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은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칼럼
Unfolding
전기가오리의 편지와 인문정신문화 십자말풀이
청년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동안 무엇을 써야 할지 정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저는 이제 선뜻 청년이라고 불리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다른 세대의 삶을 잘 알지 못합니다만, 망설임에는 그보다 더 큰 이유도 있습니다.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이 같은 처지에 있고, 같은 어려움을 겪으며, 같은 해결책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이와 이미 직장을 다니는 이, 가족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 서울에 사는 이와 다른 지역에 사는 이가 마주하는 삶의 조건은 같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한데 묶어 그들에게 “힘내라”라거나 “포기하지 말라”라고 말하면, 위로를 전하기도 전에 그 차이부터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전기가오리는 철학 논문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작은 출판사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전기가오리를 운영하면서 저는 조금 다른 문제를 자주 만났습니다. 철학을 읽고 싶다는 사람에게 “열심히 읽으세요”, “읽힐 때까지 버티세요”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든 막상 읽으려고 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읽고 싶은 논문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을 수 있고, 번역이 있어도 낯선 용어와 배경지식이 아무 설명 없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무엇부터 읽어야 하는지를 알기 어렵고, 한 문장을 이해하려고 다른 책 여러 권을 뒤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 시간과 비용의 문제가 더해집니다. 번역과 설명을 마련한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공부할 시간과 비용까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전기가오리 역시 이런 조건을 모두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려면 그 일 자체 때문에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그 일과 관계없이 덧붙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철학 논증이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앞쪽에 속합니다. 논증을 따라가고 전제와 결론을 구별하고 반론을 검토하는 수고는 철학을 읽는 일 자체에 들어있습니다. 반면 번역이 지나치게 난삽하거나, 핵심 용어가 설명되지 않거나, 필요한 자료를 구할 길이 없어서 생기는 어려움은 다릅니다. 그런 장애물을 그대로 두면서 그것까지 ‘철학 공부의 어려움’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습니다.
전기가오리에서 논문을 번역한 후 꼭 해설을 따로 덧붙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저는 작업을 마친 후 번역문을 단락별로 다시 읽으면서 저자가 그 단락에서 무엇을 주장하는지, 앞에서 무엇을 확보했고 이제 무엇을 하려는지를 설명합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강의안에서 논증의 순서를 다시 정리하고, 방송에서는 문장을 하나씩 따라가며 왜 다음 문장이 나오는지를 함께 확인합니다. 이 과정은 이미 갖고 있던 읽기 능력을 발휘하도록 돕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전제와 결론을 찾고, 두 주장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고, 이해되지 않는 지점을 특정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읽기 능력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떤 능력은 도구와 설명과 훈련이 갖추어진 조건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어떤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할 때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그 능력을 훈련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가 있었는지입니다. 지금 당장 해내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능력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도 없고, 반대로 이미 능력이 잠재되어 있음에도 환경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시험에 떨어졌거나 취업하지 못했거나 어떤 공부를 따라가지 못했을 때, 개개인의 준비나 능력은 가능한 설명 단위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그것을 언제나 맨 앞에 있는 설명 단위로 꺼낼 이유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구체적인 기회가 있었는지, 필요한 정보에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 실패한 뒤 다시 시도할 여유가 있었는지를 함께 살펴야 개인의 능력을 원인으로 드는 설명도 비로소 정확해집니다.
제가 이 글에서 ‘인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문학에 속하는 모든 연구와 활동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곧바로 능력이나 의지의 문제로 돌리지 않고,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고 무엇이 가로막혀 있었는지를 가려낼 수 있게 하는 개념과 판단 기준을 마련하는 작업을 가리킵니다. 자유와 방치, 선택과 강요, 자율과 고립을 구별하고,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를 묻기 전에 누가 무엇을 결정할 수 있었는지를 따져보게 하는 일이 그 예입니다. 오래된 텍스트를 연구하고 주석하는 일도 물론 중요합니다. 다만 그 말의 깊이에 감탄하는 데서 작업이 끝난다면, 제가 여기서 말하는 인문의 역할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오래된 텍스트는 우리가 지금 겪는 일을 더 정확하게 말하고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줄 때 비로소 현재의 문제와 연결되고 의의를 획득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문의 역할은 좋은 가치의 목록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문은 우리로 하여금 익숙한 가치어를 당연하게 이해해 온 방식을 다시 따져보게 합니다. 가령 자율성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제도에 기대고, 우리 자신보다 먼저 만들어져 전수된 지식과 기술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자율성의 문제는 의존을 없애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가 사람이 선택하고 행동할 여지를 넓히고, 어떤 관계가 그것을 좁히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자유, 공정성, 공동체 같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휘와 개념들이 좋은 가치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이 실제 상황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다시 묻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청년에게 어떤 덕목을 갖추라고 권하는 글을 쓰는 데 조심스럽습니다. 더 성실하라거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거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이미 힘든 사람에게 더 강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면 위로는 다시 하나의 숙제가 됩니다. 무엇이 자신을 가로막는지 스스로 분석하고 조건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건을 진단하고 바꾸는 데에도 시간과 정보와 언어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바꿀 권한이 필요합니다. 그런 자원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조건을 바꾸라고 말한다면, 끈기 대신 다른 능력을 요구하는 것일 뿐이겠죠.
