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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구요?(feat. 에리히 프롬)

- MZ세대와 함께하는 철학 카페 -

박은미

2022-05-04

인간이 추구해도 좋은 참된 욕망은 자신과 타인의 인간다움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는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실현을 한 뒤에도 허무감이 느껴지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겪는 어려움에만 매몰되기 쉽지만,

더 어려운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면서 사회구성원들의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이 시대를 건강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취업이 힘들고 여러모로 공정의 가치가 흔들리는 시대에서 어떠한 방향을 잡고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A. 욕망에 결정 당하는 삶이 아니라 참된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고민해보세요.

 

무척 반가운 물음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한다면 당연히 묻고 싶어져야 할 그런 좋은 물음입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가 정말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더 정확히는 이 물음이 답을 할 수 있는 물음이기는 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답을 찾을 수 없더라도 그 물음을 포기하지 않고 그 물음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그런 물음이 있는 법이지요. 여하간 철학을 30여 년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인생을 아마도 질문자님보다 2~30여 년은 더 살았을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저의 과정적 결론을 공유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제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셋값 폭등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하는 가장에 관한 기사가 신문지상에 오르곤 했습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부동산가가 들썩이던 시절이었지요. 그때는 부동산 가격이 갑자기 올라서 생기는 소득을 ‘불로소득’이라 칭했었습니다. 노동을 하지 않고 얻는 소득이라는 의미로 ‘좋은 것이 아니다’라는 뉘앙스가 분명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세가를 올리는 집주인들은 미안해하면서 “남들이 다 올리는 데 나만 올리지 않으면...”이라며 말끝을 흐리곤 했습니다. 지금은 부동산을 샀다 팔았다 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을 ‘재테크’라 칭합니다. ‘조물주 위의 건물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동산이 모든 것을 평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부동산 폭등

 

 

벌써 15년도 전 일이기는 합니다만 제가 들은 실화에는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께서 “손님 참 우습죠?”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기사님 말씀으로 10년 전쯤에(지금 기준으로 25년 전쯤에) 자신과 똑같이 1,500만 원을 모은 친구가 있었는데 기사님은 그 돈으로 개인택시를 시작하셨고, 친구분은 갭투자로 건물을 사셨다고 합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갭투자라는 말조차도 없을 때이니 그 친구분은 아주 이재에 밝은 분이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후 자신은 여전히 택시기사이고 그 친구분은 일은 하지 않고 월세만 받으며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듣는 저나 말씀하시는 기사님이나 ‘이건 아니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질문자 님은 지금 공정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모의 도움을 받으며 입시 준비나 취업 준비를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쟁의 결과는 공정할까요? 그러면 결국 부모가 도움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부모의 경제력은 무엇으로 결정되나요? 요즘 청년들이 느낄 때 공정의 가치가 흔들리게 된 주원인은 부동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부터 땅의 주인이 있었을까요? 따지고 보면 조상의 조상의 조상 중에 ‘이 땅은 내 땅’하고 금 그은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후손의 삶이 너무 달라지는 것 아닌가요?

 

저는 누군가가 자신이 판 아파트의 값이 급격히 오르자 억울한 나머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살려고 돈이 필요한 것이지 돈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닌데 말이지요. 물론 살다 보면 돈 때문에 사는 것처럼 살게 되기는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게 힘든 것이지요. 돈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인 것처럼 되어버리면 인간은 뭔지 모를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물질적 향유의 수준을 아무리 높여도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요? 죽으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재산 때문에 가족 간에도 안 보고 살게 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돈은 물론 중요합니다. 저도 원고나 강의를 의뢰받으면 원고료와 강의료를 확인합니다. 그렇지만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않을까요? 우리는 왜 그렇게도 돈을 좋아하면서도 돈이 인생의 전부라는 말에는 ‘무언가 아니다’라고 느끼는 것일까요? 마이클 샌델 교수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돈

 

 

지금은 예전보다 전체적인 물질적 향유의 수준은 올랐습니다. 과거에 20대 청년에게는 자판기 커피가 당연했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친구랑 약속 있을 때만 하는 일이었지요. 지금은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또 그래서 지금은 돈타령을 더하면서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돈만 있으면 누릴 수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보니 돈에 대한 집착이 점점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질적 향유의 수준을 아무리 높여도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누리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소비가 주는 쾌감은 짜릿하지만 소비만으로 인간이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적 향유가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만큼 돈을 가지지 못하다 보니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물질적 욕망을 다 실현시킬 돈이 있어 그 모든 물건을 다 산다고 해도 무언가 자신에게서 빈 공간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물질을 통해서는 지속적인 충족감을 얻지 못합니다.

