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인문360인문360

인문360

인문360˚

예술이 뭐라고 : 추억을 요리한 음식

박병성

2017-07-18

추억을 요리한 음식

 

의식주. 살아있음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들 중 식(食)은 인류가 발전함에 따라 먹을거리의 유무보다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먹을 것인가를 더 중요히 여기는 흐름에 놓였다. 최근 혼술, 혼밥, 혼식이 유행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향하고 있지만, 혼밥을 하면서도 우리는 SNS나 다양한 개인 미디어를 통해 사이버 공간 상 불특정 다수와 식문화를 나누려고 한다. 가족을 의미하는 다른 말인 식구(食口)는 한자에서도 드러나듯이 먹는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뜻한다. 먹을 것을 나누는 것은 사회 구성원 간의 친밀감을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자신 또는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 만드는 ‘요리’는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본질적이고 사회적이며, 독립적으로는 그 자체로 예술 행위인 요리는 인간의 삶을 소재로 하는 공연에서 당연히 인기 아이템이어야 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만화를 비롯한 웹툰, 드라마, 영화 등의 시각매체에서 음식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 인기를 끄는 데 비해 공연에서는 그러한 경우가 드물다.

 

재현의 한계

 

테이블 위의 음식

 

최근 들어 요리는 방송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신선한 식재료가 주는 비주얼적 재미도 있거니와 그것을 다루는 요리사의 손놀림, 그리고 비린 냄새나 짠맛 등 식재료가 가진 단점을 무마하기 위한 다양한 요리 기술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든다. 물론 그 완성된 음식을 먹어볼 수 있다면 더욱 바랄 게 없겠지만, 출연한 패널들의 시식 반응을 지켜보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인다. 음식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 등의 영상물에서는 이러한 요리 과정이 주는 매력을 십분 활용한다.

 

뮤지컬 <대장금> 포스터

 

뮤지컬 <심야식당> 포스터

 

그러나 싱싱한 식재료를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요리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주는 클로즈업이 불가능한 공연에서는 요리를 다루는 것이 쉽지 않다. 요리를 주요 소재로 다룬 드라마 <대장금>이나 <심야식당>이 무대화되었지만, 원작에서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주는 만족도를 어느 정도 포기하고 무대 버전에서는 새로운 흥미거리를 제시해주어야 했다. 뮤지컬 <대장금>은 요리 경연 대신 궁중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권력 다툼에 집중해야 했고, 뮤지컬 <심야식당>은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보다 추억의 음식 자체에 집중하여 그것을 나누면서 잠시나마 회복되는 공동체적 연대감을 강조했다.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포스터

 

공연에서 요리 과정 중 어필할 수 있는 요소는 음식 냄새이다. TV 프로그램에서는 비주얼을 통해 요리 과정을 보여주고 음식을 상상하게 한다면, 공연에서는 공연장에 은은히 퍼지는 냄새를 통해 음식이 주는 풍미를 어필한다. 얼마 전 공연을 마친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와 지오그래픽 사진작가 로버트를 가깝게 해준 매개체는 요리였다.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인 프란체스카는 수만 평의 옥수수밭이 펼쳐진 아이오와 주로 이주해 10여 년을 살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는 인물이다. 드립 커피를 즐기고 그림이 취미인 그녀를 마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다리 사진을 찍기 위해 온 로버트는 그녀에게 모처럼 말이 통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로버트에게 평범하지만 고향의 향을 담은 야채 스튜를 대접한다. 이들은 저녁을 함께 즐기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금지된 선 앞으로 다가가게 된다.

 

공연에서 야채 스튜는 매우 중요하여 이것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하기 위해 무대에서 실제 요리를 한다. 샐러리와 양상추, 당근, 사과, 초코빵 등 다양한 식재료가 사용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냉동된 버터와 다진 마늘, 양파, 옥수수 크림이다.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냉동 버터를 넣으면 열에 녹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버터 냄새가 객석으로 퍼진다. 버터 냄새를 더욱 사실적으로 만드는 것이 다진 마늘과 양파이다. 다진 마늘과 양파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부하고 강하게 한다. 요리하는 냄새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며 마음을 나누게 될 미묘한 감정의 변화들을 예시해준다.

 

이처럼 공연에서 요리 과정은 주로 냄새에 집중해서 표현된다. 뮤지컬 <락시터>에서 컵라면을 먹는다거나, 뮤지컬 <오디션>에서 복스팝 멤버들이 우정을 다지기 위해 삼겹살 파티를 한다거나, 또 이런저런 공연에서 스테이크를 굽는 등 밀폐된 공간에서 음식이 주는 음식 냄새를 통해 추억이나 마음의 교류 등 친밀한 감성을 일으킨다.

