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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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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음악 감성

눈이 오네. 눈이 쌓이네. 그리고 녹아버리네

- 당신은 어떤‘가요’ -

by 윤성희 / 2021.02.16

 

당신은 어떤가요는? 누구에게나  살면서 기쁘고 즐겁고 놀라고 슬프고 우울했을 때, 혹은 무심코 한 시절 건너가고 있을 때 가슴 한구석 갑자기 훅 들어와 자리 잡았던 노래 한곡 있었을 터. 인생의 어느 순간에 우연히 만났지만 참 특별했던 자신만의 노래에 얽힌 추억과 이야기를 작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고자 한다.



는 발이 없는 눈사람을 보면 그 안에 발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상상해보려 했다. 그 상상이 그리 쉬운 건 아니었다. 내 마음속 무언가가 자꾸 눈사람의 발을 지워버렸다. 눈 덮인 세상을 뛰어다니는 눈사람보다는 담벼락에 서서 해가 뜨지 않기를 기다리는 눈사람이 내 정조의 깊은 곳에 숨어 있어서 슬픔이 동화를 이겨버리고 마는 것이다. 기다리기만 하는 눈사람, 발이 없어 갈 수 없는 눈사람. 그 슬픈 눈사람이… …



눈, 최고의 자동기억 소환술 마법사



눈 내리는 날의 풍경

눈 내리는 날의 풍경



겨울에는 뭐니 뭐니 해도 눈이 좀 왔으면 좋겠다. 매일매일 내렸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 힘들 테니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내렸으면 좋겠다. 될 수 있으면 토요일 밤에, 아니면, 월요일 낮에 내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눈을 맞을 수 있도록. 커피 한 잔을 마시다가 창밖을 보고 어, 눈이 내리네, 하고 중얼거릴 수 있도록. 잠시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그러면 일주일을 버티는 데 조금은 힘이 되어 주지 않을까. 눈이라는 존재는 참 놀랍다. 눈이 내리는 걸 보면 자동으로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무방비로 기억이 쳐들어온다. 물론, 꼭 눈만 그런 것은 아니다. 비도 있고, 벚꽃도 있고, 바다도 있다. 노래도, 음식도, 장소도, 기억을 불러온다. 하지만 자동기억 소환술을 부리는 마법사 중에서는 눈이 가장 탁월하다. 왜 그럴까? 눈에 어떤 힘이 있어서 그런 걸까?



10cm 눈이 오네 앨범 커버 출처 벅스

10cm <눈이 오네> 앨범 커버(이미지 출처 : 벅스)



눈이 오네 구름 같은 저만치 하얀

눈이 방울져 창가를 지나

사람들과 사람들의

그림 같은 기억에 앉아 녹아가네

한해 전에 그대와 내가

눈을 맞던 거리마다에 숨겨 놓은

기억들이 광선처럼

나를 뚫고 들어와 더욱 아프게 해

지나간 마음은 지나간 그대로

그대와 나만의 아름다웠던 그 나날들이

나는 두려워져

녹아 없어질까 난 무서워



가사출처: 10cm, <눈이 오네>



하얗다! 눈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뭐니 뭐니 해도 하얀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 하얗고 환한 세상.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봤을 때 하얗게 변한 세상을 보면 마음속에 있던 선한 불이 아주 잠깐이라도 켜진다. 하지만 하얀 것 말고 또 다른 무기가 있다. 내리고, 쌓이고, 녹는 것! 이 삼 단계가 자동기억 소환술을 부리는 것이다. 몇 년 전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폭설을 만나고 차 안에서 10cm의 <눈이 오네> 라는 노래를 들은 후부터 눈이 내리면 자동으로 이 노래의 첫 소설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이 노래는 눈이 오네, 라는 가사로 시작해서 녹아가네, 라는 가사로 끝난다. 눈은 오고, 기억에 쌓이고, 그리고 녹아간다. 그 말은 곧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불러 미래의 나를 만든다는 것이다. 내리고, 쌓이고, 녹는 것 사이에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녹아 없어질까 무섭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만 같다.



도둑눈 내리던 날, 몸통보다 머리가 큰 눈사람



눈사람

눈사람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노래 가사처럼 아름다웠던 나날들이라고 할 만한 기억은 많지 않다. 눈을 보며 떠오르는 기억이란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 뿐이다. 눈이 쌓인 학교 운동장을 거꾸로 걷던 것. 그래서 나를 따라오는 내 발자국을 보던 기억. 눈에 젖은 장갑을 외갓집 부뚜막 가마솥 뚜껑에 올려놓았다가 태워 먹었던 기억, 어느 집 홈통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서 그걸 잡고 펜싱 선수 흉내를 내보던 기억. 그런 것들 뿐이다. 이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발바닥이 간지럽다. 어렸을 적 나는 눈이 오면 해가 질 때까지 놀았고 그래서 늘 손발이 꽁꽁 얼었다. 자주 동상에 걸렸다. 그렇게 놀다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 이불 밑에 꽁꽁 얼었던 발을 넣었을 때의 기분이란! 찌릿찌릿하고 간질간질하고, 이내 노곤해지고 까무룩 잠이 온다. 나는 눈을 보면 이런 사소한 풍경들을 떠올린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눈사람을 만들던 어린 시절의 어떤 날에 도착하게 된다. 밤새 눈이 소복소복 쌓였던 날로 기억한다. 도둑눈이었다. 눈을 표현하는 말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단어, 도둑눈, 어린 시절, 도둑눈이 내리면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 세상이 하얗게 되었다는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마당에 누군가 나보다 먼저 발자국을 낸 걸 보면 또 그게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암튼, 그런 날 아침에 나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밟으면 뽀드득 소리가 나는 게 아주 잘 뭉쳐지는 찰눈이었다. 몇 번 굴려보니 금방 눈 뭉치가 커졌다. 그날 나는 아주 큰 눈사람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나보다 키가 큰 눈사람을, 나는 골목 끝까지 눈을 굴리고 굴렸다. 골목을 두 번 반복했더니 나중에는 혼자 굴리기 벅찰 만큼 커다란 몸통이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머리 만들기. 또 골목을 두 번 반복해 커다란 머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머리가 너무 커서, 너무 무거워서, 몸통 위에 올릴 수 없다는 걸. 나는 내 허리까지 올라온 두 덩어리의 눈 뭉치를 보면서 웃었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몸통보다 큰 머리를 만들면서 뭐가 잘못되어 가는지 모르던 나 자신이 어리석어서.



