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청춘은 자체로 빛을 발하는 반짝반짝한 시절이 아니며, 청년은 자유로운 날갯짓을 하는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다. 청춘과 청년은 누추하고 암울하며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터널이자 거기에 갇힌 존재들을 가리키는 말에 가깝다. 그렇다면, 터널 바깥을 나서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청년은 백수, 잉여, 알바, 비정규직, 실업, 절망, 포기와 같은 말들과 관련이 깊어졌고 청춘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불안하고 모호하며 위험한 시간이 되었다.
‘청년’이란 단어의 기원
애초에 젊은 시절을 가리킨 청춘이라는 말과 달리 청년은 근대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말이다. 오늘날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많은 말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그 역사가 길지 않다. 근대 이전에는 없던 말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이전과는 다른 조합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말들이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다는 의미다. (서구의 사상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그 사상이 말과 함께 번역된 과정을 검토한 한 학자에 의하면, 근대, 개인, 사회, 권리, 자유, 자연, 존재, 연애와 같은 말들이 일본에서 새롭게 만들어졌고 동양의 주변국에 소개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한 변화를 이끌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낸 인간형을 가리키는 말인 청년은 100년이 좀 넘는 역사를 가진 대표적 신조어다.
▲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소년』의 모습
‘청년’이라는 말은 기독교청년회의 소개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졌다. ‘young/young men’의 번역어 ‘청년’이 처음 사용된 것은 1880년대 일본에서 기독교인인 코자키 히로미치(小崎弘道)가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s)를 ‘기독교청년회’로 번역하면서부터다. 본래 『당시선唐詩選』에 실린 한시 「거울에 비친 백발을 보며照鏡見白髮」 가운데 한 구절에 있던 ‘靑年’을 ‘young men’의 번역어로 만들어냈는데, 이 단어는 이후 동아시아에서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말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청년’은 1900년대 전후 근대 잡지와 신문에 종종 등장하다가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대유행어가 되었다. 물론 1900년대, 1910년대에 근대적 잡지를 만들었던 최남선이 『소년』과 『청춘』으로 제목을 삼았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소년이나 청춘이라는 말도 꽤 오랫동안 교체 가능한 것으로 활용되었다. ‘소년과학’, ‘소년수신’, ‘소년독본’ 등의 말들이 널리 쓰였다. 이러한 사정은 소년, 청춘, 청년과 같은 말의 등장보다 근대 초기에 그런 이름들로 명명해야 할 새로운 존재가 실제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사회가 그런 존재를 적극적으로 요청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1900년대 전후로 근대적 교육 제도가 만들어지고 법제화되면서 근대적 교육을 받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이름이 소년이나 청년이었다. 아이가 장가를 가면 상투를 틀고 어른이 되던(어른으로 대접받던) 시절을 지나, 말하자면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이도 아닌 시기를 보내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고 그들을 지칭할 이름도 필요해진 것이다. 대개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지칭하기는 했지만 따지자면 청년이라는 말의 쓰임에 연령 제한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제도가 미비했던 근대 초기에는 교육에 학령기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청년인가의 여부는 교육을 통해 형성된 근대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로 따져졌기 때문이다. 당시 유행한 말 가운데 ‘마음늙은이’와 같은 말이 말해주듯 나이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새로워야 청년일 수 있었다.
‘청년’의 시작과 그 변화
무엇보다 청년이 미디어를 포함한 전 사회의 폭발적 유행어가 된 것은, 국권 침탈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다. 거기에 근대문명과 서구문화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근대정신을 체화한 존재를 필요로 한 이유가 있었다. 몰락해가는 왕족과 귀족 그리고 그 시대를 지탱했던 시대정신과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젖힐 존재가 필요했는데, 그런 시대적 요청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그들은 근대의 선진적 교육을 습득해야 했다. 이렇게 청년은 창조와 파괴 열정의 표상이 되었고 미래를 담지하는 상징적 주체의 대표적 이름이 되었다. 새로움을 선취하는 존재이자 낡은 것에 비해 새 것으로 불릴 모든 가치를 선점한 혹은 갖춰야 할 존재가 청년의 이름으로 호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청년’이라는 말의 등장은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자 민족/국가에 대한 인식의 시발점이었다.
▲
갑오개혁(甲午改革)은 1894~1895년사이 조선 정부에서 전개한 제도 개혁운동으로,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불렸다.
그림은,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 만들어진 관청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그린 것이다.
이 군국기무처를통하여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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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을 시행했던 김홍집 내각의중심 인물, 김홍집의 모습.
