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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인간 대 참새

중국의 제사해 운동

박문국

2018-01-11

전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도시 노동자와 혁명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가 아닌 농민 중심의 혁명으로 진행되었다. 이른바 ‘마오주의’로 일컬어지는 중국의 사회주의 모델은 이러한 배경에 따라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달리 농촌을 혁명근거지로 삼아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업 발전을 아예 등한시할 수도 없었기에 마오쩌둥은 농업과 공업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정책을 시도하는데, 바로 ‘대약진 운동’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약진 운동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폭압적인 농업 집단화와 농민들에게 강제로 철을 생산케 하는 토법고로(강철을 만들기 위해 만든 작은 용광로. 수저와 농기구 등 가진 금속을 모두 녹였지만 전문기술의 부재로 강철이 아닌 고철만 나오면서 농민 다수가 굶어 죽었다. _편집자 주)였으나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몇 가지 더 있었다. 그중 하나가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진 참새 박멸 운동, 이른바 제사해 운동이다.

 
  • 제사해 운동 포스터제사해 운동 포스터

저 새는 해로운 새다
1955년 쓰촨성의 한 농촌을 시찰하던 마오쩌둥은 벼 이삭을 쪼아먹던 참새를 발견한다. 인민을 먹일 소중한 쌀을 약탈하는 참새의 모습에 분노한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참새는 해로운 새다!” 중국 최고지도자의 교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불과 며칠 후에 「전국농업발전강요」라는 총 40항의 정강이 포고되는데 이 중 27번째 항이 제사해(除四害)였다. 네 가지 해로운 것, 즉 모기, 파리, 쥐, 그리고 참새를 제거한다는 뜻이다. 중국사회과학원은 이들의 위험성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참새의 위험성이 주목받았다. 실제로 참새가 쪼아먹는 곡식이 상당한 수준이었기도 했고 무엇보다 마오쩌둥이 직접 지칭한 해악이었기 때문이다. 대약진 운동이 한창이던 1958년, 본격적인 제사해 운동이 시작된다. 중국인들이 참새를 잡는 방법은 다른 나라에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기상천외한 것이었는데 바로 중국의 막대한 인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우선 사람들이 논이며 도시 곳곳에 머무르는 참새들을 쫓아낸다. 그 후 날아다니는 참새가 탈진해 떨어질 때까지 쫓아다니며 북이나 세숫대야를 시끄럽게 쳐댄다. 소련의 고문 미하일 클로치코는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길거리에서 북소리가 들려오자 또다시 거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 대며 대나무 장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런 광경은 족히 몇 분간 지속되었으며, 북소리가 그치면서 조용해졌다. 나는 그제야 호텔 옥상에서도 흰옷을 입은 여인들이 건물에 참새가 내려앉지 못하도록 침대보와 수건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중략) 마치 전투를 하고 있는 듯한 장면은 정오까지 계속 이어졌고 벨 보이, 매니저, 통역관, 청소부 등 호텔의 전 직원이 동원되었다.”

 
  • 잡은 참새를 수레에 실어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 북을 치고 깃발을 흔들며 참새를 쫓는 모습잡은 참새를 수레에 실어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 북을 치고 깃발을 흔들며 참새를 쫓는 모습

전쟁의 결과
이러한 참새와의 전쟁은 우스워 보일 수도 있으나 효과는 의외로 굉장했다. 제사해 운동 첫날에만 베이징의 300만 시민이 동원되어 약 8만 마리의 참새가 포획되었다. 사흘 뒤에는 베이징 참새의 씨가 말라버릴 지경이었으며, 1년 뒤에는 전국에서 약 2억 마리의 참새가 사라졌다. 중국 내 참새가 거의 멸종된 것이다. 1년간의 성과에 마오쩌둥은 만족했고,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풍년이 올 것을 기대하며 1959년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참새가 사라지자 먹이사슬이 무너져 병충해가 급증하였고 이로 인해 이전보다 더 심각한 흉년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참새를 대신해 하늘을 뒤덮은 메뚜기 떼의 습격이 치명적이었다. 참새와 가장 격렬한 전투를 벌인 난징의 경우 메뚜기 떼에 의해 논밭의 60%가 충해를 입을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살충제까지 품귀현상을 빚으면서 피해는 해가 지날수록 늘어만 갔다.
사라진 건 참새만이 아니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불순분자로 몰리는 탓에 사람들은 꿩, 닭, 오리 등 날개 달린 것은 닥치는 대로 학살했고, 참새를 잡겠다고 뿌려놓은 덫에 늑대, 개, 토끼 등도 걸려들어 생태계의 붕괴는 가속화되었다. 생태계의 파괴는 곧 자연재해로 이어졌고, 대약진 운동의 과정 중 무차별로 파괴된 산과 숲은 홍수의 피해를 키웠다. 중국의 시민운동가 류샤오보가 지적했듯 이 시기의 자연재해는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였다.
결국 중국은 3년간 약 4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기록적인 대기근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본인의 권력유지를 위해 실패를 부정하던 마오쩌둥은 다른 수뇌부의 반발을 무시하고 참새 사냥을 밀어붙이며 피해를 더욱 키웠다. 결국 소련에서 20만 마리의 참새를 은밀히 공수하고 제사해 목록에서 참새를 빈대로 슬그머니 교체한 뒤에야 참새와의 전쟁은 끝이 난다. 마오쩌둥이 원했던 대로 참새는 거의 사라졌으나 그 대가는 막심했다.

마오쩌둥은 자연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사실 자연에 맞선다는 것부터가 자가당착이다. 인간 또한 생태계 일부분을 차지할 뿐이기에 그 미묘한 균형을 인위적으로 통제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된다. 중국은 전문가의 견해가 아닌 지도자의 즉흥적인 지시로 전쟁을 치렀고 수천만 인민의 생명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한번 파괴된 생태계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고 중국은 훗날 덩샤오핑 집권기까지 그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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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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