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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문文紋 :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우연

서효인

2016-12-29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우연


우연과 필연은 소설의 오랜 모티브이자 작법의 원천이었다. 전통적으로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일이 사실은 필연이었으며, 그 바깥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졌던 사소한 우연들마저 알고 보면 큰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재주는 소설가에게 필수적인 능력치가 되었다. 그것을 플롯이라 불러도 좋고, 핍진성이라 불러도 좋다. 좋은 소설가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우연에 우연이 겹치는 것이다. 우연이 남발되는 일부 주말드라마나 연속극을 우리는 훌륭한 서사라고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과연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필연만이 우리 삶을 구성하는 요소이며 그것의 총합이랄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우리는 치닫고 있는 것일까. 어쩐지 좀 으스스한 이야기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이야기다. 그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야기’이며 소설은 그 이야기라는 행위의 정점에 있다. 영상이나 음악의 힘을 빌리지 않고, 문자로 표현되는 플롯과 스토리가 인간의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우연인 줄 알았던 사사로운 사건들이 모여 거대한 필연을 이루고 삶을 완성한다. 좋은 소설의 본연은 결국 그럴듯한 이야기, 필연인 것만 같은 이야기를 이뤄내는 총체성의 산물인 것이다.

우연은 총체성 바깥에 있다. 우연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고, 예상할 수 없는 사건이다. 우연은 불안을 일으킨다. 이야기는 어쩌면 불안을 상쇄하려는 인간의 가련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 시간 인간은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긴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세상의 모든 사건과 사고, 삶과 죽음을 신이 만든 필연으로 여기고, 이에 자신을 의탁했다. 세계가 ‘그럴듯한’ 것이어야지 우리는 이 세계를 견딜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벌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이 예사롭게 벌어지는, 그러니까 필연이 아닌 우연이 지배하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소설에서도, 종교에서도 그것은 꿈꾸지 않는 세상이다. 예컨대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우연한 사고에 휘말려 300명 넘게 목숨을 잃는 것, 강남역 어느 빌딩 화장실에 간 여성이 우연히 마주친 어느 남성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 음주운전 사고로 평생의 장애를 안게 되는 것……. 그런 그럴듯하지 못한 일이 일상이 될 때, 우리는 삶과 세계를 불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앤서니 도어의 대표작이자 2015년 퓰리처상 수상작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불신의 시대에 접어든 세계에서, 끝내 필연을 붙잡고 서 있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다. 장님 소녀 마리로르와 고아 소년 베르너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두 인물의 필연적 관계는 없어 보인다. 마리로르는 프랑스의 장님 소녀이고, 베르너는 독일의 고아 소년일 뿐이니까. 이것들은 모두 우연이다. 소녀가 눈이 멀어야 했던 특별한 이유, 소년의 보무가 없어야 하는 유별난 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되었다. 때는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이고, 둘은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성장한다. 하나는 『해저 2만리』를 사람들에게 읽어주는 소녀로, 하나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출 줄 아는 소년으로.

 

앤서니 도어 장편소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소녀가 나치 일당에게 쫓긴다. 소년은 라디오를 다루는 능력으로 나치에 부역하게 된다. 소녀는 라디오를 통해 소설을 읽으며 거기에 구조요청을 섞는다. 소년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며, 구조요청을 읽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소녀가 읽고 소년이 듣는 『해저 2만리』에는 둘을 전쟁 전부터 이어주었던 또 다른 필연이 숨어 있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이 놀라운 필연에 숨이 차오르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설은 이토록 놀라운 플롯과 스토리로 우리 존재의 필연을 증명한다.

마리로르와 베르너는 2권에 달하는 장편소설에서 거의 마지막 장면, 그때 단 한 번 만난다. 그 만남을 필연으로 그리기 위해 소설은 놀랍도록 치밀하게 전쟁을 돌파해 나간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죽고 다른 누구는 살아남는다. 어떤 사람은 전쟁을 기억하고 어느 누구는 깡그리 잊는다. 모든 것을 우연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쉽게 잊을 것이다. 우연이 겹치는 과정을 궁금해하고 어떤 필연성을 발견하려 애썼던 사람은 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앤서니 도어가 소년과 소녀를 통해 보여준 필연을 향한 사투는 2차 세계대전의 야만성과 상흔을 잊지 못할 어떤 필연으로 만든다. 우리는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폭력을 기억해야 한다. 필연은 기억을 가능하게 한다.

필연에 대한 기억, 그것은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몇 가지 보루 중 하나일 것이다. 요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꼭 기억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들에게 세계는, 우연으로 가득한 불안의 해저였을까? 그렇다면 그곳에서 나와 세상의 빛을 받길 바란다. 우리는 불안을 해소할 권리가 있고, 숱한 슬픔의 필연적 연원을 살펴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인간들이다.

불안의 해저였을까? 그렇다면 그곳에서 나와 세상의 빛을 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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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서효인
서효인

시인, 에세이스트, 출판편집자.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2011년에는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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