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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문文紋 : 이야기의 일, 일의 이야기 - 정세랑, 『피프티 피플』

서효인

2017-03-21

『피프티 피플』의 인물은 일과 일상을 함께 안고 사는 존재들이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일을 하고, 또 그것을 잘하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다.

동시에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벌어야 하고 그것을 지겨워하는 인물들이다. 

 

 

 

제대로 된 이야기라면 주인공의 ‘일’에 대해서 어물쩍 넘어가는 법이 없다. 예를 들어 대기업 실장님인데 일하는 장면은 전혀 없이 사랑만 찾는다든지, 대학병원 인턴인데 환한 피부를 하고선 연애에만 열을 올린다든지 하는 것은 좋은 서사라 할 수 없다. 누구도 일을 하지 않는 아침드라마, 누구도 직업적 고민을 하지 않는 주말드라마를 이른바 ‘막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일의 부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근대 이후 인간의 직업은 수없이 명멸을 거듭하며 갈라지고 확대됐다. 『돈 키호테』에서의 인물의 일(직업)이란 기사와 노예, 왕과 신하가 전부였지만, 『더블린 사람들』에서는 성직자, 학생, 교사, 정치인, 선원, 도박꾼, 하숙집 주인, 술집 주인, 제빵사, 시인, 배우 등 다양한 직업들이 나타난다. 최근 소설에서의 직업의 다양성과 그것을 다루는 데 있어서의 디테일은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소설은 인간이 하고 있는 물리적 일을 놓치지 않고 다룸으로써 인물의 내면적 심리까지도 다잡을 수 있다. 그것이 과거이든 현재이든 상관없다. 이루어지지 않는 몽상으로서의 일이든 실패한 일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인간은 결코 일을 놓지 않는다. 그런 인간을 그려나가는 문학 또한 일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을 놓아버린 서사를 흔히 막장이라 부르지만, 막장 또한 인간의 일에서 비롯된 구체적 용어이다. 탄광의 갱도 끝까지 파고들어가 더는 갈 곳이 없을 때, 광부들은 “막장에 다다랐다”라고 했다. 막장도 사람의 일이었던 것. 지금 우리가 쓰는 숱한 말들에는 일의 영향력이 묻어 있다. 인물과 언어로 이루어지는 게 소설이라면, 인물과 언어에 현저하게 묻어나는 일의 이모저모를 허투루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소설을 읽는 일은 타인의 일을 이해하는 일이 된다. 그렇게 문학을 통해 우리의 삶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정세랑의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은 조금 희한한 소설이다. 책 속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주인공이 없는 동시에 모두가 주인공이다. 그 인물의 수는 51명이나 되며, 부가적으로 등장하는 부가적 인물까지 포함하면 숫자는 더욱 커진다. 그들은 거의 모두 특정한 일을 하고 있다. 소설의 배경은 수도권의 대형병원 응급실과 그 주변이다. 병원에선 누가 일을 할까. 의사와 간호사가 떠오른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성실한 이야기꾼, 정세랑이 아니다. 보안요원, 방사선치료사, 홍보실 직원 등 의사와 간호사가 아닌 이들도 똑같이 일을 하고 있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의사 또한 단순히 흰 가운의 상징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커리어의 끝을 준비하는 노령의 의사, 이제 막 인턴에 접어든 의사, 외과 수술의, 마취의, 전공의, 수련의…… 『피프티 피플』은 인물의 일과 일상을 통해 스토리를 직조해나간다.


 

책표지 :『피프티 피플』 정세랑 지음

 

 

직업에 대한 단단한 자부심과 일상에 대한 소탈한 불평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어서, 늘상 함께 나타나곤 한다. 『피프티 피플』의 인물은 일과 일상을 함께 안고 사는 존재들이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일을 하고, 또 그것을 잘하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다. 동시에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벌어야 하고 그것을 지겨워하는 인물들이다. 삶을 그럴싸하게 그려낸 핍진성을 통해 인생의 진실을 찾는 여정을 소설 읽기의 본질이라고 본다면, 다소 소설 본령의 형식에서 비켜난 이 소설은 어느 이야기보다 문학의 본질에 가깝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인생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유가족을 만들지 않았다.” 『피프티 피플』은 마지막 장의 이 문장을 향해 달려온 것으로 보인다. 갑작스러운 화재 사고로 병원의 많은 이들이 위험에 처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다. 화재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그리고 마땅히 한다. 소방헬기는 차례차례 사람들을 구조하고, 소방관은 몸을 사리지 않고 건물을 수색한다. 야간 경비원은 화재를 발견한 즉시 조치를 취하려다 화상을 입는다. 소설 속 사고는 사건이 되지 않았다. 서사는 비극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비극이 하나 있다. 2014년 4월 16일에도, 모든 사람이 마땅히 제 할 일이 다 하고 있었다면, 그날의 서사가 비극으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일은 날마다 지겹도록 반복되지만, 누군가는 묵묵히 하고 누군가는 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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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서효인
서효인

시인, 에세이스트, 출판편집자.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2011년에는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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