갑오경장으로 신분사회의 해체가 선언되었지만 여전히 현실에는 신분적 위계가 잔존하고 있었다. 청년의 등장은 말하자면 계급과 지역, 성별에 제약되지 않는 하나의 단일한 새로운 집단의 형성을 알리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처음에 ‘청년회’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거니와, 꽤 오랫동안 청년은 단독적으로 쓰이기보다는 ‘오배청년, 아청년동포, 동포청년, 우리청년, 청년자제’ 등 다양한 조어를 통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청년이 개인과 사회 그리고 민족/국가의 연결고리가 되는 존재의 이름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가족의 보살핌을 받는 아이와 가족을 보살피는 어른 사이의 존재, 가족 내의 구성원으로 존재하지만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유예의 시간을 사는 존재, 국가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할 존재이자 그러한 시대정신을 내면화한 존재,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가 곧 청년인 것인데, 최근까지 청년에게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를 묻는 것은 청년이라는 말과 존재의 태생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방과 전쟁 경험을 통해 구현된 역설적 평등사회였던 한국사회의 주역으로서 청년은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시키던 1960~70년대와 정치적 민주화를 선취하고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문화적으로 널리 실험해본 1980~90년대 내내 집단으로서 빛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해왔다. 청년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시대정신의 창조자들이고 청춘이 무조건 ‘예찬’되던 그 시절들을 지나 국가파산을 경험한 1997년 이후로 그들은 언뜻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헬조선’론이나 ‘금수저/흑수저’론이 적확하게 포착했듯 청년과 청춘이 빛바랜 말이 되어버린 근본 원인은 청춘을 사는 청년들에게 있지 않다. 무엇보다 이러한 악조건에 처한 곳이 한국만도 아니다. 세대론 자체의 의미가 무력해졌고, 이제 청년이라는 이름의 세대적 동질성 보다는 계급이나 지역 그리고 성별에 의한 내적 차이가 더 커지고 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지적했듯이 절대 빈곤이 아니라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시절이다. 청년 자신의 힘이 아니라 청년이 태어난 곳, 사는 곳, 서 있는 곳이 그들의 삶을 더 많이 규정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청년은 이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어버린 것인가.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세상으로부터 호명되는 존재, 청년
청년이 근대적 정신을 체현한 혹은 해야 하는 존재이자 집합적 힘을 발휘하는 존재라는 규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청년이 ‘호명’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청년들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그들에게 특정한 성격이 부여되는 것은 대개 그들을 ‘불러내어 묶고 이름 붙이고자’ 하는 이들(대개는 기성 세대인데)에 의해서였다. 청년, 사회청년, 문학청년, 여자청년 등 청년의 다양한 분화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았지만, 실제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관심을 끌었던 호명들은 불량청년, 소년불량, 맑스보이, 레닌걸, 신세대, X세대, N세대, 88만원세대,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 N포세대 등 기성세대가 이해할 수 없는 젊은 세대의 부정적 면모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즈음의 청년들은 속물도 되지 못한 잉여라는 다소간 자조적이고도 방어적인 태도로 자신들을 규정한다. 하지만 그런 청년의 얼굴에도 하나의 표정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약한 자와 소외된 자들에 대한 혐오로 자신의 찌질함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기이한 인정 투쟁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배제된 자들이 좀더 배제된 자들을 혐오하는 감정을 가격할 수 없는 시스템에 대한 복수인 것처럼 치장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근대가 시작된 이래 청년의 계보는 기성세대에 의해 ‘불량한 것들’로 분류되었던 존재들의 반란을 통해 새롭게 구축되어왔다. 그것은 사회적 호명을 거부하거나 호명에 다르게 대답하는 방식으로 질문의 맥락과 의미를 뒤틀어버릴 때 생겨난 효과였다.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국가의 수립을 준비해도 모자랄 시간에 머리를 기르고 술과 놀이에 빠져 다른 즐거움을 찾으려던 존재들,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의 위인들, 이름난 문인들이 이런 ‘불량한’ 잉여짓으로 청춘을 흘려보낸 존재들이다.
21세기 불모의 땅이 허용한 잉여적인 것에 지금까지의 관점으로는 포착하지 못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움직임의 씨앗이 있을 거라는 믿음 자체가 오류는 아니다. 역사라는 장기적 안목에서 보자면 특정 시대의 청년들이 특별히 더 청년다웠을 까닭이 따로 없다. 오랫동안 준비된 싹이 맞춤한 환경을 만나 비를 만난 사막의 꽃들 같은 활기로 끓어올랐던 것은 아닐까.
