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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내 아들의 연인>

- 소설×인문 -

심영섭

2022-09-29

리드문

 

 

1

소설<내 아들의 연인>책 표지/정미경/문학동네 (출처: 알라딘)



가난이란 무엇인가

 


‘추워 보이는 얼굴이다.’ 아들의 여자친구 사진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촌스럽다 하고 아들은 사랑스럽다고 하는 그녀의 이름은, 도란. 아들은 고백한다. 도란이네는 가난하다고. 엄마 기준으로 가난한 게 아니고 “찢어지게 가난하다”고. 컨테이너에, 무허가 집들이 모여 있는 그런 데 산다고. 나는 아들의 안목과 심성을 믿지만, 그렇기에 마음이 복잡하다. 도란이는 괜찮은 애일 것 같아서. 그런 괜찮은 애를 가난하다고 꺼리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 들어서.


도란이를 만나고 온 나는 반듯한 애 같지만 추워 보인다고 남편에게 말한다. 이질감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일상적인 장소를 도란이가 불편해한다는 느낌. 도란이는 나의 세계에 속하지 않으며, 속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래서 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또 어디에서 그런 느낌을 받나. 같이 간 백화점에서 도란이는 내가 보던 아가씨들과 다르다. “무얼 입혀 놓아도 때깔이 나지 않”고, 나는 도란이를 업신여기는 판매원의 표정을 보고는 기분이 상한다.


아들과 도란이는 다툰다. 아들의 일기장을 보고 유추한 정황은 이렇다. ‘청담동’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하면 불편해하고, 옷차림도 너무 처진다. 아들이 해주고 싶어도 도란이는 받지 않으려 하고, 다투다가 도란이는 “넌 울트라 부잣집 아들이구나”라고는 입을 닫는다. 나는 나를 똑 닮은 아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식당의 테이블에 크리넥스가 아닌 두루마리가 있으면 얼굴을 찡그리는 아이. 나를 닮은 딸은 이렇게 말한다. 둘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계층의 문제가 있다고, 컨테이너에 사는 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고.


결국, 그들은 헤어진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내 마음도 복잡했기에. 도란이에 대한 안쓰러움과 우울한 안도감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었기에. 나는 이렇게 독백한다. “현이, 넌 걔의 가난이 싫은 거야. 간단한 얘기 복잡하게 하지 마라.” 이건 복잡한 이야기인가?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인가?



한은형/소설가

2012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거짓말』로 제20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를 썼으며 테마 소설집 『도시와 나』, 『안녕, 평양』 등에도 작품을 실었다. 에세이로는 『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우리는 가끔 외롭지만 따뜻한 수프로도 행복해지니까』, 『오늘도 초록』,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 등의 책을 썼다.



- 정미경의 <내 아들의 연인>에 대해 -

 


‘혼자 남으면, 왜 집이 텅 비어 있다는 생각이 들까.’ 소설 <내 아들의 연인>의 화자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나’로 등장하는 그녀는 스스로를 연기처럼 슬그머니 사라질 듯하고, 판독하기 힘들만큼 흐릿하다고 자신을 묘사한다. ‘황사를 뒤집어 쓴 내 차는 제 색을 잃고 누르죽죽하다’는 서술은 사실 그녀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은유적 묘사일 것이다.


행간을 통해 읽어 보자면, 그녀는 현재 강남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부로, 명문대 석사 출신의 영문학 전공자로 보인다. 이제는 중년에 들어선 그녀는 시간이 되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쾌적하고 딱 맞는 온도의 마사지실에서 향기로운 오일로 전신 마사지를 받는 것으로 하루를 소일한다. 그녀는 일견 안락한 강남 주부의 삶, 그 자체를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안 거울 속의 모습은 피곤하지 않으나 생기 없는 얼굴, 아무 갈망이 없어 가난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 앞에 어느 날, 도란이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두 글자의 이름을 가진 여성. 남편 역시 이름이 없이 남편으로 등장하고, 아이들은 한 글자로 명, 현으로 불리우는데 반해, 도란만은 또렷이 그 이름을 소설 전반에 각인시킨다. 그만큼 도란은 나에게 인상이 깊었던 여성이었다. 도란은 내 아들이 사귀는 여자이다.


