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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너 같은 어른을 만났다면, 달랐을까?

-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허유선

2022-10-18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면 민성이와 형의 관계는 애착과 존중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관계이다.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을 내 곁에 두고 싶고,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애착이 생긴다.

그러나 동시에, 정말로 그 ‘사람’을 ‘친구’로서 좋아한다면 그를 존중해야 한다.

 

 

 

SBS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2020)와 좋은 우정의 조건을 생각하다

* 이 글은 드라마의 주요 내용을 언급합니다. 

 

 

한밤중에 중학생 소년이 추락했다. 장소는 소년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호텔 옥상이었다. 소년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깨어나지는 못한 상태이다. 소년, 은호는 일하는 엄마와 단둘이 살았고, 엄마의 남자친구는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 담임선생님은 혹시 은호를 괴롭힌 아이가 있는지를 물어보지만 모두가 그런 일은 없었다고 대답한다. 초동 수사는 결국 은호의 추락이 사고가 아닌 ‘사건'이 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은호의 추락은 이 사회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10대의 자살 시도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 포스터 (출처: 나무위키)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 포스터 (출처: 나무위키)

 

 

친구니까, 이해하고 싶어

서울 광역수사대 강력1팀 팀장, 영진이 은호의 일과 미제로 남은 연쇄살인사건, 사이비 종교재단이 모두 엮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영진은 이 일을 ‘남들처럼’ 불행한 사고로 결론 짓고 지나칠 수 없었다. 형사라는 직업적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은호는 영진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영진에게 은호는 거의 유일한 친구이다. 영진은 고등학생 시절, 가장 친한 친구 수정을 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로 잃었다. 연쇄살인사건은 영진의 친구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고,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범인이 원래 노렸던 사람은 영진이었다. 영진에게는 그 뒤로 ‘생활'이나 ‘관계'라 부를 만한 것이 없어졌다. 식물을 돌보는 진로를 꿈꾸던 영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찰 공무원 시험을 보았다. 그 후로는 일에만 매진하며 특진을 거듭해 팀장이 되었다.

 

영진의 지속적 관계는 광역수사대 팀원, 수정의 사건을 맡았던 형사, 수정의 어머니뿐이다. 그러니까 은호를 제외하면, 영진의 현재 관계는 모두 친구 수정의 죽음이라는 과거에서 비롯한 셈이다. 그때부터 영진의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친구를 살해한 진범을 찾는 일, 친구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해명하는 일. 영진은 미제로 남겨진, 그리하여 ‘아무도 모르는’ 그 일을 안고 살아왔다. 이제 그 사건은 영진에게 수정만이 아니라, 은호를 위한 일이 된다.

 

 

우리는 어떻게 친구가 되는 것일까

영진의 집, 자물쇠가 걸린 방은 연쇄살인사건의 수사 자료로 가득 차 있다. 반면 영진의 냉장고는 텅 비어 있다. 그 텅 빈 냉장고를 주기적으로 채워주던 사람, 우유의 유통기한을 알려주고 쓰레기를 버리라고 일러주는 사람, 영진의 비밀이 담긴 방을 마음 쓰지만 감히 물어보지 않는 사람, 먼저 다가와 자신의 일상을 공유해주는 사람, 그리하여 영진의 ‘생활’을 만들고 영진의 집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던 사람이 바로 은호였다. 

 

 

공허함

공허함

 

 

어린 은호와 어른 영진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이런 관계도 ‘친구’로 불러도 좋은 것일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 혹은 친구의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 유형은 업무상의 동료, 전우 등 좋은 결과를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 두 번째 유형은 미식, 술, 여행, 음악 등과 같이 취향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관계이다. 세 번째 유형은 그 ‘사람’이 좋은 관계이다. 굳이 함께 잘 지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겹치는 취향이 없어도 좋아하게 되는 사람, 특별한 목적 없이도 안부를 묻고 만날 일을 만드는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유형의 우정을 가장 좋은 친구 관계라고 말한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일부러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그만큼 좋아한다는 뜻이니까.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친구는 나이와 전혀 상관이 없다. 서로 겹치는 특징이 많지 않아도 된다. 서로를 인간적으로 좋아할 수 있으면 우리는 누구와도 가장 좋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영진과 은호도 바로 그런 친구 관계다. 은호가 8살 때, 엄마의 당시 남자친구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어린 은호에게 윗집에 이사온 아줌마, 영진은 갑자기 나타나 엄마와 자신을 구해준 히어로였다. 일반적으로 히어로와 평범한 사람이 친구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영진과 은호는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면서 마침내 친구가 되었다. 영진에게 은호는 단지 지켜줘야 하는 어린아이로 남지 않고, 자신의 온기로 영진의 일상과 삶을 가꾸고 만들어주는 존재가 되었다. 은호에게 영진은 윗집의 히어로에서 사소한 나의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 편안함을 느끼기 어려운 집 대신 거리를 떠돌 때, 돌아갈 수 있는 또다른 ‘나의 장소’가 되었다.

