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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 최재천 교수

인문은 질문이다

2016-11-10


  •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

계속되는 인문학 열풍 속에서 알면 알수록, 파면 팔수록 오히려 갈증을 느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인문이란 무엇인가?’
이 우문에 현답을 들려주실 두 번째 손님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최재천 교수를 모셨습니다.

Q. 인문이란 무엇일까요?

A. “바로 질문, 그리고 묻는 행위”

아주 단순하게 ‘인문이란 질문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동물 행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이 인간과 동물을 비교하는 건데요, 우리 인간과 99%가량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침팬지 사회에는 인문학이 없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 중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살고 있을까?’ ‘우주는 무엇일까?’ 같은 질문을 제기하는 동물은 없어요. 없다는 건 완벽한 답이 될 수 없지만, 이토록 조직화된 인문 활동을 하는 동물은 인간뿐입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가진 독특함인 거죠.

“우리는 질문하는 동물”

영장류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인간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침팬지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데, 저는 오랑우탄을 연구하자고 제 팀에 주문했어요. 그런데 서울대공원에 가서 오랑우탄을 연구하겠다고 하니까 사육사들이 왜 침팬지가 아닌 오랑우탄을 연구하려고 하느냐는 반응을 보였어요. 공교롭게도 며칠 뒤에 사고가 났어요. 오랑우탄이 화재를 일으켰어요. 다행히 큰불은 아니었는데 방 안에 불이 났어요. 오랑우탄이 머무는 실내 공간에 난방용 열선을 벽에 설치해놓고, 혹시 손을 넣으면 위험하니까 철망으로 가렸는데 오랑우탄 한 마리가 지푸라기를 망 사이에 집어넣어서 불을 피운 거예요. 사람들이 하는 걸 보고 기억했다가 따라 한 거죠. 소식을 듣고 제가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화답을 했죠. “오랑우탄이 머리가 나쁘다고요?”(웃음) 그 오랑우탄은 불을 붙였다가 훅 불어서 끄고, 다시 붙였다가 끄는, 그런 행동까지 해요. 제가 오랑우탄에 주목하는 것은 오랑우탄이 지능적일 뿐 아니라 인지에 관한 새로운 시선과 질문을 던져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랑우탄을 연구해서 언젠가 책을 낼 생각인데 제목까지 생각해놨습니다. ‘Different Kind of Cognition’, 즉 ‘다른 형태의 인지’입니다. 인간의 지능이 높아진 것은 도구를 만드느라, 언어를 사용하느라 그렇다고 여겨졌는데, 최근 가장 유력한 학설은 인간관계, 사회관계 때문이라고 합니다. ‘쟤랑 손을 잡아야 하나?’ ‘쟤한테 맞으면 어떡하나?’ 같은 걸 고민하는, 즉 사회인지에 초점을 맞춘 연구들이 이뤄졌어요. 그런데 파스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방에 혼자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다.” 홀로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그렇다는 건데, 요즘 굉장히 절실하게 다가오는 말이잖아요. 잠시라도 우리는 혼자 있질 못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휴대폰을 붙들고 있고. 제가 보기에 혼자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건 심각한 문제일 수 있어요. 그런데 오랑우탄은 혼자 지내는 영장류입니다. 침팬지나 고릴라는 떼로 모여 살고, 항상 서로의 눈치를 봐요. 머리가 좋아지기는 했는데 두뇌의 절대량을 거기에 쓰는 거죠. 우리도 따지고 보면 그렇습니다. 꼼수 부리고, 어떻게 하면 속일까를 고민하죠. 그런데 오랑우탄은 혼자 지내는 동물입니다. 침팬지나 인간과는 달리 진화했을 겁니다. 한편 인간도 지금이 이렇지, 예전에는 혼자 지낼 수 있었을 것 같거든요. 파스칼의 말로 다시 돌아가면 “예전에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지금은 왜 그렇지 못할까”라는 질문을 내포한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랑우탄의 인지를 연구하면 흥미로운 게 많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문학이라는 건 이런 걸 생각하고 묻는 행위가 아닐까요. 우리는 그냥 살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삽니다. 참 골치 아픈 동물이죠.(웃음)

