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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첫 사랑의 인문학 :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

사랑의 논리학을 위한 하나의 보충과 두 개의 주석

신형철

2016-01-22

첫 사랑의 인문학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소박하게나마 대답을 시도해 본 것은 아래 글에서였다. 사랑이라는 것이 실은 본능, 충동, 욕망 등의 변장일 뿐이라고 단정하는 입장에 반대하고, 사랑 고유의 구조를 도출해보자는 취지였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표지
▲ ⓒ마음산책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_「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모든 관계는 일종의 교환이라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사랑도 하나의 관계라면, 사랑 안에서도 모종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여타의 관계와는 다른, 사랑 고유의 교환 구조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결여의 교환’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다. 부끄러워서 대개는 감춘다. 타인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그의 결여를 발견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의 결여가 못나 보여서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여 때문에 그를 달리 보게 되는 일. 그 발견과 더불어, 나의 결여는, 사라졌으면 싶은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결여와 나누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내가 아니면 그의 결여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 여겨지고, 그야말로 내 결여를 이해해 줄 사람으로 다가온다. 결여의 교환 구조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로 만들었으니, 두 사람은 이번 생을 그 구조 안에서 견뎌나갈 수 있으리라. 말하자면 이런 관계가 있지 않을까. 있다면, 바로 그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 이후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위 논의를 보완하고 싶어졌다. ‘사랑의 관계 속으로 진입할 때 나에게 생기는 변화는 어떤 것일까? 흔히 다시 태어난다고들 하는데, 새로 태어난 나는 이전의 나와 어떻게 다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완전함’과 ‘온전함’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으나, 영어에서 ‘perfect(완벽)’와 ‘complete(완성)’ 사이에도 어감의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하기로 하자.) 사랑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해서 내 결여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여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완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대방을 통해서 내 결여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는 있다. 내 결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 결여가 더는 고통이 아닌 생, 그런 생을 살 수 있게 된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더 온전해진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나니, 비슷한 말을 이미 한 사람들이 (당연하게도)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적 힌트를 주었을 두 개의 선행 텍스트를 돌이켜 찾아내 그 영향 관계를 밝혀둔다.


주석 1. 인간은 마치 넙치처럼


플라톤의 『향연』 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니 골자만 간단히 옮겨보자. 아주 먼 옛날, 인간은 두 개체가 한 몸으로 붙어 있었고, 옆구리와 등이 둥글어서, 전반적으로 구(球)에 가까운 모양이었다는 것. 얼굴은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고, 네 개의 팔과 다리로 민첩하고 유연하게 움직였다는 것. 어떤 성별의 개체로 조합돼 있는가에 따라 세 종류로, 즉, ‘남자+남자’, ‘여자+여자’, ‘남자+여자’, 이상 세 개의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는 것. 그들은 능력이 대단했으며 또 그런 만큼 오만하기까지 해서 급기야 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하늘을 침공하기까지 했다는 것. 그래서 제우스가 고심 끝에 인간을 모두 반으로 쪼개 버렸다는 것. 그러자 인간들은 잃어버린 반쪽을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다는 것. 그래서 제우스는 그전에는 바깥쪽을 향해 있던 인간의 성기를 안쪽으로 돌려놓아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 결합하고 출산하여 종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는 것.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두 종의 번역본을 함께 옮긴다.)


향연 ⓒ문학과지성사
▲ 향연 ⓒ문학과지성사

 

결과적으로 우리들 각자는 하나가 둘로 나뉘어진 존재, 즉 반편(反片)의 사람이어서, 그 모습이 마치 넙치 같다네. 그리하여 우리들 각각은 자기로부터 나뉘어져 나간 또 다른 반편을 끊임없이 찾게 되는 것이라네. (…)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노력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네. _ 박희영 옮김, 플라톤, 『향연』, 문학과지성사, 2003. 87p, 90p, 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향연 ⓒ이제이북스
향연 ⓒ이제이북스


그러기에 우리 각자는 한 인간의 부절(符節)이네. 마치 넙치들 모양으로 하나에서 둘로 잘라져 있으니까 말일세. 각자는 자신의 부절을 하염없이 찾아다닌다네. (…) 그래서 그 온전함에 대한 욕망과 추구에 붙여진 이름이 사랑(에로스)이지. _ 강철웅 옮김, 플라톤, 『향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이제이북스, 2010. 100p, 103p, 밑줄은 인용자. *부절(符節). 물건을 반으로 쪼개 나눠 갖고 나중에 맞춰보아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했던 것 이를 사랑의 기원에 대한 신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는 신비로운 현상의 원인에 대한 상상적 문답이다. 왜 우리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가? 원래부터 둘이였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둘일 때가 더 좋기 때문이라는 것이 강조돼야 한다. 위의 두 번역 중에서 원문에 더 충실한 것이 어느 쪽인지를 밝히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되, 적어도 내가 이해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취지에 더 부합하는 것은 후자다. 둘이 (다시) ‘하나임’을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둘일 때라야 ‘온전함’에 도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이 신화적 상상력의 현명한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일 때보다 둘일 때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나는, 내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사실로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서, 온전해진다. 다만 그것은 위 신화가 말하는 것처럼 운명적 짝을 다시 만나 이뤄지는 기적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로 인해 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상호 배려로 성취되는 일일 터이다.


