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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노래

- 당신은 어떤‘가요’ -

정지아

2022-12-14

어느 날인가, 폭설이 쏟아졌다. 밤 까는 소리 아래 소복소복, 눈 쌓이는 소리가 BGM으로 깔리는 밤이었다. 나는 눈에 홀려 밖으로 나갔다. 옷도 변변치 않던 시절, 살갗이 에이도록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공간을 가득 메운 하얀 눈발 아래서 나는 강아지처럼 신이 났다. 아버지도 눈 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별 생각 없이 청탁을 수락했다. 나의 노래 한 곡쯤이 왜 없겠나 싶어서.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노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에서는 노랫소리가 들린 적이 없다.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 때나 출소한 뒤에나. 엄마는 몇 번인가 “노래는 배호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호의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말해준 적도 없고, 배호의 노래를 허밍으로나마 중얼거린 적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배호의 노래를 모른다. 엄마 입에서 가수 이름이 나온 건 처음이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라디오

라디오



왜 노래를 부르지 않았는지 대답해줄 아버지는 세상에 없고 어머니는 너무 늙었다. 다만 가늠해본다. 일단 노래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산과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세상에 돌아온 뒤에는 돈이 없었다. 노래 들을 방법이라곤 커다란 건전지를 노란 고무줄로 동여맨 라디오뿐이었는데, 아쉽게도 높은 산에 둘러싸인 고향 마을에서는 전파가 잘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직거리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 채 주로 뉴스를 들었다. 조금이라도 제대로 듣고 싶었던 아버지는 라디오를 든 채 이리저리 옮겨 다니곤 했다. 뉴스도 정확하게 알아듣기 어려웠으니 노래야 오죽했으랴.


가난 덕분에 나도 노래를 듣지 못했다. 퀸이나 아바, 롤링스톤즈 등등의 팝송이 유행하던 중학생 시절, 우리 집 라디오는 너무 낡아 자주 고장이 났다. 팝을 모르면 아이들 대화에 끼기 어려웠다. 나는 자주 들리던 서점에서 ‘세광 힛트송’ 책을 통째로 달달 외웠다. 덕분에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이었다. 그룹 결성에 얽힌 일화며 멤버들 개개인의 상황이며 나는 모르는 게 없었다. 어느 날부터 점심시간에 방송반에서 팝을 틀기 시작했다. 반마다 새로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노래가 흘러나오던 첫날의 당황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첫 곡이 나오자마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영어를 잘 들을 수 있기를, 그래서 빨리 어떤 곡인지 알아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몇 소절이 지나가고 ‘doo ron ron ron, doo ron ron’이 귀에 들렸을 때야 나는 이 노래가 당시 여학생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던 숀 캐시디의 ‘Da doo ron ron’임을 알아챘다. 나는 숀이 배우 잭 캐시디의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이 곡이 77년도 빌보드 1위를 차지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노래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노래를 문자로 익힌 서글픈 결과였다. 내 부모도 그런 가난의 결과로 노래를 들을 방법이나 겨를이 없었을 거라 짐작한다.


딱 한 번, 부모님의 노래를 들었다. 두 번 다 겨울이었고, 깊은 밤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무렵, 부모님은 밤농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요즘은 벌레 먹은 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산책을 나가면 벌레 먹은 밤들이 예사로 발에 채인다. 하지만 그 시절엔 그조차 귀했다. 벌레 먹은 밤은 멍석에 잘 말린 뒤 속껍질까지 일일이 까서 대보름 찰밥에 섞는 용도로 내다 팔았다. 겨울이면 부모님은 밤늦도록 말린 밤을 깠다. 생밤 껍질 까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은데 말린 밤이야 오죽하랴. 겨우내 부모님 손에는 칼에 베인 상처가 가시지 않았다. 나는 겨울밤마다 톡톡, 밤 까는 소리를 들으며 뜨신 방구들에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그 소리가 어쩌면 내게는 음악대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밤 까는 소리에 섞여 두런두런 두 분의 말소리도 섞여 들었다. 집이 좁아 바로 지척이었으나 워낙 말소리가 낮아 다 듣지는 못했다. 이현상, 달궁, 박종하, 이런 이름이나 지명이 뜨문뜨문 들렸다.



