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을 사는 우리는 인공지능(AI)이나 인간 소외, 인구소멸 등 그동안 겪어본 적 없는 전 지구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언제나 위기를 극복할 뿐 아니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왔습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전 세계를 강타했던 코로나19 팬데믹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인류에게 엄청난 위기였고, 경제와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를 계기로 많은 기업과 국가들이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고, 일과 생활 방식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의 위기와 도전을 어떻게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요? 특히 인문정신과 창조활동이 어떻게 새로운 시대를 여는 관문의 열쇠가 될 수 있을지, 인문정신문화진흥심의회 위원장 최동호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최동호 시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경남대석좌교수, 인문정신문화진흥심의회 위원장.
1948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76년 첫 시집 '황사바람'이 간행되었으며,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당선하였고, 같은 해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되었다.
시집에 '공놀이 하는 달마', '불꽃 비단벌레', ‘경이로운 빛의 인간’, ‘생이 빛나는 오늘’ 등이 시론집에 ’현대시의 정신사‘, '시 읽기의 즐거움',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 '진흙 천국의 시적 주술' 등이, 편저에 '정지용사전' 공편 '소설어 사전' 등이 있다.
김환태평론문학상, 편운문학상, 대산문학상, 고산 윤선도 문학상, 박두진 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미국에서 제니마 문학상, 이탈리아에서 ‘유로파 인 베르시(Europa in versi)’의 ‘올해의 시인상’ 등 국내외 문학상을 수상했다.
ㅣ인문정신, 왜 중요할까
Q.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공지능(AI), 소외, 인구소멸 등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여 많은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과거와 현재, 어떤 변화를 보시는지요?
인간의 불안과 공포는 시대를 막론하고 경험하는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과거에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신에 의지해 해결했습니다. 현대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러한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중심을 잃고 집단적인 흐름에 휩쓸려가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양심과 정의감이 약화되었죠. 이런 변화는 인문정신의 약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Q. 이럴 때 자기 주체성을 확립하고 이렇게 휩쓸리지 않으려면 인문정신이 매우 중요할 텐데요. 인문정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인문정신이란 자기 발견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과 긍지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느끼는 행복감이 인문정신의 핵심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행복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유명해지기 위해 시를 쓰는 사람과 자기 내면의 진정한 필요에 따라 시를 쓰는 사람의 만족감은 다를 수밖에 없죠. 모든 분야에서 그렇습니다.
Q. 그렇다면 인문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삶에 대한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감도 증진되죠. 문인으로서 저는 이러한 행복을 주는 교육의 근원이 언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Q. 언어 교육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문교육의 출발점이자 마지막 종착점이 언어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언어라는 의미이지요.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는데, 그 이름이란 것은 그 사람이 사용하고 기록한 언어를 뜻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국민의 문화적 수준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아름답고 교양 있는 언어를 말하기 위해서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감각과 사유, 독서가 필요하지요.
Q. 우리 사회 전체에 인문 정신이 스며들게 하기 위해 인문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공교육에서 인문교육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정신적 결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신이 배고프면 그것을 채우고 싶어 하기 마련이에요.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거나 토론을 하면서 말이죠. 한국이 문화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인문교육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인문교육은 분야를 넘나듭니다. 과학자가 시를 읽고 창의적인 사고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고, 시인은 과거 유물을 보면서도 영감을 받고, 화가는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이런 상호 발전적인 순환 회로를 만드는 것이 인문정신을 강화하는 중요한 전제입니다.
Q. 그 순환회로를 만들기 위해 교육의 방향도 바뀌어야겠네요?
맞습니다. 기능 교육보다는 통합 교육을 지향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기능 교육과 함께, 그것이 전인 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교육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Q. 하지만 당장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요구에, 인문정신은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훌륭한 음악은 크고 두드러진 소리보다 배경에 깔린 낮은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더 깊이 움직이곤 합니다. 인문정신도 바로 그런 낮은 소리와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큰 소리만 시끄럽게 들리는 소음이 난무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진실한 언어가 소통되고 공유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Q. 긍지를 많이 언급하시는 것 같습니다. 긍지, 어떤 면에서 가질 수 있을까요?
