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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M : 그 자체로 이미 의미 있는 일

장근영

2017-03-14

그 자체로 이미 의미 있는 일


일이란 무엇일까? 넓게 보자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동물이나 곤충도 매일 일을 하는 셈이다. 곰이나 개구리의 겨울잠도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행동이므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식물도 일을 한다. 흙에서 수분과 양분을 뽑아 올리고 광합성을 하는 것도, 꽃을 피워서 번식을 하는 것도 결국 생존, 그리고 종족의 보존을 위한 작용이니까. 아마 처음에는 인간도 마찬#권가지였을 것이다. 단지 인간의 일은 조금씩 진화하고 발전했다는 점이 다르다. 개미들이 하는 일은 수백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하지만 인간의 일은 수렵채집에서 시작해 유목이나 농경으로, 상거래와 가상의 교류들로 계속 진화해왔다. 인간이 단순히 환경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을 통해서 환경을 재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본능에 의존하는 일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필요로 판단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겨냥하는 일을 창안하며 동료 인간들과 공유할 수 있었던 인간의 사고력이, 인간의 일을 다른 동물의 일과 구별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삶 자체도 진화했다.

일이 다양해지면서 구성원들에게 그 다양한 일을 적절히 배분할 필요가 생겼다. 거기서 사회적인 위계 혹은 권력구조가 만들어졌다. 일의 배분은 권력구조의 확립을 의미했다. 일을 배분해주는 것 자체가 일인 사람의 권력이, 그저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작동했다. ‘직업’은 이렇게 사회나 권력에 의해 개개인에게 배분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이 직업으로 구분되면서부터 일은 그 사람 자체를 의미하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인 1950년에 교육학자 로버트 해비거스트R.Havighurst는 성인이 되기 위한 발달과업 중 하나로 ‘취업’을 명시했다. 직업은 그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 구실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교육학자 로버트 해비거스트 R.Havighurst

교육학자 로버트 해비거스트 R.Havighurst는

성인이 되기 위한 발달과업 중 하나로 ‘취업’을 명시했다.


문제는 일에 엉뚱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다. 많은 곳에서 고되고 귀중한 일일수록 더 낮은 가치를 부여하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추상적인 일, 심지어 없어도 큰 상관이 없는 일에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곤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렌은 『유한계급론』을 통해 일의 당연한 가치보다는 힘든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음의 가치를 더 높이 쳐주는 방향으로 일이 진화했다고 지적한다. ‘고귀한 지위’라 함은 일을 하지 않고 여가를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 스포츠를 비롯한 모든 여가활동은 그런 고귀함의 표현이다. 근대 영국의 장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 <다운튼 애비>의 주인공 그랜섬 백작은 자기 딸의 예비신랑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난감해한다. 귀족의 과업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명예와 권위, 재산과 영지를 지키고 키우는 것이지 직업 따위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일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진짜 일들은 이미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일이 왜 필요한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따지지 않는다. 청소 일을 생각해보라. 이전 활동의 잔여물들이 정리되지 않으면 새로운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니 아무도 청소라는 일이 왜 필요한지, 청소라는 일의 의미가 뭔지 질문하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일이나, 물건을 거래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 일들은 우리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일이 아닌 것이 일 자체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 받기도 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진짜 일을 방해한다. 흥미로운 것은 위에서처럼 일에 따라 지위를 구분하는 위계가 분명한 사회일수록 진짜 일의 가치가 절하된다는 점이다.


도시속 빌딩들

 

사실 일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진짜 일들은 이미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새로운 일을 진행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할 때 제일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과정이다. 그 일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이루어졌느냐에 따라서 그 계획의 성공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부수적인 일들도 있다. 예를 들어, 그렇게 생각해낸 계획을 사람들에게 잘 설명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어떤 회사에서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일 자체보다 그 아이디어를 전하기 위한 보조자료의 제작을 더 중요한 일로 간주한다. 특히 아이디어 창출에 거의 기여하지 않은 구성원일수록, 그리고 그 구성원의 지위가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보다) 높을수록, 이렇게 본말이 전도된 가치부여는 더욱 심각해진다. 글자체나 편집, 사소한 표현 등을 문제 삼아 전체 아이디어를 날려버리기도 한다. 내가 무슨 일을 해낼 능력은 없어도, 일이 안 되게 만들 권력은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다.

대개 자기 회사에서 누가 일을 잘하고 유능한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영진들이 이런 사태를 초래하지만, 어쩌면 이건 모든 조직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교육학자 로렌스 피터L.Peter는 “위계조직에서 모든 직원은 자신이 무능해질 때까지 승진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정리한다. 다시 말해 모든 조직 구성원들은 자기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승진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는 조직 꼭대기에 능력은 없고 권력만 있는 자가 자리하게 되고, 그는 결국 위와 같은 사보타지를 저지르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어떤 조직도 이런 사태를 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짜 일의 가치를 무시하고 무의미한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세상에서는 결국 이런 비극이 닥치기 마련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궁금해진다. 지금 나는 ‘일’을 하고 있는 건가? 분명히 이 원고를 쓰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투입했지만, 과연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모쪼록 이 글에 독자들이 사용한 시간만큼의 값어치는 있는 일이었기를 바란다.


Stress / Syndrome / Psychology / Emotion / Mentality /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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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장근영
장근영

(심리학자)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과 일본 리니지 유저의 라이프스타일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소년 문화심리학과 매체 심리학, 사이버공간의 심리학 연구를 수행했으며, 영화와 만화, 게임 등을 이용한 심리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팝콘 심리학』 『심리학 오디세이』 『싸이코 짱가의 영화 속 심리학』 『소심한 심리학자와 무심한 고양이』 등을 저술했고,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현재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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