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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ech : 개인적 우연과 집단적 필연

박재용

2016-12-08

개인적 우연과 집단적 필연


1

유럽에서 산업혁명을 촉발시킨 것은 증기기관의 발명이었다. 하지만 초기 증기기관은 압력조절이 힘들어서 툭하면 멈추거나 폭발하는 일이 잦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연구한 결과가 현재의 열역학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이 열역학은 분자나 입자 한 개를 다루는 법칙이 아니다. 증기기관 실린더 안의 수증기 분자 개수는 어마어마하게 많아 당시의 어떤 기술로도―그리고 현재도―개별 입자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통계적 방법이다.

 

증기기관 실린더 안의 수증기들이 일정한 온도에 도달한다고 생각해보자. 이 수증기 입자들은 대체로 평균 온도에 해당하는 운동에너지를 가진다. 우리는 수증기 분자의 분자량(혹은 질량)과 이 분자들의 평균속력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분자가 같은 속도를 가지진 않는다. 실제로 실린더 안의 수증기 분자 몇 개를 측정해보면 다들 속도가 들쭉날쭉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증기 분자들을 많이 확인하면 할수록 우리가 예상하는 평균속력에 가까운 분자들이 가장 많고, 평균속력에서 멀어질수록 그에 해당하는 분자들의 개수가 적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수증기 분자들의 속력을 모아 평균을 내보면 우리가 예상한 속력과 거의 비슷하다. 따라서 개개의 분자는 여러 우연한 요인에 의해 속력이 다르고 그에 따라 온도가 들쭉날쭉하지만, 그를 포함한 전체 온도는 외부에서 가한 열에너지 양만 안다면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즉 필연적이다.

 

증기기관 실린더


2

캐나다 동쪽에 있는 한 섬에서의 일이다. 생물학자들이 그 섬에 사는 사슴과 늑대의 개체 수를 수십 년간 매년 확인했다. 그랬더니 사슴의 개체 수가 늘어나면 그다음 해에는 늑대의 개체 수가 늘었다. 그리고 늑대의 개체 수가 늘어나면 다시 사슴의 개체 수가 줄고, 사슴의 개체 수가 줄면 늑대의 개체 수가 줄었다. 생물학자들은 이러한 주기가 5년마다 되풀이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좀 더 관찰했더니 사슴의 개체 수가 줄면 초원의 풀들이 늘어나고 다시 사슴의 개체 수가 늘어나면 풀들이 줄어드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뭄이 심하게 들면 풀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그 영향으로 사슴이 줄고 다음 해에는 늑대가 줄었다. 그러나 이런 우연한 요소가 개입해도 2~3년의 조정과정을 거치면 다시 5년 주기의 현상이 되풀이되었다.

 

3

원자는 중심에 원자핵이 있고 그 주변을 마이너스 전기를 띤 전자가 돌고 있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때 전자는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우리는 그 전자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를 알 수가 없다. 그 전자가 존재할 장소의 확률적 분포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또 전자가 원자 주위를 돌 때 특정한 시간에 어떤 속도인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그 평균속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원자와 원자가 결합해서 분자를 만들거나 결정을 형성할 때, 이런 확률함수만으로도 그 결과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원자


4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머리카락 색은 의지가 아니라 유전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부모는 단 한 가지의 유전자가 아니라 머리카락 색에 대한 대립되는 두 개의 유전자를 각각 가지고 있다. 그중 어떤 두 개가 자식에게 유전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제어하지도 못한다. 또한 아주 드물지만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부모와 전혀 다른 색을 가질 수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수정란이 배아가 되고 다시 태아가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상호작용들이 머리카락 색에 변화를 줄 수도 있다. 이런 변이와 우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우리의 외모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모와 자식의 머리카락 색은 비슷하다. 굳이 미모라든가 얼굴형이 아닌 머리카락 색을 선택한 심정은 다들 이해할 것이다.

 

5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산다. 개인의 삶은 수많은 요소에 의한 우연에 지배당한다. 어느 날 갑자기 로또에 당첨될 수도, 시험에서 잘 몰라 찍은 게 정답이 될 수도 있다. 우연히 돌아간 길에서 일생의 인연을 만날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또 길을 가다가 비둘기 똥이 머리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우연한 개인들이 만나서 함께 사는 우리 사회는 통계적으로 필연이 지배한다.

 

음주운전을 하면 교통사고를 낼 확률이 높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평균수명이 늘어난다. 담배를 끊으면 좀 더 오래 살고, 부모가 가난하면 자식들도 대개 가난하게 산다. 서울 강남지역의 고등학생들은 다른 지역의 고등학생들에 비해 소위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높고, 부유한 부모를 둔 사람들이 사회적 성공을 하는 비율이 높다.

 

개인은 우연히 행복하고 불행하지만, 사회 전체는 필연적으로 행복하거나 불행하다. 그래서 성숙한 사회는 이러한 우연들이 겹쳐서 만들어내는 필연적 불행에 대비한다. 즉 음주운전을 규제하면, 개별적 사고 발생을 막을 수도 없고 음주운전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순 없지만, 전체적으로 교통사고의 발생 건수를 줄일 순 있다. 그래서 음주운전 방지 캠페인을 하고, 단속을 강화하고, 처벌을 엄격하게 한다. 부모의 재산이 자식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도록 교육 시스템을 정비하고, 나이든 가난한 이들이 돌연사하지 않도록 노령화에 대비한다. 갑작스러운 실업으로 가정이 나락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보장제도를 돌보고, 사용자가 노동자를 함부로 할 수 없도록 노동권을 보장한다. 선박과 같이 많은 사람을 수송하는 경우에는 안전에 더욱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사고 확률을 줄인다. 만약 사고가 나면 사고 원인을 면밀히 분석해서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대처한다. 성숙한 사회는 그렇다.

 

점과 선의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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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재용
박재용

(과학 커뮤니케이터)과학을 공부하고 쓰고 말한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과학문화위원회 회원이다. 『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 『모든 진화는 공진화다』 『멸종 생명진화의 끝과 시작』 『짝짓기 생명진화의 은밀한 기원』 『경계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 등을 썼다. '인문학을 위한 자연과학 강의' '생명진화의 다섯 가지 테마' '과학사 강의'의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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