함박눈이 밤새 쏟아져 내려

세상 모든 길이 지워지면

하얀 눈길 첫 발자국 되어

내게로 와줘

조용조용 세상 깨지 않도록

새벽 길을 가장 먼저 걸어

아름다운 첫 발자국 되어

내게로 와줘

네가 눈을 맞으며 나를 부르며 올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불을 밝혀 불을 밝혀 놓을 게

이른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미소 띠며 네가 서 있기를

눈이 부신 그 새하얀 아침

꿈처럼 오길

네가 눈을 맞으며 미소 지으며 올 때

아주 멀리서라도 난 널 알 수가 있어

함박눈이 밤새 쏟아지던 날

꿈을 깨니 너는 오지 않고

너를 찾아 난 갈 수가 없네

난 슬픈 눈사람

난 기다리네 난 갈 수 없어



가사출처 : 정미조 노래 <눈사람>



발 달린 눈사람 vs 기다리는 눈사람



The Snowman 출처 techadvisior

The Snowman(이미지 출처 : Techadvisior)



어른이 된 다음, 나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 딸이 보고 있던 <스노우맨> 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같이 보게 되었다. 그 후로 원작인 레이먼드 브릭스의 동화책을 사서 몇 번이나 보았다. 조카가 태어나면 이걸 꼭 선물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조카가 태어난 뒤로 나는 조카에게 애니메이션을 여러 번 보여 주었다. 주인공 소년은 자기 키보다 큰 눈사람을 만든다. 나처럼 실패하지 않고 근사하게 만든다. 눈사람이 소년과 같이 하늘을 나는 장면은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지만, 나는 그보다 눈사람이 소년과 같이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을 더 좋아했다. 그전까지 나는 한 번도 눈사람이 걷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왜 그걸 상상해보지 않았는지! 눈사람도 사람들이 잠든 사이 몰래 들어와 살금살금 집안을 돌아다닐 수 있고 오토바이를 타고 눈길을 달릴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그 후로 나는 발이 없는 눈사람을 보면 그 안에 발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상상해보려 했다. 그 상상이 그리 쉬운 건 아니었다. 내 마음속 무언가가 자꾸 눈사람의 발을 지워버렸다. 눈 덮인 세상을 뛰어다니는 눈사람보다는 담벼락에 서서 해가 뜨지 않기를 기다리는 눈사람이 내 정조의 깊은 곳에 숨어 있어서 슬픔이 동화를 이겨버리고 마는 것이다. 기다리기만 하는 눈사람, 발이 없어 갈 수 없는 눈사람. 그 슬픈 눈사람이.



눈사람이 사라지는 슬픔 몇 번 겪어야…



나는 소설을 쓸 때면 종종 주인공이 눈사람을 만들었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본다. 소설 속에서 눈이 내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상상을 하는 장면은 소설 속이 아니라 소설 밖에서 힘을 가지게 될 테니까. 주인공은 눈사람을 혼자 만들었을까? 형제자매들과 같이 만들었을까? 나처럼 자기 키보다 더 큰 눈사람을 만들려고 한 적이 있을까? 눈, 코, 입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목도리를 둘러주었을까? 그걸 상상하기만 해도 주인공은 이미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주인공이 눈사람을 만들었던 어린 시절을 상상하다 보면 눈사람이 녹았을 때 느꼈던 슬픔을 같이 상상해야 한다. 눈사람은 녹고 그 자리에 남은 눈코입의 흔적만 보았을 때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 슬픔을 몇 번 겪어야 아이는 어른이 되는 걸까? 그걸 상상하며 나는 주인공과 천천히 친해진다. 발이 달린 눈사람도, 발이 없는 눈사람도, 결국 녹는다. 녹아버리고 만다. 그건 때론 무섭고 때론 슬프다. 철없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녹아버리기 전에 다시 내리고 내렸으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새하얀 세상이 내 안으로 가득 들어왔으면, 쌓이고 쌓였다가 들꽃들이 고개를 내밀 때 그때 녹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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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윤성희
소설가
1973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 <감기> <웃는 동안> <베개를 베다> , 중편소설 <첫문장>, 장편소설 <구경꾼들> <상냥한 사람>이 있다. (이미지 저작권 : Jung meen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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