아들 현은 같은 대학에 다니는 도란에게 완전히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엄마 도란이가 엄마 도란이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아마도 ‘도란도란’이라는 단어에서 작가가 따온 것으로 보이는 이 이름은 따뜻하고 정겨움을 불러일으키지만, 또한 가난이라는 계급의 문제를 화자에게 환기시켜 준다. 도란은 가난해도 너무 가난하다.


아들 현은 이에 대해 “엄마, 걔네 집 가난해요. 그냥 엄마 기준으로 가난한 게 아니라 찢어지게 가난하다구요. 걔 컨테이너에 살아요. 무허가 집들 모여 있는, 그런데서 살아요.”라며 압축해서 도란이 가난하다는 것을 나에게 천명한다.



소득차이

소득차이



소설에서 아파트와 컨테이너는 현과 도란이라는 두 연인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해주는 시각적 이미지로 기능한다. 공중에 뜬 컨테이너 상자인 아파트와 컨테이너는 동일한 사각형의 이미지를 지녔지만, 그것의 사회적 기호는 천양지차의 의미를 지닌다.


화자가 도란을 백화점에서 처음 만났을 때, 썩 안기는 얼굴은 아닌 좀 추워 보이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손수 뜬 인디언 핑크빛 모헤어사로 뜬 목도리를 선물 받자, 살냄새가 나는 선물에 마음이 아련해지고, 뱃속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이 소설에서 도란은 주인공에게 가장 원초적인 감각인 촉각을 느끼게 해주는 인물이다. 그만큼 사람 냄새가 나는 여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도란은 박사 학위 과정을 밟으며 자신의 길을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헤쳐 왔을 것이다. 뭔가 아련하면서도 끌리는 구석이 있는 도란에게 나는 역경을 지나온 신산함도 함께 본다. 돈을 크리넥스 티슈처럼 뽑아 쓰는, 이 동네 아이들, 특히 딸 명과는 영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도란은 주인공 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내가 두려워했고, 막연한 앞날을 피하려 했기에 결혼할 수 없었던 여드름 투성이의 초핀이라는 남자애와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농활을 같이 간 초핀과의 기억은 소설에서 유일하게 웃음과 색깔과 즐거움 이 넘쳐나는 장면을 만든다. 쇼팽을 잘못 발음해서 얻은 별명인 초핀, 그와 나는 지구위의 모든 비구름을 단숨에 몰아낼 듯 활짝 웃었고, 두 장에 오천 원 하는 티셔츠를 고르기도 했다. 인조 향기인 마사지실의 향기와 다른 땀 냄새를 맡았고, 껍질째 복숭아를 씹어 먹고, 비를 맞은 후 각자 옷을 짜서 입을 때는 미친 듯이 웃어 대었다. 그곳은 성적 긴장감과 즐거움과 충동성이 허락된 세상이었다.


초핀에 비해 화자의 남편은 검은 덩어리, 태엽 인형 두 개, 수전노로 묘사되어 진다. 단순한 경제적 논리와 속물성으로 점철된 그는 길에서 차가 막히면 ‘골치 아프게 도로 늘리고 할 거 뭐 있어. 휘발유 리터 당 만원만 받아봐. 길거리에서 차 구경하기 어려울 텐데.’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돈 버는 일 외에는 상상력이 황폐하고 자본의 힘에 기대어 우월감을 성취한다.


아들 현은 도란과 “당장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싫어지면 내일이라도 헤어진다구요. 근데 걔가 가난하다고 헤어지는 일은 없어요.”라고 선언한다. 의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점점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균열들이 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긴 해도 두루마리 화장지가 식탁에 올라 있으면 비위가 확 상하는 취향과 태도의 문제가 수반된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도란과 부잣집에서 태어난 현은 한쪽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또 한쪽은 무언가를 잘해서 지금의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

가난



가난은 유희와 삶의 즐거움을 빼앗고 도란에게 생존에 대한 무거움과 심각한 존재론적 성찰로 이끈다. 아들 현은 도란이 살고 있는 무허가 컨테이너 건물이 적어도 자기의 연인이 지내기엔 끔찍한 장소라고 단정 짓고 끊임없이 도란을 거기서 끌어내려 한다. 현으로서는 청담동에서 저녁 먹을 때 도란의 옷차림이 친구들에 비해 처지는 것이 견딜 수 없다. 단둘이 있을 때면 도란이의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 있는데, 네트워크 속에서는 끊임없이 부딪친다.