요즘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나라의 위상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2023년에 프랑스의 몇몇 대학을 방문했는데, 파리와 마르세유의 대학에서 프랑스인들이 한국 시를 읽고 기뻐하고 울기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프랑스어가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어가 멋지다고 느낍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면, 예전에 BTS가 공연을 할 때 외국의 한 음악 평론가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단지 기능적, 기교적인 춤과 노래가 아니라 그 안에 잠재된 열정, 즉 신바람을 봤기 때문입니다. 또, 외국 가수들이 한국에서 공연할 때 관중들이 함께 부르는 떼창에 놀라기도 하는데요. 2002년 월드컵 때 온 국민이 거리로 나와 열정적으로 응원했던 것, 1979년 부마민주항쟁 때 학생들이 반독재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고, 동네 어린이들과 부모들까지 함께 나와 마산 시내가 완전히 마비되었던 광경을 지켜 보았는데 그 열정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있습니다. 내면에 잠재된 그 에너지가 분출되면 한국 사람들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역동성을 지닌 민족이에요. 이미 가지고 있는 이 에너지를 긍지로 되찾아야 합니다.
ㅣ역사 속에서 발견한 긍지
Q. 역사 속에서 우리가 긍지를 가질 만한 사례엔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신라의 삼국 통일을 들 수 있습니다. 삼국 통일이라는 꿈의 기틀은 신라의 무열왕으로부터 시작되어 문무왕 시대에 완성됩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알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무왕릉비에는 자신들이 북방 민족 흉노의 왕족 출신인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중국과 대륙에서 한나라 무제와 중원을 놓고 쟁패를 다투었던 김일제의 후손이었던 까닭에 삼국 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백제와 고구려를 함께 멸망시킨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할 야심을 드러냈을 때입니다.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는 당의 20만 대군을 격파하였고,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는 당나라의 설인귀 부대를 물리쳤습니다. 이를 통해 문무왕은 당나라를 물리치고 독자적으로 통일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후 한반도의 국가적 정체성을 위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고구려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고구려는 중국의 당 태종이 직접 나서서 정복하려 한 동북아시아 강대국이었습니다.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패배한 당 태종은 죽기 직전에 “다시는 고구려를 정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합니다. 고구려는 중국이 가장 두려워했던 나라 중 하나였고, 그 강역이 장수왕 시대에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 중국은 동북 공정을 통해 이런 부분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려고 한 것은 역사 조작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Q.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현재 우리의 정체성과 미래의 방향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시는지요? 인문정신은 이런 사건들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고 적용하게 할까요?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은 인문정신의 기반을 다지고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과 고구려의 강력함 같은 역사적 사례들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이해하고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성취를 자긍심으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도전에 자신감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인문정신은 이러한 역사적 유래와 깊이를 인식하고, 그로부터 얻은 지혜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죠. 그것은 곧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일원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의미 있는 대화와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힘을 제공하게 됩니다.
Q.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자산들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민족에게는 이미 증명된 많은 역량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 미술의 반가사유상은 매우 아름답고 고요하며 독창적인 미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유교 또한 성리학이라는 심오한 철학으로 발전시켜 동방 예의지국이라고 자부할 만큼의 나라였습니다. 무엇보다 한민족의 위대성은 독창적인 문자, 즉 한글을 만든 것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는 디지털 시대에 매우 적합합니다. 한국어는 다른 언어보다 속도감 있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한류의 핵심에 한글이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장점이지요. 우리가 가진 장점을 계발하고 보편화하는 것이 인문교육의 기본이고, 이걸 통해 현 사회의 여러 부정적인 징후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ㅣ인문정신과 창조활동, 그 풍요로운 힘
Q. 그렇다면 부정적인 징후들을 맞닥뜨린 현 시대에, 인문정신과 이를 표현하는 창조활동은 개개인에게 어떻게 힘을 줄 수 있을까요?
인문정신은 개인의 자기 존재감을 회복하는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이것을 상실하면 아무리 외적으로 성공해도 내면의 결핍이 있고, 깊이 있는 관계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문정신은 개인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스스로의 정체성과 긍지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과 표현 방식을 개발하게 됩니다. 창조활동은 이러한 개인의 발견을 실제적인 형태로 전환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예술, 문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함으로써 개인은 자신의 내면적 가치를 외부 세계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이죠.
Q. 모든 사람이 다 창조자, 창작자가 될 수는 없을 텐데, 개개인들이 어떻게 창조활동으로 인문정신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요?
공유하고 함께하면 모두가 그 창조과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시작한 생각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그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거죠. 이런 면에서 창조성이나 인문정신은 함께하는 정신입니다. 혼자서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쓰고, 공유하고, 나누고, 함께해서 더욱 확장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문화민족이 되고, 문화민족이 되면서 세계를 선도할 수 있게 되지요.