 

냄새를 통해 음식에 관한 공동체적 감성을 환기시킬 수 있다는 것이 영상 매체에서는 하기 힘든(요즈음은 4D 영화에서는 냄새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요소이지만 이마저도 무대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비용과 위험이 따른다. 제한된 무대 공간에서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식재료뿐만 아니라 이를 조리할 화력, 다양한 요리 도구들, 요리에 필수적인 물 등 시설이 갖추어져야 한다. 조리실로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공연이 아니라면 이러한 요소들을 넣고 빼고 하기가 쉽지 않다. 음식과 요리가 사람들의 교류에 긴밀하고 인간에게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자주 다루지 못하는 데에는 이런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가지(Eggplant) 아닌 가지(Aubergine) 포스터

▲ 가지(Eggplant) 아닌 가지(Aubergine)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공연 중 음식 또는 그것을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공연은 매우 드물며, 다룬다고 하더라도 음식이 주는 함의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국립극단이 디아스포라전에서 선보인 <가지(Aubergine)> 역시 그런 작품이다. 국립극단은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2세 작가들의 다섯 작품을 선보인다. 한국인의 외모를 하고 있지만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나고 자란 그들의 작품에는 경계인의 면모가 드러나기도 하고, 때론 그저 외국 작가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경계인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가지> 역시 한인 2세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보다 보편적인 감성을 담은 작품이었다.

 

연극 <가지>의 한 장면 01

▲ 연극 <가지>의 한 장면 © 국립극단

 

<가지>는 음식을 매개로 삶과 죽음, 인간의 관계를 성찰한다. 작품 속 주인공은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레이’이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고 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도 돌려보낼 정도로 위독한 상태였다. 레이는 요리사였지만 아버지는 아들 레이가 요리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레이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다. 요리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날 레이는 들뜬 마음에 배워온 수십 가지 요리를 아버지에게 선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든 요리에 같은 반응이었다. “흥미롭군.”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것은 그날 저녁 아버지가 몰래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을 목격했을 때였다. 그 이후 레이는 아버지에게 음식을 대접하지 않는다. 생각의 차이는 관계를 소원하게 했고, 그런 과정이 길어지다가 레이는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연극 <가지>의 한 장면 02

 

연극 <가지>의 한 장면 03

▲ © 국립극단

 

작품에는 여러 요리가 등장한다. 아버지와 갈등으로 관계가 멀어진 한국의 삼촌이 위독하다는 전화에 한달음에 재료를 가지고 날아와 레이에게 만들라고 하는 자라탕이나, 레이의 여자친구 코넬리아에게 레이가 대접한 오디, 그리고 이민자 출신의 간병인인 루시앙의 고향의 가지(Aubergine)로 만든 수프 등이 그것이다. 이 음식들은 평범하지만 저마다 추억과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이들에게는 최고의 음식으로 기억된다. 작품의 제목 ‘가지’가 흔히 쓰는 ‘Eggplant’가 아니라 루시앙의 고향에서 나는 작은 가지를 의미하는 ‘Aubergine’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음식은 그 자체를 떠나 그것을 함께 나눈 사람, 그것과 얽힌 추억 때문에 특별해진다. 작품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는 식도락가 남편과 함께 세계 여행을 다녔던 다이앤의 이야기를 배치했다. 전 세계를 돌며 가장 맛있는 요리를 먹었던 그녀를 가장 감동시킨 음식은 아버지가 늘 만들어준 단지 두 개의 식재료만이 사용되는 파스트라미 샌드위치였다. 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를 방문했을 때 늦은 밤 만들어주신 파스트라미 샌드위치, 그것이 미식 탐험가 다이앤에게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연극 <가지>의 한 장면 04

▲ © 국립극단

 

레이는 자라탕 만들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마음을 바꾼다. 하지만 레이의 생각대로 아버지는 자라탕을 넘길 힘이 없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자라탕으로 인해 거의 처음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언어도 통하지 않는 삼촌과 친밀해지고, 아버지와 색다른 추억을 만들었다. 자라탕은 레이, 아버지, 삼촌, 그리고 통역으로 이 가족의 문제에 끼어들고 마는 레이의 여자친구 코넬리아에게는 잊지 못할 음식으로 남을 것이다. 요리한다는 것은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과 추억을 나누는 일이다.

 

춤추는 일러스트

 

  • 대중문화
  • 7월
  • 음식
  • 예술
  • 추억
  • 재현
  • 음식냄새
  • 연극 가지
  • Aubergine
필자 박병성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장으로 있다.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160여 년간 발전시켜온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판소리를 세계적이고 모던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활용한 극에 관심이 많다. 공연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각종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공공누리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예술이 뭐라고 : 추억을 요리한 음식'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댓글(0)

0 / 500 Byte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