Q. 인문학 열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우려되는 풍요 속 빈곤 현상”

저는 과학자지만 예전부터 인문학에 대해서 좀 많이 떠든 편이고, 게다가 한 십몇 년 전에는 인문학이 위기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인문학이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냐’라고 했다가 좀 혼나기도 하고 그랬죠.(웃음)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인문학은 위기의 학문이지, 인문학이 풍요의 학문이 되면 그게 인문학다울 수 있을까요? 그럼 과학은 돈 잔치하고 인문학은 손가락 빨아야 한다는 거냐, 물론 그건 아니죠. 다만 인문학 열풍으로 벌어지는 흐름은 그렇게 건강한 것만 같지는 않습니다. ‘기업인문학’이라는 말까지 나온 상황이더군요.
최근 인문학 진흥법이 통과됐는데 과학계가 겪은 전철을 밟을까 우려됩니다. 과학에도 과학 진흥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 진흥법이 생긴 후 무슨 일이 벌어졌나 하면 돈은 전보다 많아졌는데 정말 필요한 데 쓰이지 못하고 쏠리는 현상이 생겼어요. ‘과학기술’이라는 말이 정착되었잖아요. 그런데 서양에는 ‘과학기술’이라는 말이 없거든요. 영어로 굳이 번역하면 ‘Scientific Technology’라고 하는데 영어권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해요. ‘Scientific Technology’는 중언부언입니다. 어차피 기술, technology는 과학, science에 기반을 두고 하는 거잖아요. 원래는 ‘과학과 기술’이었거든요. 그런데 점차 ‘과학·기술’이 되었다가 점도 빠지고 ‘과학기술’이 되었어요. 여기서 방점은 기술에 찍히고 과학은 형용사로 전락했어요. 자연과학이 기술의 시녀가 된 거죠.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과학 진흥법 덕에 연구비는 늘었는데 그 돈의 90% 이상을 응용과학에 쏟아붓고 있는 거죠. 그리고 매해 이맘때쯤 되면 왜 우리나라는 노벨과학상을 못 받느냐고 묻죠. 이런 쏠림 현상이 과학 진흥법이 통과된 후 더 심해졌습니다. 풍요 속 빈곤이 생기는 거예요. 저는 15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 과학기술 쪽 R&D 예산의 절반을 기초과학에 써야 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5%도 안 쓰던 시절이니까 전혀 먹히지 않았죠. 최근에는 50%를 내걸고 과학자들이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혹시 인문학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이른바 응용인문학만 득세하고 기초인문학은 쇠퇴할까 걱정이 됩니다.
인문학자가 아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혼날 수 있지만 동조하시는 많은 인문학자가 계실 거로 생각해요. 인문학자로서 이야기하면 자기비판이 되니까 좋은데 바깥에서 이야기하면 달갑지 않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으시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저는 근본적으로 과학도 인문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거든요. 가끔 제가 ‘인문학자도 아닌데 저를 왜 찾아오셨습니까?’ ‘인문학 특강에 다니면서 제가 정체성 혼란에 빠졌습니다’라고 하면서 너스레를 떨지만, 마음 깊숙이 저는 자신을 인문학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과학자도 인문학자라고.