Q. 그렇다면 이러한 개개인의 창조활동은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사회적으로 보면, 인문정신과 창조활동은 문화적 다양성의 뿌리입니다.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창의적으로 표현할 때, 국가나 사회 공동체 내에서 새로운 시각과 다양한 아이디어가 풍요롭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는 폐쇄성을 벗어나 역동적이며 혁신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창조적 활동은 경제적 발전에 근본 토대를 만들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산업과 직업을 창출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증폭시킵니다. 창의와 혁신이 없다면 국가의 미래도 없습니다.
인문정신은 예술, 기술,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창의적 발전의 원동력입니다. 한국은 최근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여러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인문교육을 통해 과도기적 혼란을 극복하고 한국인으로서 자존감을 확립하여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국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국민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 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인간 교육의 근간이 되는 인문정신의 고양이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개방적이고 선진적인 국가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문정신과 창조활동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다가온 인공지능 시대의 문을 여는 창조적 열쇠는 인문정신이라는 심도 있는 자각이 절실합니다.
1948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76년 첫 시집 '황사바람'이 간행되었으며,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당선하였고, 같은 해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되었다.
시집에 '공놀이 하는 달마', '불꽃 비단벌레', ‘경이로운 빛의 인간’, ‘생이 빛나는 오늘’ 등이 시론집에 ’현대시의 정신사‘, '시 읽기의 즐거움',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 '진흙 천국의 시적 주술' 등이, 편저에 '정지용사전' 공편 '소설어 사전' 등이 있다.
김환태평론문학상, 편운문학상, 대산문학상, 고산 윤선도 문학상, 박두진 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미국에서 제니마 문학상, 이탈리아에서 ‘유로파 인 베르시(Europa in versi)’의 ‘올해의 시인상’ 등 국내외 문학상을 수상했다.
새로운 시대의 탄생
시대가 묻고 인문이 답하다 ➁ 최동호 시인
최동호
2024-07-29
2024년을 사는 우리는 인공지능(AI)이나 인간 소외, 인구소멸 등 그동안 겪어본 적 없는 전 지구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언제나 위기를 극복할 뿐 아니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왔습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전 세계를 강타했던 코로나19 팬데믹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인류에게 엄청난 위기였고, 경제와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를 계기로 많은 기업과 국가들이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고, 일과 생활 방식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의 위기와 도전을 어떻게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요? 특히 인문정신과 창조활동이 어떻게 새로운 시대를 여는 관문의 열쇠가 될 수 있을지, 인문정신문화진흥심의회 위원장 최동호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최동호 시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경남대석좌교수, 인문정신문화진흥심의회 위원장.
1948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76년 첫 시집 '황사바람'이 간행되었으며,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당선하였고, 같은 해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되었다.
시집에 '공놀이 하는 달마', '불꽃 비단벌레', ‘경이로운 빛의 인간’, ‘생이 빛나는 오늘’ 등이 시론집에 ’현대시의 정신사‘, '시 읽기의 즐거움',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 '진흙 천국의 시적 주술' 등이, 편저에 '정지용사전' 공편 '소설어 사전' 등이 있다.
김환태평론문학상, 편운문학상, 대산문학상, 고산 윤선도 문학상, 박두진 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미국에서 제니마 문학상, 이탈리아에서 ‘유로파 인 베르시(Europa in versi)’의 ‘올해의 시인상’ 등 국내외 문학상을 수상했다.
ㅣ인문정신, 왜 중요할까
Q.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공지능(AI), 소외, 인구소멸 등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여 많은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과거와 현재, 어떤 변화를 보시는지요?
인간의 불안과 공포는 시대를 막론하고 경험하는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과거에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신에 의지해 해결했습니다. 현대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러한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중심을 잃고 집단적인 흐름에 휩쓸려가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양심과 정의감이 약화되었죠. 이런 변화는 인문정신의 약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Q. 이럴 때 자기 주체성을 확립하고 이렇게 휩쓸리지 않으려면 인문정신이 매우 중요할 텐데요. 인문정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인문정신이란 자기 발견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과 긍지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느끼는 행복감이 인문정신의 핵심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행복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유명해지기 위해 시를 쓰는 사람과 자기 내면의 진정한 필요에 따라 시를 쓰는 사람의 만족감은 다를 수밖에 없죠. 모든 분야에서 그렇습니다.
Q. 그렇다면 인문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삶에 대한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감도 증진되죠. 문인으로서 저는 이러한 행복을 주는 교육의 근원이 언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Q. 언어 교육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문교육의 출발점이자 마지막 종착점이 언어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언어라는 의미이지요.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는데, 그 이름이란 것은 그 사람이 사용하고 기록한 언어를 뜻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국민의 문화적 수준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아름답고 교양 있는 언어를 말하기 위해서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감각과 사유, 독서가 필요하지요.