눈 내린 날

눈 내린 날



어느 날인가, 폭설이 쏟아졌다. 밤 까는 소리 아래 소복소복, 눈 쌓이는 소리가 BGM으로 깔리는 밤이었다. 나는 눈에 홀려 밖으로 나갔다. 옷도 변변치 않던 시절, 살갗이 에이도록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공간을 가득 메운 하얀 눈발 아래서 나는 강아지처럼 신이 났다. 아버지도 눈 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방문을 활짝 열었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채 팔짝팔짝 뛰고 있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소리 내어 웃었다. 빨치산의 딸에게도 그런 밤이 있었다.

 

태백산맥에 눈 나린다 총을 메어라 출진이다. 

눈보라는 밀림에 우나 마음 속엔 피 끓는다. 

높은 산을 넘어넘어 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고 

빨치산이 영을 내린다 원쑤를 찾아 영을 내린다.


- 「태백산맥에 눈 나린다」 중에서 -

 

그날은 가사를 다 듣지 못했다. ‘태백산맥에 눈 나린다’만 정확하게 들었다. 나중에 가사 전체를 알아보았고, 더 먼 훗날, 어느 노래패가 전투적으로 부른 노래도 들었다. 듣고 보니 내 부모님은 둘 다 음치에 가까웠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지 않은 건지도…….


내 부모님이 부른 노래는 노래패가 부른 노래와는 전혀 달랐다. 아마도 노래패의 노래가 음정이며 박자며 정확할 테지만, 내게 각인된 것은 부모님의 노래다. 소리가 유난히 잘 전달되는 눈 내리는 밤, 행여 누가 들을 새라 숨죽여 부른 그 노래, 아마 자본주의 세상으로 돌아와서도 절대 버려지지 않던(,) 산에서 보낸 몇 년 세월이, 어쩌면 신념이, 견디다 견디다 못해 흘러넘친 결과였을 것이다. 밤이 아니었으면 부를 수 없었을 노래, 지리산에서의 어느 밤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지 않았으면 부를 수 없었을 노래. 사상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던 열여덟 나에게도 그 슬픔이 사무치게 전해져 나는 더는 눈밭에서 뛰놀 수 없었다. 이후로 한 번도 부모님의 노래를 들은 적이 없다. 그 은밀한, 눈 내리는 겨울밤 외에는.


부모님보다 한결 나은 세상을 사는 나는 두 분과 달리 이런저런 노래를 듣는다. 김광석에서부터 힙합에 이르기까지. 힙합을 좋아하는 이유는 딱히 모르겠다. 슬럼에서 자란 아이들의 노래라는 것도 좋고, 욕이 절반인 가사도 좋고, 틀에 매이지 않은 리듬도 좋고, 춤이랄 것도 없이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몸동작도 좋다. 반성도 자제도 없이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들이대는 느낌이랄까? 그 중에서도 박재범을 좋아한다. 달콤한 목소리는 내게 주어진 적 없는 천국 같고, 가사는 더없이 솔직해서 통쾌하다.


너무 쳐다봐서 미안해. 

근데 니가 너무 섹시해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보고 싶어 너의 몸몸몸매


- 박재범, 「몸매」 중에서 -


물론 유치하다. 근데 유치한 게 뭐 어때서! 연애란 게 다 유치한 거지!


총을 들어라 출전이다와 보고 싶어 너의 몸몸몸매 사이에서 어쩌면 나는 아직도 헤매는 중인지 모르겠다. 전자는 나의 출발이요, 후자는……. 결말은 아니고, 내가 모르고 혹은 무시하고 살아온 세상이다. 그 간극은 나의 것만은 아니었지 싶다. 내 부모는 그런 간극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지 않았을까? 그래서 서글퍼 해야 하는 것인지, 그래서 아름다웠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도 나는 모르겠다. 어느 글에선가 고백했듯 살수록 모르겠는 것투성이다. 돌아보니 노래조차도 그렇네. 오늘 밤에는, 소설이 지났으나 아직 눈이 내리지 않는 초겨울의 오늘 밤에는, 박재범의 몸매나 들어야겠다.





[당신은 어떤‘가요’] 밤의 노래

- 지난 글: [당신은 어떤‘가요’] 정미조와 빈지노 사이 하루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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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소설가 사진
정지아

소설가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1990년 실천문학에서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 출간.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출간. 창비에서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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