왜냐하면 현은 도란을 원하지만 도란의 가난까지 1+1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담동과 강남이라는 자신의 세계, 그에게는 세계의 중심 같은 이곳에서 이동하지 않고 도란만을 리모컨 당기듯 자신이 세계에 편입시키고자 한다. 도란은 그러한 현의 자기중심적 행동에 저항한다. 아마도 현은 단 한 번도 도란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짜장면을 먹어 본 적이 없었으리라. 현은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 세계가 변화하지 않았으면 하는 보수적인 생각, 거의 공기 같은 보수성과 자기 중심성을 뒤집을 생각이 없는 것이다.


화자는 결혼 문제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고 도란과 좋은 관계를 맺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컨테이너라는 말이 무의식에 박힌 듯, 도란에게 호감이 가지만, 뭔가 껄끄럽고 이질감도 든다. 화자의 윤리의식은 여기까지이다. 도란이나 아파트 경비원에게 드러나게 갑질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부자라고 뻐기는 것도 아니다. 적극적인 갑질이나 도덕적 결함으로 부의 오만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편을 들지 않는 은밀한 침묵으로 안온함을 지켜나간다.


예를 들어 주인공은 주차장에서 옆집에 방문한 여자가 벤츠의 백미러를 치고 도망치는 것을 보지만 침묵으로 일관한다. 벤츠의 운전자인 최기사가 백미러 수리비 이백만 원을 물어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남편은 “정 불쌍하면 네 돈으로 봉투 하나 해서 익명으로 전해 주던지”라고 일갈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 대신 자신의 죄책감을 취소하고픈 행동이 기껏해야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윤리적 선택일 것이다.


도란과 헤어질 결심을 한 아들의 심중을 이미 나는 눈치채고 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현이 도란과 헤어지자 화자는 ‘왜 버림받은 게 나인 것처럼, 마음이 축축하고 추운지 모르겠다’고 읊조린다. 도란이는 화자에게 찬란한 생의 가능성을 일깨워준 존재로, ‘어쩌면 한 권태로운 여행지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있다 우연히 찍게 된 유에프오 같은 존재’로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시종일관 소설에서 무의식적으로 도란에게 끌리는 보인다. 도란은 화자의 그림자 자아 같은 존재이기에. 본능적으로 화자도 갖을 수 있었으나 포기해 버린 주체성을 도란에게 엿 보며, 아들이 도란과 헤어지자 안도감과 동시에 아쉬움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돈이 문제가 아닌 척 하지만 사실은 가난이 문제라는 것을. “현이, 넌 걔의 가난이 싫은 거야. 간단한 얘기 복잡하게 하지 마라. 어릴 때부터 변기까지 들여다 우리 아기 예쁜 똥 미운 똥 들어가며 키운 내 자식인데 그 속을 내가 모르겠니.”


소설의 마지막은 마치 스스로에게 마취를 거는 듯한 주인공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마사지실에 드러누워 등에 돌을 얹고 있는 나는 도란이와의 다정했던 시간도 백미러의 파열음도 언젠가는 오래전 채집된 식물처럼 바스러질 것을 믿는다. 자본은 힘이 세고, 도란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도 다시 자본의 힘으로 마취하고 망각한다.


기억은 힘이 세지만, 기억을 잊고 싶어하는 힘은 더 힘이 센 법이다.

 





[소설 x 인문] 정미경 <내 아들의 연인>

- 지난 글: [소설 x 인문] 김애란 <가리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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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 대구사이버대학교 교수 사진
심영섭

대구사이버대학교 교수, 상담센터사이 대표
66년 서울 출생. 1998년에 <씨네 21>로 등단해서 영화를 보고 평론하는 일을 해 왔고, 지방의 사립대(사이버대)에서 상담 심리학과 교수 생활을 병행해 왔다. 심영섭은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했다는 뜻의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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