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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손끝은 아직 무디어지지 않았다

대전 대창이용원 이종완

이용원

2018-03-16


간판은 이가 맞지 않은 채 마감이 벌어졌다. 출입문에 붙인 가게 이름과 전화번호는 한껏 모양을 내고 정성을 들였지만, 정확하게 제자리에 붙지 않은 자유분방함을 보인다. 이발소 사인물은 붙들고 있는 앵글에 기운이 빠졌는지 살짝 누웠어도 잘 돌아간다. 모든 ‘아귀’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대신에 여기저기 보이는 빈틈이 묘한 이완감을 준다. 이 모든 것은 세월의 힘이다.

 

 좌) 대창이용원 외관, 우) 이종완 이발사

▲ 여름이건 겨울이건 늘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손님을 맞는 이종완 이발사

 

"사실, 내가 환갑 때까지만 이발소를 하고 그만두려고 그랬어. 근데, 막상 그 나이가 되니까, 너무 젊은 거야.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이나 친구들도 그만두면 무얼 할 거냐고! 계속해야 한다고 난리를 치고. 그런데 마침 이 동네 개발한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집이 헐릴 때까지만 하자고 했는데 이렇게 오래 했네. 지금이야 개발이 언제 될는지 알 수가 없어. 도로를 널찍하게 낸다고 바로 옆집은 조만간 뜯을 것 같던데."

 

대창이용원 내부

대전 소제동에 있는 대창이용원. 이발소 한쪽, 흰색 타일로 마감한 세면대는 1960년대 중반에 가게 문을 열었던 그때 그 모습이다. 세면대 옆에는 큰 전기밥솥이 있다. 밥 대신 온수가 따뜻하게 담겨 있다.

 

열다섯 소년, 철공소 거쳐 이발 기술을 배우다

 

이종완씨의 고향은 조치원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많이 들어선 신안동에서 1937년에 태어났다. 9남매 중 넷째. 호적에는 1939년생으로 올랐다. 그 시대 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장질부사나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뜰까 걱정스러워 한 2년 두고 보아서 그렇다. 광복하던 해 들어간 국민학교에서는 공부도 곧잘 했다. 그러나 세상은 이종완씨가 계속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480명 모집하는 중학교 시험에 48등으로 합격했지만 위로 형들과 누나가 이미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 진학하기 힘든 가정형편이었다. 부모님은 넷째인 그도 학교를 보낼 생각으로 교복과 교모, 가방을 사 주었다. 그러나 중학시절은 한 달 남짓만에 끝나 버렸다.


"월요일 아침 조회 때마다 입학금을 못낸 학생을 전부 앞으로 불러내는 거야. 그렇게 망신을 주는 거지. 처음엔 480명 중에 150명이 앞으로 나오더니, 마지막에는 대략 20명이 남았어. 그때는 교문을 잠가 아예 못 들어오게 해 버리더라고."


당시 입학시험에 합격한 학생이 내야 할 입학금이 10만 원이었다면 보결(補缺)로 입학하는 학생이 낼 돈은 50만 원이었다고 한다.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났다. 학교 입장에서는 보결 학생을 많이 받을수록 밑질 것이 없는 장사였다.


"부모님께선 전쟁통에 입학금을 어떻게라도 융통해 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신 모양이여. 다들 어려운 세상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아버지는 친척 소개로 이종완씨를 철공소에 보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기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열다섯 살에 시작한 철공소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고 그 힘든 이름을 가진 공구들을 찾아오라고 할 때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하면 기술자가 들고 있던 쇠붙이로 쥐어터지기 일쑤였다. 한 달만에 철공소 생활은 막을 내렸다.


다음에 찾은 기술이 ‘이발’이다. 기술자 세 명에 면도사 한 명이 있던 신안동의 ‘신안이발소’였다. 청소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머리 감기는 것부터 배웠다. 그곳에서 2년 동안 기본적인 기술을 배웠다.


이발소 내 걸려있는 3가지의 액자 (왼)한국미용사회 상임위원 임명장, (중)이발요금, (오)이용자면허증

▲  이발소 내 걸려있는 3가지의 액자 (왼)한국미용사회 상임위원 임명장, (중)이발요금, (오)이용자면허증  

 

"그 다음에 옮긴 곳이 원동에 있던 ‘청이발소’였던가 그래. 거기서 이발 기술을 완벽하게 배울 수 있었어. 이발 기술을 다 배우는 데까지 대략 5년 걸렸어. 그리고는 바로 군대에 갔지."


