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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에서 연극을 보다

삼청동 코리아사우나와 연극 <이태리 블루스>

이중일

2020-01-31

코리아 사우나 굴뚝

▲ 삼청동, 북촌의 랜드마크 구실을 하는 코리아 사우나 굴뚝 ⓒ이중일


삼청동, 혹은 북촌을 거닐어본 사람은 기억할지 모른다. 붉은 벽돌로 높게 솟아오른 굴뚝과 레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서체의 ‘코리아’라는 글자를. 외국인도 너나 할 것 없이 한복을 갖춰 입고 다니는 동네여서 그런가? ‘코리아’라는 글자가 생경하면서도, 또 생각해보면 그만큼 잘 어울리는 이름도 없을 것 같다.



일흔 살이 넘은 목욕탕, 그 다채로운 변천사 



코리아 사우나 건물 외부

▲ 코리아 사우나 건물 외부 모습.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이중일


삼청동 ‘코리아사우나’는 1948년에 시작하여 오랜 시간 인근 주민들의 사랑방 노릇을 했다. 코리아사우나 건물이 자리한 화동길은 온갖 꽃이 피어나는 향기 진한 꽃길이었다. 앞마당 아래로 흐르는 복정 우물은 맑고 맛이 좋아 그 옛적엔 궁중에서만 썼다. 자물쇠를 채우고 경비병을 세워 지켰으며, 궁에서 나온 무수리들이 길어 임금에게 바쳤다는 귀한 물이었다. 이는 인왕산과 북한산에서 흘러 청계천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만들어낸 우물터다. 물길을 따라 옛 아낙들이 모여들던 빨래터도 바로 곁에 있었다. 꽃과 물이 어우러진 곳이니 당연히 끊임없이 사람이 모이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샘솟았을 터이다. 


복정우물과 연극 포스터

▲ 복정 우물을 배경으로 서 있는 공연 입간판 ⓒ이중일

 

코리아사우나는 원래 ‘삼화탕’이었다. 속해 있는 삼청동의 ‘삼’, 화동의 ‘화’가 이름이 된 것. 지금 굴뚝에 쓰여 있는 ‘코리아’를 유심히 보면 그 아래 ‘삼화탕’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삼화탕 시절이었을 당시 이곳 4층 건물은 여관이었다. 1층은 목욕탕, 2층과 3층은 삼화장으로 사용되었다. 청와대가 가까워 출입기자들이 즐겨 찾는 유용한 숙소이기도 했다.


목욕탕이 호황을 누렸던 196~70년대에는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후 한동안 이곳은 단식원으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고, 지금은 북촌을 찾은 외국인과 단체 학생들의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목욕탕 공간은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해 각종 전시와 공연,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태리블루스> 배경이 된 목욕탕 내부

▲ <이태리블루스> 무대이자 객석인 목욕탕 내부 ⓒ이중일

 

지난 1월 17일부터 23일까지 공연된 연극 <이태리 블루스>는 코리아사우나의 여탕을 무대로 그대로 활용했다. 작은 목욕탕 안에서, 목욕탕 의자에 쭈그려 앉아 배우의 숨결과 타일벽에 부딪혀 울리는 배우들의 대사를 듣는 기묘한 경험. 흥미로운 연극 속 이야기가 더욱 빛날 수 있던 이유는 바로 그 장소의 힘이었다. 


 

