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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순절

- 열두 달로 알아보는 역사 이야기 -

함규진

202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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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의 정부와 군주들은 자국민의 장렬한 순절 신화를 부풀리고, 널리 보급했다.

군대의 사기와 충성심이 승패의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도 권력자에게 순종하도록 종용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런 신화에는 여성들의 순절 이야기도 따랐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라고 한다. 외국에는 그런 의미가 비교적 적으나, 한국의 경우 현충일과 6.25가 이달에 들어 있다. 현충일이 6월 6일로 지정된 것은 1956년인데, 24절기의 하나인 망종(芒種)이 대체로 이날에 들며 1019년, 거란의 침략군을 살수에서 물리친 뒤 망종 때마다 순국한 병사들의 혼을 위로하는 행사를 가져온 것이 그 유래라 하니 한국인이 6월에 순절자를 추모하는 전통은 매우 독특하면서 유구한 것이다. 2010년에는 6월 1일이 ‘의병의 날’로 정해지면서 그 의미가 더 깊어졌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최초의 의병을 일으킨 날이 1592년 음력 4월 22일인데, 이를 양력으로 따져 보면 6월 1일이라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ㅣ장렬한 죽음과 희생, 그 오랜 역사

 

나라를 위해, 또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충신열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근대 동서양에 숱하게 있다. 기원전 480년에는 테르모필레 전투가 있었다. 당시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백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직접 이끌고 그리스 정복전에 나섰다. 이에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그들을 맞아 싸웠다. 페르시아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협곡의 지리적 유리함과 감투 정신을 최대한 활용하던 그리스군을 좀처럼 무찌르지 못했다. 결국 그리스 쪽의 배신자, 에피알테스의 안내로 협곡의 고갯길을 이용해 측면에서 그리스군을 급습한 페르시아군이 사흘 만에 방어선을 뚫었고,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수비군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가 전멸했다. 이 장렬한 싸움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다. 이후 테르모필레에는 시인 시모니데스가 그들을 기리고자 쓴 시의 비석이 섰다. “지나가는 길손이여,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해주오. 그대들의 명령을 따라, 우리 여기 잠들어 있다고.”

 

테르모필레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

 

기원후 73년, 역시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최후까지 압도적인 적에 항거하고, 모두 목숨을 잃었던 신화가 지금 이스라엘의 마사다에서 이루어졌다. 66년부터 벌어진 제1차 유대 전쟁에서 로마군은 유데아를 장악하고, 마지막으로 마사다에서 농성 중인 유대인들을 진압하려 했다. 유대인들은 수백 명, 로마군은 수천 명이었으나 좀처럼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으며, 결국 요새의 높이와 같은 거대한 성채를 완성한 약 1년 뒤에야 로마군은 마사다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는 960명의 차디찬 주검만 있었다. 포로가 되느니 집단자살을 선택한 것이었다. 현대에 이스라엘이 건국된 뒤 이 요새는 국가 성지로 여겨졌고, 이스라엘 군은 신병이 훈련을 마치면 이곳에 올라 선서를 하도록 한다.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마사다 지역

마사다 지역

 

다시 약 7백 년이 흐른 778년에는 지금 스페인의 론세스바예스 계곡에서 또 하나의 장렬한 전투가 있었다. 서로마의 멸망 후 오래 침체해 있던 서유럽을 하나로 묶고, 사방의 이민족, 이교도를 물리쳐온 샤를마뉴의 프랑크 군. 그 일부 병력이 적의 기습을 받았고,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휘관 흐로들란드는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의 이름은 훗날 프랑스식 발음으로 ‘롤랑’이라 불리며, 중세 유럽 기사도 문학의 으뜸인 『롤랑의 노래』에서 장렬하게 묘사된다. 그 서사시에 따르면 최고의 영웅이던 롤랑이 기습당한 것은 배신자 가늘롱의 책략 때문이었고, 롤랑은 적장의 팔을 베고 외아들을 죽이며 분전하다가 최후의 순간에 뿔피리를 분다.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샤를마뉴가 적군을 물리쳤지만 롤랑은 자신의 칼에 기대어 선 채로 죽어 있었다. 죽을 때도 당당히 승자의 모습으로 죽으리라던 평소의 말을 실천한 것이라고, 샤를마뉴는 그의 시체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고 한다.