Q. 우리 사회 전체에 인문 정신이 스며들게 하기 위해 인문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공교육에서 인문교육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정신적 결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신이 배고프면 그것을 채우고 싶어 하기 마련이에요.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거나 토론을 하면서 말이죠. 한국이 문화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인문교육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인문교육은 분야를 넘나듭니다. 과학자가 시를 읽고 창의적인 사고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고, 시인은 과거 유물을 보면서도 영감을 받고, 화가는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이런 상호 발전적인 순환 회로를 만드는 것이 인문정신을 강화하는 중요한 전제입니다.
Q. 그 순환회로를 만들기 위해 교육의 방향도 바뀌어야겠네요?
맞습니다. 기능 교육보다는 통합 교육을 지향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기능 교육과 함께, 그것이 전인 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교육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Q. 하지만 당장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요구에, 인문정신은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훌륭한 음악은 크고 두드러진 소리보다 배경에 깔린 낮은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더 깊이 움직이곤 합니다. 인문정신도 바로 그런 낮은 소리와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큰 소리만 시끄럽게 들리는 소음이 난무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진실한 언어가 소통되고 공유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Q. 긍지를 많이 언급하시는 것 같습니다. 긍지, 어떤 면에서 가질 수 있을까요?
요즘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나라의 위상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2023년에 프랑스의 몇몇 대학을 방문했는데, 파리와 마르세유의 대학에서 프랑스인들이 한국 시를 읽고 기뻐하고 울기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프랑스어가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어가 멋지다고 느낍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면, 예전에 BTS가 공연을 할 때 외국의 한 음악 평론가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단지 기능적, 기교적인 춤과 노래가 아니라 그 안에 잠재된 열정, 즉 신바람을 봤기 때문입니다. 또, 외국 가수들이 한국에서 공연할 때 관중들이 함께 부르는 떼창에 놀라기도 하는데요. 2002년 월드컵 때 온 국민이 거리로 나와 열정적으로 응원했던 것, 1979년 부마민주항쟁 때 학생들이 반독재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고, 동네 어린이들과 부모들까지 함께 나와 마산 시내가 완전히 마비되었던 광경을 지켜 보았는데 그 열정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있습니다. 내면에 잠재된 그 에너지가 분출되면 한국 사람들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역동성을 지닌 민족이에요. 이미 가지고 있는 이 에너지를 긍지로 되찾아야 합니다.
ㅣ역사 속에서 발견한 긍지
Q. 역사 속에서 우리가 긍지를 가질 만한 사례엔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신라의 삼국 통일을 들 수 있습니다. 삼국 통일이라는 꿈의 기틀은 신라의 무열왕으로부터 시작되어 문무왕 시대에 완성됩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알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무왕릉비에는 자신들이 북방 민족 흉노의 왕족 출신인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중국과 대륙에서 한나라 무제와 중원을 놓고 쟁패를 다투었던 김일제의 후손이었던 까닭에 삼국 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백제와 고구려를 함께 멸망시킨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할 야심을 드러냈을 때입니다.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는 당의 20만 대군을 격파하였고,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는 당나라의 설인귀 부대를 물리쳤습니다. 이를 통해 문무왕은 당나라를 물리치고 독자적으로 통일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후 한반도의 국가적 정체성을 위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고구려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고구려는 중국의 당 태종이 직접 나서서 정복하려 한 동북아시아 강대국이었습니다.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패배한 당 태종은 죽기 직전에 “다시는 고구려를 정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합니다. 고구려는 중국이 가장 두려워했던 나라 중 하나였고, 그 강역이 장수왕 시대에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 중국은 동북 공정을 통해 이런 부분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려고 한 것은 역사 조작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Q.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현재 우리의 정체성과 미래의 방향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시는지요? 인문정신은 이런 사건들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고 적용하게 할까요?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은 인문정신의 기반을 다지고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과 고구려의 강력함 같은 역사적 사례들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이해하고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성취를 자긍심으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도전에 자신감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인문정신은 이러한 역사적 유래와 깊이를 인식하고, 그로부터 얻은 지혜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죠. 그것은 곧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일원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의미 있는 대화와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힘을 제공하게 됩니다.