세계의 벼랑 끝에서 존재 너머를 전망한다 

연극 <이태리 블루스> 리뷰



연극표, 입욕권의 형태를 했다

▲ 입욕권의 형태를 한 연극 티켓 ⓒ이중일


이 연극은 목욕탕 외부와 통하는 조그만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옳다. 문을 열면 곧장 마주하게 되는 매표소에서는 티켓 대신 입욕권을 나눠주고 있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실상 이것은 연극 티켓도 입욕권도 아닌, 작가(이자 출연자 허유미 분)가 공들여 구축한 어떤 세계로의 초대권이다. 초대권을 손에 쥔 관객들은 탈의실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와 평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곧 경험할 모종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순히 연극 한 편을 관람하기 위해 찾은 이가 있는가하면 목욕탕을 통째 무대로 사용한 독특한 착상에 감탄하며 분명 어떤 특별한(어쩌면 난감한) 세계가 펼쳐질 것임을 직감하는 이도 있다. 그 면면에 서린 흥분과 기대는 이제 막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의 얼굴에서 우리가 흔히 보던 것과 같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들이 머물러 있는 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낡은 세계다. 탈의실에 비치된 대부분의 물건들은 어림잡아도 30년을 훌쩍 넘긴 것들. 언제 마지막으로 경험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때 그 시절’의 질감을 지닌 ‘세트’들이 탈의실 공간에 가득하다. 반질반질 윤을 내며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는 평상, 잠금장치가 고장난 채 여닫을 때마다 요란하게 삐걱이는 락커, 오래전 기능을 상실한 것이 분명한 체중계까지, 이 모든 것이 이어질 연극 <이태리 블루스>에 빠짐없이 필요한 무대 장치다. 그렇게 본다면 이 고색창연한 탈의실은 어쩌면 조금 전까지 우리가 머물렀던 현실 세계와 곧이어 진입하게 될 작가 허유미가 창조한 세계를 연결하는 승강장이자 정체불명의 세계와 맞닿은 경계면일 수도 있겠다. 


오후 7시 30분 목욕탕 내부로 입장이 시작된다. 당연하게도 ‘객석’은 따로 없다. 탕 입구 맞은편 바닥에 목욕탕 의자를 여럿 놓아두었는데 그것이 바로 객석이다. 모자란 자리는 샤워기를 거치한 무릎 높이의 대리석 단이 대신했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두 세신사 이야기인 바, ‘객석’에 앉아 가만히 연극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자니, 훌훌 옷이라도 벗어 묵은 때를 밀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무대와 객석 공간의 구분이 없는, 목욕탕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그대로 살린 작품이다. 때문에 연극 <이태리 블루스>는 무대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한가로이 앉아 감상하는 보통의 연극이 아니다. 관객인 나는 묵은 때를 벗기러 온 목욕탕 손님인 동시에, 이 연극의 어엿한 출연자인 것이다. 


키큰 세신사, 배우 허유미

▲ '키 큰 세신사', 배우이자 연출가 허유미  ⓒ이태리블루스


‘키 큰 세신사’(허유미 분)가 ‘습식 사우나’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공연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는 지치고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열탕으로 들어가 몸을 누인다. 열탕이 뿜어내는 끈적한 습기가 탕 밖으로 반쯤 드러난 그의 상반신을 불길하게 휘감는데, 이때 습기와 너머에 어른거리는 그의 마뜩잖은 표정이 절묘하게 교차한다. 그의 표정에는 자신을 붙박아 두고 있는 이 세계의 어떤 ‘질서’에 대한 확고한 의문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목욕탕이라는 ‘세계’를 온몸으로 의심한다. 그의 모든 동작에서 내내 느낄 수 있었던,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에너지마저도 이 ‘세계’에 대한 의심과 저항의 일부다. 정리하자면 그는 세계의 질서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자다.


이어 손님(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의 콜을 받은 ‘키 작은 세신사’(이혜림 분)가 등장한다. 키 큰 세신사와는 달리,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서는 세계에 대한 무겁고 오래된 체념이 느껴진다. 손님의 몸을 최대한 공들여 닦는 행위에서 얼핏 구도자의 면모도 엿보이는데, 극중 그는 과거 ‘봉화산 음문사’(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절이니 검색하지 마시길)라는 한 사찰에서 비구니 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키 작은 세신사에게서는 키 큰 이가 지닌 종류의 어떤 에너지도, 따라서 세계에 대한 일말의 의문과 저항의 의지도 느낄 수 없다. 그저 살아가는 행위는 죽기 전까지 매일 반복될 덧없는 몸짓일 뿐이라는 것처럼, 마치 목욕탕에 몇 시간째 머문 사람의 그것처럼, 그의 에너지 약한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체념에 가깝다. 정리하자면 그는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고 있는 자다.