문학평론가.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문학 계간지 『21세기문학』 편집위원. 누락된 말, 배제된 공간, 소외된 존재에 관심이 많다.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분열하는 감각들』,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 『감정의 인문학』(공저)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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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계보, 혹은 불량한 것들의 잉여짓
소영현
2016-03-10
청년의 계보, 혹은 불량한 것들의 잉여짓
오늘날 청춘은 자체로 빛을 발하는 반짝반짝한 시절이 아니며, 청년은 자유로운 날갯짓을 하는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다. 청춘과 청년은 누추하고 암울하며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터널이자 거기에 갇힌 존재들을 가리키는 말에 가깝다. 그렇다면, 터널 바깥을 나서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청년은 백수, 잉여, 알바, 비정규직, 실업, 절망, 포기와 같은 말들과 관련이 깊어졌고 청춘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불안하고 모호하며 위험한 시간이 되었다.
‘청년’이란 단어의 기원
애초에 젊은 시절을 가리킨 청춘이라는 말과 달리 청년은 근대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말이다. 오늘날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많은 말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그 역사가 길지 않다. 근대 이전에는 없던 말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이전과는 다른 조합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말들이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다는 의미다. (서구의 사상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그 사상이 말과 함께 번역된 과정을 검토한 한 학자에 의하면, 근대, 개인, 사회, 권리, 자유, 자연, 존재, 연애와 같은 말들이 일본에서 새롭게 만들어졌고 동양의 주변국에 소개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한 변화를 이끌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낸 인간형을 가리키는 말인 청년은 100년이 좀 넘는 역사를 가진 대표적 신조어다.
▲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소년』의 모습
‘청년’이라는 말은 기독교청년회의 소개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졌다. ‘young/young men’의 번역어 ‘청년’이 처음 사용된 것은 1880년대 일본에서 기독교인인 코자키 히로미치(小崎弘道)가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s)를 ‘기독교청년회’로 번역하면서부터다. 본래 『당시선唐詩選』에 실린 한시 「거울에 비친 백발을 보며照鏡見白髮」 가운데 한 구절에 있던 ‘靑年’을 ‘young men’의 번역어로 만들어냈는데, 이 단어는 이후 동아시아에서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말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청년’은 1900년대 전후 근대 잡지와 신문에 종종 등장하다가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대유행어가 되었다. 물론 1900년대, 1910년대에 근대적 잡지를 만들었던 최남선이 『소년』과 『청춘』으로 제목을 삼았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소년이나 청춘이라는 말도 꽤 오랫동안 교체 가능한 것으로 활용되었다. ‘소년과학’, ‘소년수신’, ‘소년독본’ 등의 말들이 널리 쓰였다. 이러한 사정은 소년, 청춘, 청년과 같은 말의 등장보다 근대 초기에 그런 이름들로 명명해야 할 새로운 존재가 실제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사회가 그런 존재를 적극적으로 요청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1900년대 전후로 근대적 교육 제도가 만들어지고 법제화되면서 근대적 교육을 받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이름이 소년이나 청년이었다. 아이가 장가를 가면 상투를 틀고 어른이 되던(어른으로 대접받던) 시절을 지나, 말하자면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이도 아닌 시기를 보내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고 그들을 지칭할 이름도 필요해진 것이다. 대개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지칭하기는 했지만 따지자면 청년이라는 말의 쓰임에 연령 제한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제도가 미비했던 근대 초기에는 교육에 학령기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청년인가의 여부는 교육을 통해 형성된 근대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로 따져졌기 때문이다. 당시 유행한 말 가운데 ‘마음늙은이’와 같은 말이 말해주듯 나이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새로워야 청년일 수 있었다.
‘청년’의 시작과 그 변화
무엇보다 청년이 미디어를 포함한 전 사회의 폭발적 유행어가 된 것은, 국권 침탈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다. 거기에 근대문명과 서구문화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근대정신을 체화한 존재를 필요로 한 이유가 있었다. 몰락해가는 왕족과 귀족 그리고 그 시대를 지탱했던 시대정신과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젖힐 존재가 필요했는데, 그런 시대적 요청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그들은 근대의 선진적 교육을 습득해야 했다. 이렇게 청년은 창조와 파괴 열정의 표상이 되었고 미래를 담지하는 상징적 주체의 대표적 이름이 되었다. 새로움을 선취하는 존재이자 낡은 것에 비해 새 것으로 불릴 모든 가치를 선점한 혹은 갖춰야 할 존재가 청년의 이름으로 호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청년’이라는 말의 등장은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자 민족/국가에 대한 인식의 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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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甲午改革)은 1894~1895년사이 조선 정부에서 전개한 제도 개혁운동으로,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불렸다.
그림은,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 만들어진 관청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그린 것이다.
이 군국기무처를통하여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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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을 시행했던 김홍집 내각의중심 인물, 김홍집의 모습.