 

제가 인문학 강의를 다니다 보니 청중 중에서 “사실은 제가 철학에 관심이 많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철학을 해서 먹고살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시는데 경제력이 있으신 분들은 철학에 관심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제력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느끼는 이유가 뭘까요? 제 생각에는 돈만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돈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지만 돈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익을 추구하느냐 가치를 추구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무언가 아니다’라고 느낀다고 했습니다. 이 느낌은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리 안의 센서가 작동해서 일어납니다. 이 센서가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있다고 생각한 철학자가 칸트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마누엘 칸트(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이마누엘 칸트(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칸트는 이익과 도덕은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익을 위해서 한 행위를 두고 도덕적이라고 여기나요? 만약에 어떤 청년 A가 길거리에 쓰러진 노인분을 보살폈다가 알고 보니 그 노인이 어느 기업의 회장이어서 이 청년이 취직을 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청년 B가 매일 부자동네를 돌아다니며 그런 기회를 자신에게 줄 노인분이 안 계시나 하고 살피고 다니다가 어떤 노인분을 돌보게 되었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청년 A의 행동은 도덕적이라고 느끼지만 청년 B의 행동은 도덕적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익을 위해서 한 행위를 도덕적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칸트는 이렇게 우리의 도덕관념에 부합하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익과 도덕은 별 개의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익을 위한 행위도 도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 입장이 바로 공리주의입니다. 최대 다수에게 최대행복(benefit)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도덕적인 행위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익과 도덕이 연결될 수 있다는 공리주의가 현대에는 일반화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칸트처럼 말하면 답답하다고 여기고 자신의 이익을 잘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도덕관념은 칸트적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공리주의적으로 돌아갑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에서 ‘최대 다수’가 인류이면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최대 다수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려하는 행복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인류가 행복해야 행복하신가요, 우리 민족이 행복해야 행복하신가요, 아니면 우리 가족이 행복해야 행복하신가요? 만약에 우리 가족만 행복하면 된다고 여긴다면 이때 ‘최대 다수’는 우리 가족입니다. 그런데 극단적으로는 가족도 아니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것이 공정이다?!

이익과 도덕이 연결될 수 있다는 공리주의 입장을 받아들인 후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에 대해 비도덕적이라는 인식이 없어졌습니다. 이익을 추구해도 되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최대 다수의 범위는 점점 더 좁아졌고 결국 그 범위는 ‘나’ 아니면 ‘우리 가족’에 머무르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리주의가 일반화된 세상에서 공정이라는 가치에 대한 판단은 나의 이익을 보호해주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것을 ‘공정’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개인의 쾌락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조화시키려는 사상이다

공리주의의 정의(이미지출처: yes24)

 

 

사회에서 능력이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능력주의가 공정의 가치로서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그 능력을 보유하게 되기까지 밑받침이 되었던 많은 요인들이 있었음은 의식하지 못합니다. 대학 등록금과 용돈을 벌면서 학점관리를 해야 했던 사람의 학점과 아르바이트는 하지 말고 학점관리를 하라고 지원해주시는 부모님 덕분에 편하게 학점을 관리했던 사람의 학점이 똑같이 비교되는 것이 정당한가요? 더 나아가서 아프신 부모님의 병원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꾸었던 사람의 경우는요? 학원비 걱정 없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과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의 차이는요? 우리는 어쩌면 내가 가진 스펙 중 가장 좋은 조건이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으면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1등이 있으려면 2등부터 꼴등까지가 존재해야

우리는 보통 자신이 누리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주목하게 되니까요. 제가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대학 진학을 꿈도 꿀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회에서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입장에 있는 분들은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을 찾아 읽어볼 시간적 여유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능력이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사회가 유지됨으로 인한 혜택을 남들보다 더 많이 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가져가지 말고 자신을 능력 있다고 여겨주는 사회를 고마워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가져가야 한다고 봅니다. 모두가 1등을 원하지만 2등부터 꼴등까지가 없는데 1등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1등이 1등일 수 있는 것은 2등부터 꼴등까지가 존재해 주기 때문입니다. 1등 기업이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소비자가 존재해서 그 물건을 사주어야 그 기업이 1등 기업일 수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정규직의 높은 연봉은 비정규직의 낮은 연봉 때문에 유지될 수 있습니다.

