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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감각의 회복을 꿈꾸며

휴가, 보다 싱그럽고 보다 날 선 감각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볼 기회

정여울

2017-08-29

일과 스케줄, 가족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 통장 잔액에 대한 걱정,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 

이런 것들이 잔뜩 우리의 앞과 뒤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마음의 휴식을 제대로 취하면, 나의 ‘앞’과 ‘뒤’에 있는 수많은 외부적 자극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나 자신이 보인다. 

 

 

 

오래전 기차를 타고 유럽여행 중이었을 때 독일의 한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직접 싸 온 샌드위치를 드시면서, 나는 기차 매점에서 사 온 커피를 마시면서. “너희 나라는 휴가가 며칠이나 되니?” “아, 한국은 휴가가 짧은 편이에요. 일주일을 넘기가 어렵지요.” 할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국은 정말 살기 힘든 곳이구나. 우리 가족은 6주나 휴가를 얻었는데. 유럽 사람들은 대부분 휴가가 길거든.” 나는 휴가가 짧다는 이유로 ‘살기 힘든 나라’ 취급을 받는 것이 정말 서글펐지만,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기가 어려웠다. 나도 만약 회사에 다녔다면 일주일 휴가를 쓰면서도 눈치를 봤을 테니, 늘 앞날이 불안한 프리랜서 작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축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예전에는 그토록 취직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미래는 항상 불안하지만 언제든지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가 않다. ‘휴식’의 가치를 몰랐던 때는 ‘바쁜 것’이 축복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도 진정한 휴식을 위해서임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혼자 놀기의 달인, 함께 놀기를 배우다

얼마 전에 아버지의 칠순 기념으로 온 가족이 괌으로 여행을 떠났다. 원래 다섯 명이었던 우리 가족이 이제는 조카들까지 합쳐 무려 열한 명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함께 여행을 떠나려니 고려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4살, 6살, 11살 조카들의 여권도 만들어야 했고,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여러 가지 면에서 배려해야 했고, 입맛이 천차만별인 열한 명의 대가족이 매번 낯선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괌에서 유명하다는 맛집을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찾아갔다가 기다리는 시간이 한 시간 반은 필요하다고 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배고프다고 울먹이는 조카들 때문에 돌아서야 했다. 낯선 나라에서 아이들이 한 명이라도 없어질까봐 늘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야 했고, 몸이 약하신 부모님이 행여 어딘가 불편하실까 전전긍긍해야 했다.

 

 

구름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에서 바라본 하늘

 

야자수가 있는 괌 해변가

▲구름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에서 바라본 하늘 / 야자수가 있는 괌 해변가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걱정할 일이 많아도, 아무리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곳곳에서 튀어나와도, 우리 모두 낯선 나라에서 잠시나마 일 같은 건 까맣게 잊고 ‘함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눈물겹게 좋았다. 미세먼지 따윈 생각나지 않는 거짓말처럼 새파란 하늘도 좋았고, 아무 데서나 풍덩 빠져 즐겁게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바다도 좋았고, 바다 한가운데서 운명처럼 만난 기운찬 돌고래들의 춤도 환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냥 아무런 꾸밈없이 쉰다는 것이 좋았다. 신경 쓸 것은 많았지만, 그것은 모두 내가 가족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피곤한 것들은 얼마든지 참을 수가 있다. 그게 나였다. 그 모든 자잘한 걱정이나 뜻밖의 돌발상황도, 사랑과 휴식 앞에서는 기분 좋게 무릎을 꿇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뛰어놀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다. ‘혼자 놀기의 달인’인 나는 ‘함께 놀기의 기쁨’을 배우려면 아직 한참 먼, ‘휴식의 초보’였던 것이다.

 

 

휴식, 내면의 깨우는 시간

휴식은 단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감각의 규칙적 사용법에 갇혀 미처 쓰지 못했던 두뇌의 다른 감각을 사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는 경험적 진실은 뇌의 사용방식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예컨대 스마트폰 사용을 몇 시간 만이라도 중단하면, 시각 외에 다른 감각이 열리기 시작한다. 청각과 촉각, 후각과 미각을 향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주로 시각적 자극에 집중하게 만들다 보니,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동안에 혹사당했던 눈이 쉬게 되면서 다른 감각을 향한 관심의 촉수가 뻗어 나간다. 

 

항상 일만 하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게 되었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하늘은 그림엽서의 스카이블루 빛깔보다 더 새파랗게 보이고, 바다는 상상 속의 그림보다도 더 눈부신 황금빛으로 빛나고, 나무들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향기로 코끝을 간질인다. 똑같은 업무와 똑같은 잿빛 건물들, 비슷비슷한 맛집 음식에 길들어버린 우리의 오감이 새로운 얼굴로 다시 태어나는 느낌. 휴식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올올이 생생하게 느끼는 감각의 촉수를 되찾을 수 있고, 보다 싱그럽고 보다 날 선 감각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해변의 남녀 모습

▲ @marcel_fuentes

 

 

“우리의 앞과 뒤에 놓여 있는 것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에 비하면 아주 미미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정신적 지주였던 랄프 왈도 에머슨의 명언이다. 우리의 ‘앞’과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과 스케줄, 가족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 통장 잔액에 대한 걱정,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 이런 것들이 잔뜩 우리의 앞과 뒤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마음의 휴식을 제대로 취하면, 나의 ‘앞’과 ‘뒤’에 있는 수많은 외부적 자극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나 자신이 보인다. 나 바깥의 것들을 신경 쓰느라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던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안에는 아직 이루지 못한 소박한 꿈들, 그립지만 다시 볼 수 없는 얼굴들, 그 모든 애틋한 추억들, 어쩌면 내가 이룰 수 있지만 여전히 시도하지 않는 내 안의 가능성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휴식은 ‘나 바깥의 것들’을 향해 끊임없이 휘둘리던 나를 잠시 접어두고, ‘내 안에 있지만, 내가 돌보지 못한 것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준다. 우리가 휴식 속에서 그런 빛나는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좀 더 넉넉한 휴가, 좀 더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휴식은 단지 재충전을 위한 비움이 아니라, 온전히 비움 그 자체를 위한 비움이 될 때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비우고 또 비우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리고 채우고 또 채우느라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진정한 휴식을 통해 우리는 좀 더 넓고, 깊고, 자유로워진 우리 자신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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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여울
정여울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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