Q. 오랫동안 ‘통섭’이라는 화두를 던져오셨는데요,
‘과학도 인문학’이라는 말씀에 대해 부연해주시겠어요?

A. “과학과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학문”

인문학을 질문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한다면 과학과 공학을 놓고 봤을 때 과학은 질문을 하고 공학은 해답을 찾는 학문입니다. 물론 과학도 해답을 찾는 것처럼 보이긴 하죠. 왜 사과가 떨어졌을까 질문을 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으니까 해답을 찾은 셈이죠. 하지만 그건 결과물로 가끔 벌어지는 일들이고요. 과학의 기본은 자연에 관해서 계속 묻는 겁니다. 인문학도 인간에 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잖아요. 과학은 우주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인문학은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근원적으로 같은 거죠. 한 테두리에 놓고 본다면 인간에 대한 질문을 인문학이 하고 나머지 질문을 과학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리과대학이라는 게 있던 거예요.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의 많은 학교는 문리과대학 체제, 즉 ‘School of Arts and Sciences’를 갖고 있어요. 서울대가 관악산으로 이전하면서 이 체제가 깨졌습니다. 동숭동에 있을 시절에는 생물학과 학생인 제가 철학, 역사학 수업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신청해서 들을 수 있었어요. 같은 대학이니까요.

“학문 간의 융합”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동숭동 시절, 이른바 미라보 다리에서 제가 너무 좋아하는 선배 형을 만났는데, 그 형이랑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고 이야기도 듣고 싶고 그래서 제가 수업까지 쫓아 들어갔는데, 그게 철학 수업이었어요. 중간에 나갈 수도 없어서 앉아 있었는데, 들어보니까 좋더라고요. 그래서 수강신청을 했어요. 결국 저는 인문대 수업을 더 많이 들었어요. 생물학과 사무실에서 저를 다른 과 학생으로 오해할 정도로.(웃음) 거기서 조금씩 주워들은 것 때문에 제가 생물학을 하지만 생물철학 같은 걸 하는 사람이 된 거죠. 남의 과를 열심히 돌아다닌 덕에 지금 넘나드는 이야기를 하고 사는 사람이 됐겠죠. 당시에는 그런 게 가능했는데 지금은 어려워진 것 같아요. 물론 학생에게 의지가 있다면 다른 학과 수업을 찾아 들을 수 있겠지만, 가까운 곳에 펼쳐져 있는 것과 다르죠. 그게 많이 안타깝습니다.
서양의 대학들은 상황이 나은 편입니다. 교수의 경우에도 의대, 경영대 같은 직업 전문대학원에 소속된 이들을 제외하고는 앞서 언급한 문리과대학, School of Arts and Sciences의 ‘문리과대학 교수인단’의 소속으로 분류됩니다. 예컨대 저는 생물학과라는 구분에 들어 있지만, 그 전에 모든 대학을 포괄하는 ‘문리과대학 교수인단’에 속하기 때문에 경영대학에서도 강의할 수 있는 거죠. 미국에 있을 때, 어느 날 경영학과 교수가 찾아와서 수업을 같이하자고 제안했어요. 그래서 화요일에 제가 침팬지 사회의 경영, 개미 사회의 경영에 관해 강의하면, 목요일에 그가 제 강의에 경영학 이론을 끌어와서 강의하는 거죠. 저도 목요일에 가서 수업을 들어봤는데 아마 그 학기에 제가 제일 많이 배웠을 거예요.(웃음) 학교는 이런 시도를 행정적으로 뒷받침해줬죠. 그런데 우리는 학과장 체제로 되어 있어서 교수들이 이런 시도를 하는 게 쉽지 않아요.

Q. 분야 간의 융합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교육 안에서 또는 제도권 안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요?