 

 

등수

 

 

지금 저는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일까요? 요즘 같은 세상에 정말 딴 나라 얘기를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 얘기부터 해보죠. 취업은 왜 힘든 건가요? 일자리가 적어서! 일자리는 왜 적죠? 이 모든 인구가 살아가야 한다면 서비스직이니 뭐니 해서 일자리는 창출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일이 매우 효율적으로 처리되어서! 일이 효율적으로 처리되는 건 왜죠? 기술이 발전되어서! 자 그럼 인류는 기술을 발전시켜서 과로 아니면 실업인 세상을 만들었네요?!

 

누군가는 과로를 하고 그 누군가가 과로로 몇 사람 몫을 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인류는 이러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켜온 것인가요? 제가 캐나다에 방문학자로 체류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야간에도 우체국 병원 등이 문을 엽니다. 물론 교대 근무이지요. 교대 근무로 일자리가 창출됩니다. 만약에 거리마다 경찰이 상주하면서 노인분들 돌봐드리고 범죄행위를 미연에 방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만약에 소년범을 위한 보호관찰관이 지금처럼 200여 명이 아니라 10명 정도의 소년범을 맡아서 제대로 된 돌봄을 한다면 아이들이 불행해서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만약에 심리상담사가 많이 배출되고 심리상담사들이 노인이나 환자들을 전담해서 대화 상대가 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노동시간을 줄여서 모두가 6시간씩 근무하면서 교대 근무로 9시에 출근하는 사람은 3시에 퇴근하고 3시에 출근하는 사람은 밤 9시에 퇴근하는 식으로 운영된다고 해보죠. 그러면 여가 시간에 악기를 배울 수도 있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관람하거나 취미로 배워서 아마추어 무대를 마련해볼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예술가들을 위한 일자리까지 창출되겠네요!

 

돈이 어디서 나냐고요? 돈은 찍어냅니다! 중요한 것은 자원이죠. 농수축산물은 모두 지구의 자원을 활용해서 얻게 됩니다. 지금 인류는 120억 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지요. 전 세계 모든 인구가 먹고도 남을 분량입니다. 그런데도 사망원인의 1/4이 기아입니다. 현재 우리의 생산력은 지구 위의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물건을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교환하기 위한 매체로 돈을 활용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돈이 돈을 버는 현실 때문에 일부에게만 돈이 많이 돌아가 있어서 주인을 찾지 못한 많은 물건들이 공장이나 백화점에서 잠자고 있을 뿐이죠. 그 물건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은 잠 못 들어도 말이지요. 우리는 이런 진실을 보지 못할 만큼 강박적인 소비와 인정욕에 쫓기며 살고 있습니다.

 

 

돈이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닌 편리

이 사회는 우리에게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말하는 시장적 성격의 인간이 되라고 부추깁니다. 시장적 성격의 인간은 시장에서 요구하는 인간형입니다. 스스로를 상품으로 만들고 좋은 상품이 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교환가치로 보려 하지요. 즉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시장에서 어떻게 평가되는가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소득과 재산에 따라서 차별해서 대하려는 태도를 가진 인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형이 일반화되는 것은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부터 도망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습니다. ‘살아간다=죽어간다’ 이지요.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말대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무거운 진실을 직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비로 그 허무감을 잊으려 합니다. 그래서 강박적으로 소비를 하지요. 신상과 한정판이라는 말이 그 허무감을 채워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돈에 과도하게 집착합니다. 돈이 궁극적인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돈이 주는 행복을 누리려 노력합니다. 철학 하는 제가 보기에 돈이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편리입니다. 행복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재벌도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속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와 얘기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서 옵니다. 사랑마저 돈으로 사려 하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 낯선 얘기일 테지만 말입니다.

 

 

인간이 추구해도 좋은 참된 욕망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선, 죽어가는 삶임을 받아들여서 돈으로 행복을 얻으려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그 불안에 쫓겨 소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성격학적 소유를 지향하는 소비이지요. 성격학적 소유를 위한 소비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내적 도피를 위한 소비입니다. 건전하고 인간적인 소비는 과도한 화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로 서지 못하면 타인의 인정에 과도하게 매달리게 됩니다. 명품으로 타인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건강하지 않은 욕구(타인을 소외시키면서 인정욕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니 건강하지 않습니다)에 시달리다 보면 과도한 화폐가 필요해지는 법이지요.

 

그리고 죽어가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세상을 한 뼘이라도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조금이라도 기여하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하는 자신에게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는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타인을 위하는 자기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만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나 자신의 삶은 물론 다른 사람의 삶을 삶답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추구해도 좋은 참된 욕망은 자신과 타인의 인간다움을 증진 시키는 데 기여하는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실현을 한 뒤에도 허무감이 느껴지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겪는 어려움에만 매몰되기 쉽지만, 더 어려운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면서 사회구성원들의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이 시대를 건강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에 결정 당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인간다운 욕망으로 바꾸어가는 삶, 그것이 질문자 님이 궁금해하셨던 방향타이리라 생각합니다.