주석 2. You complete me


ⓒNew line cinema, 2001. 영화 『헤드윅』의 한 장면. “우리 각자가 한 인간의 부절”이라는 플라톤의 말을 환기시킨다.
ⓒNew line cinema, 2001. 


영화 『헤드윅』의 한 장면. “우리 각자가 한 인간의 부절”이라는 플라톤의 말을 환기시킨다. 플라톤의 『향연』 말고 또 내가 떠올린 것은 하나의 문장이었다. “You complete me.” 이 문장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이라는 나의 생각에 얼마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 문장의 출처가 『다크 나이트(크리스토퍼 놀란, 2008)』라고 생각했다.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는 배트맨의 물음에 조커는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아니야. 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너 없이 내가 뭘 하겠어. 다시 돌아가서 마피아 마약상들이나 등쳐먹으라고? 아니, 아니지, 아니야. 너는… 너는… 나를 완성시켜.”(I don't, I don't want to kill you! What would I do without you? Go back to ripping off mob dealers? No, no, NO! No. You… you… complete me.) 『다크 나이트』가 이례적으로 깊이 있는 오락 영화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선과 악의 기묘한 적대적 공존/착종 관계인데, 저 대사는 그것을 절묘하게 함축한다. 그러나 사실 이 문장은 1996년에 이미 널리 회자된 적이 있다. 굳이 분명히 해두자면 저작권은 이쪽에 있다.


ⓒWarner bros., 2008. 다크 나이트』는 선(배트맨)이 있어야 완전해지는 악(조커)의 초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 ⓒWarner bros., 2008. 


오늘밤, 우리의 작은 프로젝트, 그리고 우리의 회사는 엄청난 밤을 보냈어. 정말 정말 엄청난 밤이야. 그러나 그것은 완성이 아니었어. 완성되었다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어. 당신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야.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당신과 함께 웃을 수 없었기 때문이야. 나는 내 아내, 내 아내가 그리운 거야. 우리는 냉소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어. 냉소적인, 세상. 게다가 거친 경쟁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지.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나를 완성시켜.Tonight, Our little project, our company had a very big night - a very, very big night. But it wasn't complete, wasn't nearly close to being in the same vicinity as complete, because I couldn't share it with you. I couldn't hear your voice or laugh about it with you. I miss my - I miss my wife. We live in a cynical world, a cynical world, and we work in a business of tough competitors. I love you. You complete me.You complete me. 영화 『제리 맥과이어(카메론 크로우, 1996)』에서, 극적인 성공을 거두고 나서야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한 남자가 별거 중인 아내를 찾아와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에서 행하는 긴 독백이다. “당신이 나를 완성시켜.” 과연 아름다운 문장이지만, 이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위 대사 전체가 사랑의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정확히 지시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앞에서 ‘완전함’과 ‘온전함’을 분별하고 이를 perfect(완벽)와 complete(완성)의 차이와 비교해 볼 수 있겠다고 했는데, 이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위 대사는, 이런저런 요소들이 내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당신이라는 요소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힐 소지가 있다. 이것은 사랑 속에서 주체가 ‘온전해지는’ 일과는 다르다. 아무리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소중한 요소라 할지라도 요소는 한낱 요소일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를 채우는 ‘요소’가 아니라 나를 세우는 ‘구조’(여야 한)다. 나는 당신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속에서 온전해진다. 결여는 여전히 있되 그 결여가 더는 고통이 되지 않는, 온전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를 그런 사람이 되게 한다.


ⓒSony, 1996. “그의 남은 삶이 다시 ‘시작’된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 ⓒSony, 1996.


“그의 남은 삶이 다시 ‘시작’된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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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신형철
신형철

1976년에 태어났다. 1995년부터 10년 동안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했고, 2005년 봄에 계간 『문학동네』로 등단해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2008년에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2011년에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2014년에 영화에세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출간했다. 2013년 여름부터 1년 남짓 팟캐스트 ‘문학동네 채널1: 문학 이야기’를 진행했고, 2014년 3월부터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한국문학과 문학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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