A. “학문 간 건너뛰기”

서울대에 있을 때 다른 교수 한 분이랑 대학원의 학과 구분을 없애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대학원에 학생이 들어오면 그 학생의 질문에 따라서 필요한 교수들을 붙여주자고 했습니다. 예컨대 학생이 ‘인간 사회는 왜 이럴까?’ 같은 빅히스토리적 주제를 연구하겠다고 하면, 사회학과뿐 아니라 필요하면 공대에서, 음대에서 교수들을 데리고 와서 그 학생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해주는 거죠. 그렇게 해야 학문이 발달합니다. 한국에서 유발 하라리, 재레드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들이 많이 안 나오는 건 체제에 묶여서겠죠. 제가 스티브 잡스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그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강연에서 많이 했어요. 스마트폰은 듣도 보도 못한 발명품이 아니거든요.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를 뽑아서 작게 만들고, 컴퓨터의 기능을 집어넣은 거죠. 이건 융합의 산물이지 발명의 산물이 아니에요. 여러 가지를 비빈 거죠. 그런데 비빔밥의 민족인 우리가 이걸 했어야지, 왜 스티브 잡스가 이런 걸 하게 뒀냐,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나오기 힘들어요. 일찍이 문과와 이과를 나누고, 그 사이는 그랜드캐니언만큼 거대하게 벌어져서 사람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뛰지 못하죠. 대학 4년 내내 전공 공부만 하도록 하니까 넘나들기가 어려워요. 그런 걸 좀 자유롭게 열어줘서 하는데요. 잘하는 사람은 좀 내버려두고, 좀 모자란 사람은 다듬어주고. 그렇게 하면 대한민국의 스티브 잡스가 굉장히 많을 텐데…. 그런데 전 국민을 똑같이 가르치잖아요. 그래야 평가가 가능하니까.

Q. 대학 밖에서는 인문학에 대한 수요가 많은데,
대학 안에서의 인문학은 위기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질문하는 인문학자를 위한 최소한의 보장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가 이만큼 정체성을 유지하고 여기까지 온 데는 선비들의 공이 컸을 거로 생각합니다. 죽어라 글 읽고 초야에 묻혀서 비판하는 그런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 덕에 나라가 완전히 좌초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인문학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래서 그런 분들이 고사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현재 인문학자들은 굶고 있어요. 앞서 인문 진흥법을 언급한 게 갈수록 돈이 한쪽으로 쏠리고 이런 현상을 가속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사회가 제도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풍요로워졌는데 오히려 옛날하고 비교하면 지금은 그럭저럭도 못 사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우리가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핀란드 같은 나라는 국가가 지식인들을 일정 부분 보조를 해요. 핀란드에 있는 동료 얘긴데, 그 친구는 교수를 그만뒀어요. 교수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골치 아픈 게 너무 많다는 거예요. 자진해서 교수를 그만두고 강사를 해요. 그런데 교수와 강사의 월급이 그렇게 많이 차이 나지 않아요. 유지가 되는 거죠. 한국에서는 유지가 안 되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가 너무 커졌어요. 그 격차를 줄이고 되돌리는 게 중요하지, 인문학에 돈을 쏟아붓는 게 중요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대기업들이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 듯한 인문학자, 신문에 글도 쓰는 그런 인문학자들에게 큰돈을 주고 모셔가는 게 인문학을 망가뜨린다는 글을 쓰신 분이 있었어요. 조금 지나치다 싶으면서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중 몇은 전보다 풍요로워지겠지만, 전반적으로는 남는 게 별로 없고, 질문하는 인문학자라면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가장 힘 있는 인문학자들이 혜택을 받고 나면 그걸 못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겠죠. 그분들이 꼬장꼬장한 딸깍발이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보장, 뒷받침이 아쉽습니다.