전기가오리의 운영 방식은 제가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자료를 번역할지, 무엇을 설명할지, 어떤 순서로 읽게 할지를 결정할 권한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자료를 어떤 가격에 제공할지도 제가 어느 정도 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에게 공부할 시간을 마련해주거나 생활비 부담을 없애줄 수는 없습니다. 한 개인이 취업 시장, 학교 제도, 주거 환경을 다시 설계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조건을 바꾸는 일은 그 조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보다 그 조건을 만들고 관리할 권한을 가진 쪽에 먼저 주어지는 과제입니다. 학교라면 학생에게 더 잘 배우라고 요구하기 전에 배움 자체에 필요한 어려움과 그 일에 불필요하게 덧붙은 장애물을 구별해야 합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걷어낼지 판단하는 책임은 그 형식을 만드는 쪽이 먼저 맡아야 합니다.
어떤 조건이 오래 지속되면 사람은 그 조건에 맞추어 기대와 선택을 조정하기도 합니다. 읽을 수 없는 텍스트를 거듭 만난 사람은 ‘철학은 나에게 맞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 있고, 공부할 시간과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운 사람은 애초에 공부를 자신의 선택지에서 제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불편이나 요구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장애물이 없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형식을 만드는 쪽은 사람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어떤 선택을 처음부터 포기하게 되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조건을 바꿀 책임을 먼저 맡는다는 것은 이런 데까지 책임의 범위를 넓히는 일입니다.
조건을 만드는 쪽이 먼저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말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는 다른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지금 잘되지 않는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 언제나 자신을 더 능력 있고 강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그대로여도 그 사람을 둘러싼 조건이 달라지면 가능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어떤 일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언제나 그 사람의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주어진 조건입니다.
‘청년, 오래된 미래의 낙관적 이정표’라는 이번 호의 주제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낙관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낙관이 결국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라면 저는 그런 말을 건네기 어렵습니다. 노력한다고 언제나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손댈 수 없는 조건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도 낙관이라는 말을 버리지 않을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공부의 방식, 일하는 방식, 기회를 나누는 방식도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조건 가운데에는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만들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낙관의 근거는 청년이 주어진 조건 안에서 더 잘 버티리라는 기대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기가오리 신우승 드림
부록
인문정신문화 십자말풀이
가로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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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권
자기 삶과 신체에 관한 중요한 일을 다른 사람이 대신 결정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보는 권리. 대한민국 헌법 제10조가 보장의 근거가 된다.
hint: 성적 ○○○○권, 개인정보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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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사람을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전제하는, 인간이 그 자체로 지니는 값. 1948년 세계 인권 선언 제1조에서 그 원칙이 명시되었다.
hint: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그 ○○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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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
남이 정해놓은 자리에 놓인 대상에 머물지 않고, 자기 행위의 출발점이자 주인이 되는 성질. 현대철학에서는 단순히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의 능력' 뿐 아니라, 구조, 타자, 권력 관계 속에서 이것이 어떻게 주조되는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다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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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구성원들이 일정한 관계와 규범, 생활이나 목적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는 집단. 1887년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스가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를 구별해 논하며 이 개념을 체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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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성
누구나 상처받고 손실을 입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으며 따라서 상호 의존할 수 있다는,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성질이나 상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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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리
인간이 동물, 생명체, 생태계와 자연환경을 어떻게 대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의무를 지는지를 묻는 윤리. 린 화이트의 1967년 논문 「우리 생태 위기의 역사적 뿌리」를 이 담론의 출발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세로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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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
제도적 제약을 거의 받지 않고 국가의 주요 권력을 한 사람이 쥔 정치체제에서, 그 권력을 쥔 자. 역사 속 대표적인 인물로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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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
다른 사람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세운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이나 상태를 가리킨다.
hint: 타율성의 반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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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론
사회의 제도가 어떤 원칙에 따라 정당하게 짜여야 하는지를 다루는 이론. 1971년 존 롤스가 쓴 정치철학서의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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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밀○
개념을 구별하거나 논증을 전개할 때 애매함이나 비약을 허용하지 않고 정확한 기준을 지키는 성질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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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성
규칙과 기회, 부담과 혜택을 특정인에게 자의적으로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적용하지 않는 성질. 초기에는 분배의 원칙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했다. 현대에는 단순한 형평성의 문제를 넘어 다양한 차원에서 논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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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전○
한 사회를 이루는 주요 제도와 운영 방식이 다른 체제로 바뀌는 과정. 단순한 정권 교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권력 구조, 경제 체계, 사회적 구성 등을 포괄하는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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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리
개인과 집단의 생각·감정·행동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맺는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 대표적인 예시로는 동조, 복종, 편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