갑오경장으로 신분사회의 해체가 선언되었지만 여전히 현실에는 신분적 위계가 잔존하고 있었다. 청년의 등장은 말하자면 계급과 지역, 성별에 제약되지 않는 하나의 단일한 새로운 집단의 형성을 알리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처음에 ‘청년회’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거니와, 꽤 오랫동안 청년은 단독적으로 쓰이기보다는 ‘오배청년, 아청년동포, 동포청년, 우리청년, 청년자제’ 등 다양한 조어를 통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청년이 개인과 사회 그리고 민족/국가의 연결고리가 되는 존재의 이름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가족의 보살핌을 받는 아이와 가족을 보살피는 어른 사이의 존재, 가족 내의 구성원으로 존재하지만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유예의 시간을 사는 존재, 국가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할 존재이자 그러한 시대정신을 내면화한 존재,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가 곧 청년인 것인데, 최근까지 청년에게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를 묻는 것은 청년이라는 말과 존재의 태생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방과 전쟁 경험을 통해 구현된 역설적 평등사회였던 한국사회의 주역으로서 청년은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시키던 1960~70년대와 정치적 민주화를 선취하고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문화적으로 널리 실험해본 1980~90년대 내내 집단으로서 빛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해왔다. 청년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시대정신의 창조자들이고 청춘이 무조건 ‘예찬’되던 그 시절들을 지나 국가파산을 경험한 1997년 이후로 그들은 언뜻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헬조선’론이나 ‘금수저/흑수저’론이 적확하게 포착했듯 청년과 청춘이 빛바랜 말이 되어버린 근본 원인은 청춘을 사는 청년들에게 있지 않다. 무엇보다 이러한 악조건에 처한 곳이 한국만도 아니다. 세대론 자체의 의미가 무력해졌고, 이제 청년이라는 이름의 세대적 동질성 보다는 계급이나 지역 그리고 성별에 의한 내적 차이가 더 커지고 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지적했듯이 절대 빈곤이 아니라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시절이다. 청년 자신의 힘이 아니라 청년이 태어난 곳, 사는 곳, 서 있는 곳이 그들의 삶을 더 많이 규정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청년은 이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어버린 것인가.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세상으로부터 호명되는 존재, 청년
청년이 근대적 정신을 체현한 혹은 해야 하는 존재이자 집합적 힘을 발휘하는 존재라는 규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청년이 ‘호명’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청년들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그들에게 특정한 성격이 부여되는 것은 대개 그들을 ‘불러내어 묶고 이름 붙이고자’ 하는 이들(대개는 기성 세대인데)에 의해서였다. 청년, 사회청년, 문학청년, 여자청년 등 청년의 다양한 분화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았지만, 실제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관심을 끌었던 호명들은 불량청년, 소년불량, 맑스보이, 레닌걸, 신세대, X세대, N세대, 88만원세대,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 N포세대 등 기성세대가 이해할 수 없는 젊은 세대의 부정적 면모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즈음의 청년들은 속물도 되지 못한 잉여라는 다소간 자조적이고도 방어적인 태도로 자신들을 규정한다. 하지만 그런 청년의 얼굴에도 하나의 표정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약한 자와 소외된 자들에 대한 혐오로 자신의 찌질함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기이한 인정 투쟁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배제된 자들이 좀더 배제된 자들을 혐오하는 감정을 가격할 수 없는 시스템에 대한 복수인 것처럼 치장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근대가 시작된 이래 청년의 계보는 기성세대에 의해 ‘불량한 것들’로 분류되었던 존재들의 반란을 통해 새롭게 구축되어왔다. 그것은 사회적 호명을 거부하거나 호명에 다르게 대답하는 방식으로 질문의 맥락과 의미를 뒤틀어버릴 때 생겨난 효과였다.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국가의 수립을 준비해도 모자랄 시간에 머리를 기르고 술과 놀이에 빠져 다른 즐거움을 찾으려던 존재들,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의 위인들, 이름난 문인들이 이런 ‘불량한’ 잉여짓으로 청춘을 흘려보낸 존재들이다.
21세기 불모의 땅이 허용한 잉여적인 것에 지금까지의 관점으로는 포착하지 못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움직임의 씨앗이 있을 거라는 믿음 자체가 오류는 아니다. 역사라는 장기적 안목에서 보자면 특정 시대의 청년들이 특별히 더 청년다웠을 까닭이 따로 없다. 오랫동안 준비된 싹이 맞춤한 환경을 만나 비를 만난 사막의 꽃들 같은 활기로 끓어올랐던 것은 아닐까.
문학평론가.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문학 계간지 『21세기문학』 편집위원. 누락된 말, 배제된 공간, 소외된 존재에 관심이 많다.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분열하는 감각들』,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 『감정의 인문학』(공저)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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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청년의 계보, 혹은 불량한 것들의 잉여짓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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