 

롤랑의 노래 여덟 장면을 묘사한 그림 (이미지 출처: Grandes Chroniques de France, St. Petersburg, Ms. Hermitage. fr. 88: (Niederl. Burgund, Mitte 15. Jh., Exemplar Philipps des Guten), folio. 154v)

<롤랑의 노래> 여덟 장면을 묘사한 그림

(이미지 출처: Grandes Chroniques de France, St. Petersburg, Ms. Hermitage. fr. 88: (Niederl. Burgund, Mitte 15. Jh., Exemplar Philipps des Guten), folio. 154v)

 

한국인이라면 660년에 벌어진 황산벌 전투를 알고 있다. 적어도 들어는 보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백제를 위해 싸우고자 자신의 처자를 죽이고 전장에 나선 계백. 그들의 결사 항전에 당황한 신라군이었으나 어린 화랑, 관창이 분위기를 바꾼다. 그는 앞장서서 싸우다 사로잡혔는데, 계백이 너무 어리다며 그를 놓아주자 다시 돌아가 싸우다가 전사한다. 이를 보고 신라 군도 결사항전의 사기가 올라, 마침내 계백 이하 백제군을 몰살시키고 사비성으로 진군해 백제를 멸망시킨다.

 

계백 장군의 황산벌 전투 (이미지 출처: 전쟁기념관 아카이브)

계백 장군의 황산벌 전투 (이미지 출처: 전쟁기념관 아카이브)

 

 

ㅣ신화의 뒷면에 드리운 그림자

 

순국선열의 이야기 뒷면에는 상당한 허위 내지 과장이 있다. 테르모필레에서 레오니다스가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것은 맞지만, 영화 <300> 등에서 묘사된 것처럼 처음부터 300명만 이끌고 백만 대군과 맞선 것은 아니었다. 테베, 아르카디아 등의 병력이 있었고 스파르타군도 1천 명이 넘었다. 전세가 기울자 병력이 줄줄이 후퇴하는데,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스파르타 일등 시민들 300명은 후방을 지키다가 전멸한 것이다. 양군의 병력 차이는 어떤 추정치로는 2만 명 대 7만 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테르모필레 전투가 페르시아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여겨진다.

 

마사다를 지키던 유대인들도 숭고하게만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시카리’라고 불리는 과격파로, 이들이 기존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반 로마 노선을 취했기에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반대하는 동포 유대인들을 마구잡이로 살육하며 예루살렘을 피로 물들였다. 마사다도 로마에 점령되기 전에 이들 시카리가 기존 수비대(물론 유대인들)를 학살하고 점령했다.

 

롤랑의 노래에서 묘사된 것과는 달리 흐로들란드를 기습한 군대는 이슬람군이 아니라 바스크인들이었으며, 프랑크 군이 스페인을 침공하고 돌아가던 참이었다. 오히려 바스크인들이 침략자를 요격해 승리한 것이 진실에 더 가까웠다. 황산벌 전투도 적어도 그 때문에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통일을 이룬 것은 아니다. 백제는 서쪽에서 쳐들어오던 소정방의 당군에 맞서 싸우는 게 훨씬 중요했고, 계백이 소규모 병력만으로 신라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사비성을 무너뜨리고 백제의 명맥을 끊은 것도 소정방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전근대의 정부와 군주들은 자국민의 장렬한 순절 신화를 부풀리고, 널리 보급했다. 군대의 사기와 충성심이 승패의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도 권력자에게 순종하도록 종용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런 신화에는 여성들의 순절 이야기도 따랐다. 일본에서 순국한 박제상을 하염없이 그리다가 망부석이 되어버렸다는 그의 아내 이야기나, 롤랑의 전사 소식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약혼자 오르르. 그리고 ‘강제 순절’을 치른 계백의 처자식들. 그런데 여성들이 충성을 바친 대상은 국가나 군주가 아니라 남성이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을 읽어 보면 적과 싸우다 순국한 남성들, 그들을 뒤따르거나 적군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ㅣ시민의 시대에도 생겨나는 영웅 신화

 

군주와 귀족의 나라에서 시민의 나라로 바뀐 서양은 이러한 순절 신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 가령 1854년, 크림 전쟁의 와중에 벌어진 발라클라바 전투에서도 나름 장렬하고 용맹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고지대의 러시아군이 일제 사격을 하는 가운데, 영국군의 제93연대가 천천히 적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옆의 동료들이 계속 쓰러지는데도 멈추거나 달아나지 않았고, 전멸할 때까지 묵묵히 행진했다.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이라 불리게 된 이 에피소드는 감투 정신의 사례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어리석은 개죽음’으로도 평가받았다. 진격 명령을 내린 지휘관은 견책 받았다.