Q. 어느 분야든 지나친 양극화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동물 사회에도 이런 현상이 벌어지나요?

A. “동물사회에 완벽한 독점은 없어요”

동물사회에도 그런 게 있죠. 하지만 완벽한 독점은 거의 없어요. 예를 들어 수사슴 한 마리가 암컷 여럿을 거느리는데 최고의 권력을 쥔 수컷들도 일종의 화해정책을 펴요. 나눠줍니다. 그리고 그 수사슴은 암컷들을 건사하느라고 계절 내내 먹지도 못해요. 변방에 있는 수컷들이 넘실거리니까 항상 고되죠. 그러다 보니 수명이 짧아지고 오래 못 사니까 다음 친구로 교체가 됩니다. 그게 자연의 섭리인 거죠. 그런데 만약 변방의 수컷들이 조직화하면 우두머리를 몰아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사슴의 지능으로는 조직화를 잘 못 해요. 쳐들어와서 잠시 혼란을 일으키는 정도는 합니다. 영장류 수준이 되면 모함을 합니다. 침팬지는 작당을 합니다. 서열 2위와 3위가 오랜 기간 모사를 하고 1위에 덤벼들어서 치명적인 피해를 주면 낙마하는 거죠. 그럼 또 낙마한 친구가 3위랑 모사를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완전한 독점은 없습니다. 시스템이 유지가 되는 건 한 마리 수사슴이 그 동네에 있는 암사슴 100마리를 다 가지지 않고, 그보다 못한 수사슴이 일부를 갖는 분배가 이뤄지기 때문이죠. 그런데 인간사회는 다른 동물사회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편중되어 있죠. 분배가 잘 안 됩니다. 자본주의의 위기 얘기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로 부의 편중이 지나치잖아요. 동물 사회에서 이렇게까지 완벽한 독점은 없습니다. 그러다가는 고꾸라지니까 미리 어느 정도 나눠주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걸 잘 못 해요. 개미도 좀 못하는 편입니다. 고도의 조직화되고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는 동물들 사회에서 잘 안 되는 경향이 있어요. 한쪽으로 쏠려서 사회가 붕괴하는 일들이 벌어져요. 인간이 그런 면에서는 아주 대표적이죠. 좀 나눠야 하는데 그걸 잘 못 해요.

Q. 나라에서 인문을 진흥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A. “화초만이 아닌 잡초를”

진흥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건 좋지만 몰아주기식 기획은 지양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기초과학과 인문분야가 그렇습니다. 연구를 기획하고 큰 연구비를 몰아주면 거기에 뛰어든 사람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힘들어져요. 조금씩 여러 사람이 장기간 연구비를 받을 수 있게끔, 사심 없이 그리고 자유롭게 연구하고 책을 쓰는 그런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요.
한 특강의 강연자로 가서 농담을 던졌습니다. 미국에서 지금 ‘미미과학’이라는 게 뜨고 있다고 그랬더니 사람들이 받아 적더라고요. 물론 ‘미미과학’이란 건 없습니다.(웃음) 한때 나노 과학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서 뜨는 게 있다고 그러면 아마 기관에서 큰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시작하겠죠. 나노가 뜬다고 하니 연구비를 몰아주고, 나노보다 작은 단위의 양자를 연구하던 과학자들도, 큰 단위를 연구하던 물리화학자들도 하루아침에 나노 과학자가 되는 촌극이 벌어집니다. 알파고가 이슈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작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중국의 과학자는 개똥쑥이라는 식물을 연구했어요. 수십 년을 연구해서 말라리아 퇴치 물질을 개발했어요. 중국은 그 과학자에게 수십 년 연구비를 지원했어요. 그런 게 노벨상입니다. 노벨상 발표 시기만 되면 하도 묻는 사람들이 많아서 글을 쓴 적이 있어요. 노벨상은 지금 잘 나가는 분야의 잘하고 있는 연구자에게 주는 상이 아니다, 그 연구 가문의 효시에 주는 거지 그 가문의 잘 나가는 후손에게 주는 게 아니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인 오스미 요시노리의 동료에게 들은 이야긴데, 그의 동료들은 다 도쿄대학으로 갔는데 그분만 연구실에 남아서 세포 내 노폐물 처리하는 메커니즘을 연구했어요. 평생 하더니 노벨상을 받은 거죠.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하고 있다가 그 분야가 마침내 주목을 받으면 시작한 사람에게 상이 돌아가는 거죠. 아무도 안 하는 것, 실패할지도 모르는 것, 그런데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연구자를 지원해야 해요. ‘그런 연구 왜 해요?’라고 할 만한 연구가 여기저기서 벌어지다가 그중에 꽃을 피우는 게 생기고, 그 힘으로 사회가 넘어지지 않고 유지가 됩니다. 그게 학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학문은 잡초입니다. ‘인문학은 개똥쑥이다’가 제 결론입니다. 화초만 키우려고 하지 말고 잡초를 다 키워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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