'키 작은 세신사' 배우 이혜림

▲ '키 작은 세신사' 배우 이혜림 ⓒ이태리블루스


키 큰 세신사와 키 작은 세신사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목욕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분,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다. 기왕에 별로 친해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는 키 큰 세신사가 모처럼 말을 걸면 키 작은 세신사는 듣는 둥 마는 둥 반응하며 시종 이어진다. 키 큰 세신사는 손님의 몸을 닦으며 밀어도 밀어도 어느새 재생되고 마는 인간의 ‘때’에 자신의 운명과 처지를 투사하며 끝없는 불만을 표출한다. 반복적으로 생성되는 지긋지긋한 인간의 때처럼 어떤 질서에 결박된, 이 자유가 박탈된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운명을 거부하고자 한다. 그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녔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반면 키 작은 세신사는 인간의 자유의지 따위는 본래 없으며, 이 목욕탕 안의 질서, 다시 말해 이 의심스러운 세계의 결론은 죽어서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며 일견 손쉽게 체념하는 듯 보인다.


선문답 같은 대화가 둘 사이 내내 이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키 큰 세신사의 다른 세계를 향한 갈망은 임계점에 이른다. 마치 수인처럼(다른 이의 때를 미는 두 사람의 몸짓에는 인간의 원죄가 느껴진다) 다른 이의 때를 미는 행위를 멈추고(결박을 풀고), 자신에게 내려앉은 더께와 껍데기를 광인처럼 벗겨내어 마침내 운명을 거스르고자 한다. 바야흐로 다른 세계로의 도약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편과 저편의 세계 사이에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심연이 놓여있다. 인간이라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다른 세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이 심연을 과감히 건너뛰어야 한다. 세계 저편에서 어른거리는 불빛은 얼핏 키 큰 세신사가 갈망하던 세계에서 보내오는 부드러운 손짓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키 작은 세신사가 예지했던 죽음 이후의 세계 같아 불길해 보인다. 이 이율배반의 세계는 다름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이면 또는 그것의 부조리한 속살이 아닐까.


두 세신사의 서로 다른 세계관


두 세신사의 서로 다른 세계관

▲ 두 세신사의 서로 다른 세계관이 충돌한다. ⓒ이태리블루스


키 큰 세신사는 다른 세계의 입구(라고 그가 믿는 곳)에서 막상 주저한다. 그의 ‘자유의지’의 바탕이 된 호기로움은 다른 세계의 입구 앞에서 하릴없이 사그라든다. 진정으로 인간 내면에 자유의지는 존재하는 것일까, 작가는 여기서 묻는다. 자신의 자유의지에 대한 키 큰 세신사의 인간적인 의심은, 그리하여 끝내 자유의지를 달성하지 못할 운명을 지닌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인 그를 극심한 심리적 곤경에 빠트린다. 종내 완전히 미쳐버린 그는 예의 그 ‘이태리 타올’로 그 인간적 무언가를 벗겨내기 위해 있는 힘껏 몸부림치다 그만 실신하고 만다. 키 큰 세신사의 세계-도약에 대한 의지를 두 눈으로 낱낱이 목격했던 키 작은 세신사는 그제야 실신한 그를 대신해 다른 세계를 욕망하기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관객들은 공연이 끝난 후 키 작은 세신사가 통과했던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으로 퇴장하게 된다. 이 문 밖 세계에 대한 해석은 자연스레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세신은 예로부터 새로운 시간을 앞두고 치르는 일종의 의식이다. 사람들은 묵은 때를 벗고 전과 다른 마음가짐으로 너머의 세계를 전망한다. 어쨌든 세계는 우리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것이 이제껏 우리가 머물렀던 세계와 얼마나 같고 다른가에 관해서는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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