Q.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자산들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민족에게는 이미 증명된 많은 역량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 미술의 반가사유상은 매우 아름답고 고요하며 독창적인 미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유교 또한 성리학이라는 심오한 철학으로 발전시켜 동방 예의지국이라고 자부할 만큼의 나라였습니다. 무엇보다 한민족의 위대성은 독창적인 문자, 즉 한글을 만든 것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는 디지털 시대에 매우 적합합니다. 한국어는 다른 언어보다 속도감 있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한류의 핵심에 한글이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장점이지요. 우리가 가진 장점을 계발하고 보편화하는 것이 인문교육의 기본이고, 이걸 통해 현 사회의 여러 부정적인 징후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ㅣ인문정신과 창조활동, 그 풍요로운 힘
Q. 그렇다면 부정적인 징후들을 맞닥뜨린 현 시대에, 인문정신과 이를 표현하는 창조활동은 개개인에게 어떻게 힘을 줄 수 있을까요?
인문정신은 개인의 자기 존재감을 회복하는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이것을 상실하면 아무리 외적으로 성공해도 내면의 결핍이 있고, 깊이 있는 관계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문정신은 개인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스스로의 정체성과 긍지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과 표현 방식을 개발하게 됩니다. 창조활동은 이러한 개인의 발견을 실제적인 형태로 전환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예술, 문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함으로써 개인은 자신의 내면적 가치를 외부 세계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이죠.
Q. 모든 사람이 다 창조자, 창작자가 될 수는 없을 텐데, 개개인들이 어떻게 창조활동으로 인문정신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요?
공유하고 함께하면 모두가 그 창조과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시작한 생각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그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거죠. 이런 면에서 창조성이나 인문정신은 함께하는 정신입니다. 혼자서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쓰고, 공유하고, 나누고, 함께해서 더욱 확장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문화민족이 되고, 문화민족이 되면서 세계를 선도할 수 있게 되지요.
Q. 그렇다면 이러한 개개인의 창조활동은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사회적으로 보면, 인문정신과 창조활동은 문화적 다양성의 뿌리입니다.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창의적으로 표현할 때, 국가나 사회 공동체 내에서 새로운 시각과 다양한 아이디어가 풍요롭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는 폐쇄성을 벗어나 역동적이며 혁신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창조적 활동은 경제적 발전에 근본 토대를 만들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산업과 직업을 창출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증폭시킵니다. 창의와 혁신이 없다면 국가의 미래도 없습니다.
인문정신은 예술, 기술,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창의적 발전의 원동력입니다. 한국은 최근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여러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인문교육을 통해 과도기적 혼란을 극복하고 한국인으로서 자존감을 확립하여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국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국민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 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인간 교육의 근간이 되는 인문정신의 고양이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개방적이고 선진적인 국가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문정신과 창조활동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다가온 인공지능 시대의 문을 여는 창조적 열쇠는 인문정신이라는 심도 있는 자각이 절실합니다.
'시대가 묻고 인문이 답하다' 기획 인터뷰
➀ 행복의 빈도를 높이는 방법 - 최인철 교수
➁ 새로운 시대의 탄생 - 최동호 시인 현재 글
➂ 인공지능 시대를 위한 새로운 문화 - 이중원 교수
➃ 인간과 인공지능의 건강한 관계 - 김재인 교수
➄ 인문학을 접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 - 한덕현 교수
이진경
인터뷰 · 정리
KBS, EBS, CBS 방송작가로 일했고, 작가 및 프리랜서 출판 기획 편집자로 일해오고 있다.
지은 책으로 <희망의 속도 15km/h- 폐암 4기 김선욱의 180일 국토 종단기>(민음인), 다큐멘터리 방송을 책으로 옮긴 <EBS 다큐프라임 생사기획 대탐구 “죽음”>(책담), <EBS 다큐프라임 “감각의 제국”>(생각의길) 등이 있다.
시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경남대석좌교수, 인문정신문화진흥심의회 위원장.
1948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76년 첫 시집 '황사바람'이 간행되었으며,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당선하였고, 같은 해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되었다. 시집에 '공놀이 하는 달마', '불꽃 비단벌레', ‘경이로운 빛의 인간’, ‘생이 빛나는 오늘’ 등이 시론집에 ’현대시의 정신사‘, '시 읽기의 즐거움',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 '진흙 천국의 시적 주술' 등이, 편저에 '정지용사전' 공편 '소설어 사전' 등이 있다. 김환태평론문학상, 편운문학상, 대산문학상, 고산 윤선도 문학상, 박두진 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미국에서 제니마 문학상, 이탈리아에서 ‘유로파 인 베르시(Europa in versi)’의 ‘올해의 시인상’ 등 국내외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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