제대하고 삼성동 '미영이발소'에 취직했다. 그리고 1964년에 결혼하면서 그 이발소를 인수했다가 얼마 안 있어 소제동 지금 자리 건너편에 '대창이용원'을 개업했다. 큰 대(大)자에 창성할 창(昌)자를 썼다. 가게 이름은 주변 사람들이 아이 이름 짓기를 청할 정도로 한학에 조예가 있었던 아버지가 지어 주셨다. 개업 당시 소제동은 중구 대흥동, 선화동과 함께 대전에서 제법 괜찮은 동네로 꼽혔다. 이종완씨는 세 번째로 좋은 동네였다고 설명한다. 대부분 철도청 소유지였고 그들의 관사가 마을을 이루었다.


"그러다 철도청이 토지와 주택을 불하했지. 시세보다 거의 3분의 1은 싼 가격으로 넘긴 거야. 그리고 남은 땅도 민간에 매각하면서 관사와 관사 사이에 일반 주택이 끼어들기 시작했어. 동네가 복잡해지기 시작한 거지."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손님들 때문에 은퇴 못해


소제동 대창이발소에는 손님이 늘 넘쳐났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가 호황기였다. 그 조그만 이발소에 하루 150명에서 많게는 200명까지 손님이 들었다. 당시 직원만 다섯 명이었다. 화장실도 교대로 가야 하고, 신간 만화책과 텔레비전을 갖춘 안채 방에서는 넋 놓고 기다리다가 정작 이발도 못한 채 그냥 돌아가는 학생이 부지기수였다.

 

대창이용원 내부

 

"당시에 주변 대전상고나 동아공고, 계룡공고 등에 다니는 학생이 전부 우리 가게 앞을 지나갔다고. 버스 노선이 지금처럼 잘 정비되어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많이 걸어 다녔지. 회사원들도 당연히 많이 다니고. 상술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는 텔레비전도 귀하고 만화책도 귀할 때잖아. 신간 만화를 잘 구비해 놓으면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통학열차 시간까지 남은 시간에 만화책이나 텔레비전 보고 싶어서 우리 가게를 많이 찾았지."   


열다섯 살부터 60년 넘게 이발 가위와 빗을 잡으며 돈도 적잖게 벌었다. 3 남매를 두었지만, 돈이 없어 가르치지 못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입학금을 마련해 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이종완씨는 말한다. "이발이 내 적성에 맞았던 것 같다"고.


대전 소제동에 있는 대창이용원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는 이발도구들

대전 소제동에 있는 대창이용원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는 이발도구들


이날 40년 단골이 동구 가양동에서 이곳까지 어김없이 찾아왔다. 유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저 멀리 신탄진에서까지 단골손님이 찾아온다. 이종완씨가 은퇴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나에게 머리를 깎겠다고 그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오는데 내가 어떻게 그만둘 수가 있겠어."


온수통에 수건을 담가 꼭 짜서, 머리카락을 덮어 물기를 먹인 후 이발을 시작한다. 전기 이발기로 머리 끝을 다듬은 후 본격적으로 가위질을 시작한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른다. 손 면도기로 주변 잔털을 제거하고 나서야 이발이 끝난다. 헤어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털어낸 후 금세 옷을 갈아입고 염색약을 개어 온다. 염색을 다 했는가 싶었는데 이발의자를 뒤로 완전히 젖힌 후 안면에 따뜻한 수건을 덮어 놓고, 면도 거품을 준비한다. 연탄난로 연통에 면도거품 솔을 문질러 대더니 면도할 부위에 잘 펴서 바른다. 면도를 하는 손길이 세심하면서 거침없다. 


이발 하는 모습


면도까지 마치고 나서야 40년 단골은 이발의자에서 내려와 세면대로 향한다. 이종완씨는 물조리개에 따뜻한 물을 담아 머리에 적당히 부으며 머리 감기기를 시작한다. 이발 기술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웠던 머리 감기기가 이발 과정에서는 제일 끝이다. 40년 단골이 세수를 하는 동안 새 수건 한 장을 꺼내 연탄난로 연통에 감싸 덥힌다. 따뜻하게 덥힌 수건이 40년 단골에게 건네진다. 한 시간 남짓 걸린 이 모든 과정 중에 둘 사이에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대화는 한마디도 없었다.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40년 단골은 옷을 챙겨 입고 이종완씨가 건넨 요구르트를 마셨다. 이발을 끝마친 손님에게 이종완씨는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 건네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낡은 타이어 세 개와 유리 한 장을 이용해 만든 테이블에 펼쳐 놓은 신문지 위에는 빨대가 꽂힌 빈 요구르트병 열네 개가 흐트러뜨린 피라미드 모양으로 서 있다. 지금도 하루에 열 명에서 열다섯 명씩은 꾸준히 대창이용원을 찾는다. 이제 테이블 위에 빈 요구르트병은 열다섯 개다.

 

빨대 꽂아진 빈 요구르트 병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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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원

월간 <토마토> 편집장.
* 월간 <토마토>는 많은 문화가 서울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시대에 대전의 공간에 모이는 사람을 기록하며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담는다. www.tomato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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