 

 

목마른 당신을 위한 인생 비타민🍊

고전으로미래를읽는다013 흥신문화사 E.프롬 지음 정성환 옮김 소유냐 삶이냐 신프로이트 학파의 거성이 전하는 인간존재의 문제 TO HAVE OR TO BE / 능력주의와 불평등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에 대하여 박권일 , 홍세화 , 채효정 , 정용주 , 이유림 , 이경숙 , 박권일 , 김혜진 , 김혜경·문종완 , 공현 교육공동체벗 /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MICHAEL J. SANDEL

(왼쪽부터) 『소유냐 존재냐』, 『능력주의와 불평등』 과 『공정하다는 착각』의 표지(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①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지음, 최혁순 옮김, 범우사, 1999

에리히 프롬의 유명한 고전입니다. 두 가지 삶의 방식, 소유양식의 삶과 존재양식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장 중심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유형은 소유양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소유양식의 삶에서 궁극적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자신 역시 시장형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다른 시장형 인간을 만나면 마음 속 깊이 염오를 느끼는 것이 인간의 특징입니다. 시장형 인간끼리는 상대방이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소통하기가 어려워지지요.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존재양식의 삶이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더욱 이 책을 접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새로운 것을 접하면서 발전하게 되니까요! 8장에서는 새로운 인간형, 9장에서는 새로운 사회의 특색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② 『능력주의와 불평등』, 홍세화 외 지음, 교육공동체벗, 2020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능력주의를 검토하고 비판하는 내용의 책입니다. 학교와 교육제도, 교육권, 노동, 엘리트주의, 페미니즘 등에서 나타나는 능력주의를 검토하면서 능력주의가 세습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능력주의에 대해 네 가지의 물음, 즉 사회는 무엇을 능력으로 평가하는가, 그 능력의 차이가 실제 어떤 차별로 이어지는가, 그러한 차별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공동체의 자원은 전체 구성원에게 어떤 기준으로 배분되어야 하는가? 등의 물음을 바탕으로 논의합니다. 현실에서 능력주의와 공정의 문제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생각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될 내용입니다.


③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유명한 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책입니다. 원제는 ‘능력주의의 폭정’입니다. 미국 사례들을 토대로 능력주의의 문제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샌델이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공동선의 정치를 찾아 나서기 위해 생각을 모아보는 내용입니다. 샌델은 능력주의가 각자 자유롭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특정의 능력을 갖추지 못할 때 열패감을 내면화하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능력이 시대적으로 달라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 이 사회가 나의 능력을 좋게 평가해주는 것은 행운이 따른 것일 뿐일 수 있습니다. ‘노력도 재능이다’는 말도 있고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나고서는 자신이 3루타를 친 것으로 안다’는 말도 있지요. 노력도 재능도 어차피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볼 때 자신의 능력을 높게 평가해주는 사회에 고마워하는 겸손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샌델은 바로 이 겸손이 시민적 덕성의 기반이라는 입장을 피력합니다. 중간에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나오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중요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MZ세대와 함께 하는 철학 카페는? 불확실한 미래, 지질한 현재, 이불킥을 하게 만드는 과거……. 나는 왜 이리 형편없을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들로 나의 일상은 주눅 들고는 합니다. 지금처럼이 아닌, 나답게 잘 사는 방법은 없을까요? 철학의 2,500년 역사는 이 물음에 답을 주는 지혜들로 가득합니다. 개성 강하고 그만큼 고민도 남다른 MZ세대를 위해 다정한 철학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는 삶의 고민과 질문을 부담 없이 들려주시길! 철학의 지혜를 담뿍 전해드리겠습니다.

 

 

 

[MZ세대와 함께하는 철학 카페]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구요?(feat. 에리히 프롬)

- 지난 글: [MZ세대와 함께하는 철학 카페] 경쟁과 비교의 늪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회복하는 법(feat. 버트런드 러셀, 게랄트 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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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미
박은미

철학커뮤니케이션 연구소장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강의교수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 저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철학적 성찰력의 힘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 삶에 닿아 있는 철학을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글로 일반인과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철학커뮤니케이션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단독 저서로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공동저서로 『철학, 삶을 묻다』, 『미래 인문학 트렌드』, 『왜 철학상담인가?』 등이 있고, 역서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공동번역서로 『철학 2: 실존조명』, 『50인의 철학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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