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지구상의 132개 국가 중 종족적으로 단일하다(homogeneous)고 할 수 있는 나라는 12개국(9.1%)에 불과하다.(출처: 미국의 정치학자 Walker Connor, 2000) 물론 한국은 12개국에 포함되며 그중에서도 종족적 구성이 매우 단출한 편에 속한다. 2018년 통계청(국가통계포털) 자료에 의하면 국내 거주 외국인이 1,651,561명으로 전체 인구(51,629,512명)의 3.19%이니, 현재의 한국을 단일민족 국가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현재의 민족 구성, 오랜 세월 여러 종족 공존 거쳐



하지만 현대 한국의 단일한 민족 구성이 신라의 삼국통일로부터 유래한 부동의 전통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현재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역사 교양서에서 통설처럼 소개되고 있는 ‘남북국시대’(발해사도 한국사에 넣어 발해를 ‘북국(北國)’으로, 통일신라를 ‘남국(南國)’으로 부르자는 주장에 따른 역사학계의 시대 구분)라는 개념만 상기해 보아도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분적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고지에 세워진 발해의 역사를 아울러 생각하면 우리 민족 구성에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계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고 그 유민 다수가 고려로 귀화해 왔거니와 그 이후에도 여진인, 몽고인 등이 부단히 이주해 와 고려의 주민이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새로 개척한 4군 6진 등 평안도·함경도 북부의 야인들(여진족)이 삼남(충청·전라·경상도) 지방에서 옮겨진 주민들과 섞여 공존·동화하였다.


고려 후기 무신정권 시기 경상도 지역에서 신라 부흥을 외치며 일어난 김사미와 효심의 반란(1193), 평안도에서 고구려 부흥을 외친 최광수의 반란(1217), 전라도에서 백제 부흥을 외친 이연년의 반란(1237) 등을 상기하면 13세기까지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체성이 남아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936) 이후에도 삼국의 정체성이 상당 기간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도 삼국민들은 오랜 기간 공존하며 서서히 동화되어 갔을 것이다.


여러 종족이 하루아침에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는 용광로는 상상의 장치(이데올로기)일 뿐이다. 현실의 환경은 여러 계통의 종족이 상당 기간 공존하며 서서히 물들어가는 샐러드 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장기지속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의 한국인이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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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고 있다. 공군사관학교 역사철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미국 남가주대학 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객원교수,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 『의식과 전쟁―고대 국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중국 고문헌에 나타난 고대 조선과 예맥』, 『한국사 연구 입문』(번역서), 『점교 삼국유사』(공저), 『(역주) 삼국유사』(공저), 『한국 상고문화와 중국 동북지방』(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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