 

 

좋은 친구는 애착과 존중의 균형 잡기 

드라마는 나이, 취향, 경제적 조건 등 서로 같은 점이 많을 때에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편견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영진은 수사 도중 만난 은호의 같은 반 학생 민성에게 자신을 은호의 ‘친구로 소개한다. 민성에게도 자기 집의 운전기사 형’인 어른 ‘친구가 있다. 민성에게 형은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나 형은 민성을 위한다는 이유로 거짓말을 하고, 타인을 해친다. 민성은 형을 보호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더욱 고립된다.

 

‘영진-은호’도, ‘민성-형’도 서로에게 딱히 이익이 되지 않으며 나이나 직업 등의 격차가 큰 관계이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사람으로서 애정과 신뢰를 나누는 관계이다. 그런데 이 두 관계는 왜 다른 결과를 낳았을까?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면 민성이와 형의 관계는 애착과 존중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관계이다.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을 내 곁에 두고 싶고,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애착이 생긴다. 그러나 동시에, 정말로 그 ‘사람’을 ‘친구’로서 좋아한다면 그를 존중해야 한다.1)

1) 사랑의 경우는 이야기가 좀 복잡해진다. 각자의 정체성을 흔드는 어렵고 긴장되는 관계로 사랑을 이해하는 시선은 사르트르, 알랭 바디우를 참고하자. 사르트르의 경우는 긴장이, 알랭 바디우의 경우는 새로운 방식의 공존이 강조된다.

 

 

균형

균형

 

 

내가 아무리 좋아하고 잘해주고 싶어도, 상대는 물건이 아니어서 내 뜻대로 소유하거나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우정에는 애착만큼 존중도 중요하다. 애착이 존중을 압도할 때, 우리는 그 애착을 계속 만족시키기 위해 상대가 한 ‘사람’이고, 그러니까 내가 나름대로 고민하고 기대하듯이 상대도 상대 나름대로 고민하고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똑같이 ‘사람’이니까 오히려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기준은 아니니까.

 

민성의 ‘형’이 그랬다. 형은 민성의 친구이자 보호자를 자처했지만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 민성의 상황을 단정 짓고, 민성을 대신하여 문제를 자기만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 결과, 민성은 오히려 궁지에 몰린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장 좋은’ 우정은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만큼 존중할 수 있는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정말로 존중한다면 차이를 지켜줘

드라마에는 또 다른 어른 친구가 나온다. 상호는 은호가 추락한 호텔의 사장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진 자신을 맡아준 목사 ‘아버지’의 학대를 겪으며 겨우 살아남았다. 그래서 상호는 자신처럼 버려진 아이들을 후원하고, ‘친구’를 자처한다. 아이들을 자신의 호텔에 초대하고, 그들과 아이스크림과 컵라면을 나누어 먹으며 실없는 농담을 하고 함께 게임을 즐긴다.

 

그러나 상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조종하고 지배한다. 때리고, 협박한다. 상호의 ‘친구’ 관계는 상호만이 남는다. 상호의 관계는 상대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에 자신만이 자유로운 관계이다. 상호는 아버지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어른이 되었다.

 

드라마는 나이의 차이가 아니라, ‘어른’과 ‘미성년자’로서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차이’를 강조한다. 영진과 은호는 사회적으로 가진 ‘힘’과 가능한 역할이 다르다. 영진은 어른이며 형사이고, 어린 학생인 은호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영진은 은호의 삶을 자신의 것처럼 함부로 휘두르거나 방치하는 대신, 자신이 잘할 수 있기에 해야 하는 일을 한다. 영진은 물리적 폭력에 대항하고, 어른만이 가능한 절차를 밟아 은호의 삶을 지킨다. 반대로 은호가 잘하는 것은 은호가 한다. 은호는 영진의 자질구레한 생활을 챙기고, 안부를 묻고 비밀을 존중하며 영진의 삶을 구성한다. 상대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우정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각자 ‘다르게’ 최선을 다하는 관계이다. 그리고 이것이 관계에서 쌍방의 ‘책임’이다.

 

 

차이가 있어서, 바랄 수 있다

상호는 “나도 너 같은 어른을 만났다면 달랐을까?”라고 영진에게 묻는다. 어린 상호는 잘못도, 선택할 힘도 없었다. 그래서 이 물음은 슬프다. ‘아버지’가 상호가 바랐던 것과 ‘같은’, 그의 힘에 합당한 애정으로 이 관계를 대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같지 않음’은 슬프다. 그러나 같지 않기에, 우리는 지금과는 또 다른 방식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어른 상호가 “내가 아버지와는 다른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물었다면 어땠을까? 관계의 차이는 때로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차이가 사라지면 아예 ‘관계’의 가능성도 사라진다.

 

 

 

리드문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나도 너같은 어른을 만났다면, 달랐을까?

- 지난 글: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영화 <킬링 디어>와 롤즈의 <정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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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유선 철학박사 사진
허유선

철학 박사, 동국대학교 철학과 강사
칸트 실천 철학을 전공했다. ‘철학한다’는 것이 원래 우리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전하고, ‘잘 사는 것’을 함께 생각하는 강연, 저술 작업 등을 해왔다.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매체윤리, 특히 인공지능 윤리를 연구한다. 저서 『소크라테스 씨,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요?』, 『인생에 한 번은 나를 위해 철학할 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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