 

발라클라바 전투 (이미지 출처: Charge of the Light Brigade, Richard Caton Woodville, Jr.  (1856–1927) Blue pencil.svg wikidata:Q13599544 s:en:Author:Richard Caton Woodville)

발라클라바 전투

(이미지 출처: Charge of the Light Brigade, Richard Caton Woodville, Jr. (1856–1927) Blue pencil.svg wikidata:Q13599544 s:en:Author:Richard Caton Woodville)

 

그러나 근대국가라 해도 과장과 허위가 섞인 순절 신화를 만들고 퍼뜨리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군국주의적인 정부일 때다. 마사다를 기리는 이스라엘도 얼마간 그렇고, 청일전쟁부터 세계대전까지 제국주의 일본은 ‘맨손으로 성벽을 타고 오른 병사’, ‘숨이 끊어질 때까지 군기를 치켜들고 있던 기수’ 등의 신화를 날조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화를 한국의 독재 정권이 ‘표절’했을 가능성도 있다. ‘육탄 10용사.’ 그들은 1949년 5월, 송악산 전투에서 폭탄을 끌어안고 인민군 진지에 뛰어들어 자폭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대한민국 군인의 귀감으로 격찬되고, 영화로 만들어지고 동상으로 세워지고 했다. 그러나 훗날의 폭로에 따르면, 그들은 자폭하지 않았으며 애초에 자폭 시도도 하지 않았다. 박격포탄 보급을 위해 이동 중에 인민군에게 사로잡혔을 뿐이다. 그리고 북한에 투항하여 평양에서 환영까지 받았다고 한다.

 

전쟁기념관 설치 육탄 10용사 부조상 (이미지 출처: 고한빈, 호국인물총서 '6.25전쟁 개전의 순간', 전쟁기념관, 2021)

전쟁기념관 설치 육탄 10용사 부조상 (이미지 출처: 고한빈, 호국인물총서 '6.25전쟁 개전의 순간', 전쟁기념관, 2021)

 

이 폭로 외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10용사의 장렬한 죽음은 ‘대체로 진실’이라고도 하지만, 과연 무거운 폭탄을 짊어지고 접근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는 적 진지였다면 그냥 소총만 들고 가서 제압해도 되지 않았을까. 애초에 육탄 10용사는 1932년, 중일전쟁 당시 자폭으로 적 방어망을 뚫었다는 일제의 ‘폭탄 3용사’와 너무 비슷해 보인다. 일제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일본 본토는 물론 서울(경성)에까지 그들의 동상을 세웠으나, 날조였던 것으로 훗날 드러났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육탄 10용사의 ‘자폭’은 1949년에 있었다는 점이다. 6.25 이전이다. 전쟁이 아닌 소규모 무력 충돌에서, 아직 북한 사람은 우리 동포라는 의식이 짙을 때,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적을 없애야만 한다는 결의가 우리 군인들에게 넘치고 있었을까?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결정은 분명히 위대하다. 그러나 그 어떤 대의도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대하지는 않다. 많은 사람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자진해서 희생한 이들을 기리는 일은 가치가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희생이 혹시 악용되거나 오도되지 않았는지, 인도주의와 민주주의에 비추어 참으로 기억할 만한 것이었는지, 되새기는 일도 가치가 있다.

 

열두 달로 알아보는 역사 이야기

 

 

6월 : 순절

- 지난 글: 5월 : 결혼

 

  •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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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에서 학사에서 박사까지 받았다. 전공은 정치학이지만 역사와 철학에 대해서도 글을 쓴다. 동양과 서양, 보수와 진보 등의 대칭이 대립을 넘어 조화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탐구 중이다. 『조약의 세계사』, 『벽이 만든 세계사』, 『왕의 밥상』,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등을 썼고, 『죽음의 밥상』, 『피에 젖은 땅』, 『공정하다는 착각』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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