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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서 다행이야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김혜정

2022-12-07

‘우리들’과 ‘사소한’과 ‘모험담’은 따로 있을 때도 각각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인데 이 세 개가 합쳐지다니.

나는 사회를 전복시킬 정도의 비장하고 대단한 걸 꿈꿔본 적도 바라지도 않는다.

홀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캐릭터의 이야기보다는 혼자가 아니라 우리일 때 가능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주는 힘은 강하다. 

 

 

 

작가라면 공통적으로 많이 받는 질문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이야기 소재는 어디서 얻나요?”가 아닐까 싶다. 나의 경우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다른 작가의 작품을 더 많이 읽고 본다. 그러다가도 풀리지 않으면 작가가 쓴 작법서를 읽는데(다른 작가의 창작물이 알약의 영양제라면 작법서는 병원에서 맞는 수액 영양제다) 얼마 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를 읽으며 새로운 팁을 얻었다. 그는 흔히 작가에게는 몇 번이나 다시 사용하는 주제나 패턴이 존재한다며 이것을 적절하게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작가는 스스로 타고난 것을 활용할 때 글을 더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오호라! 노트를 펼친 후 내가 쓴 이야기의 특징을 찾아봤다.

 

아이들이 모여 무언가를 함께 해내는 이야기가 꽤 많았다. 학교 심화반을 없애려는 작전을 짜거나 (『닌자걸스』) 다이어트 학교 탈출을 도모하고 (『다이어트 학교』) 탈학교 아이들이 모여 영화를 만들고(『텐텐영화단』) 여친 사귀기 내기를 하고(『레츠 러브』) 창업을 하고 (『시크릿박스』) 고민상담소도 만들고(『맞아언니 상담소』) 여행단을 만들고(『우리들의 에그타르트』), 나쁜 어른을 혼내준다(『헌터걸』).

 

 

‘우리들’의 ‘사소한’ ‘모험담’

도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는지 곰곰이 생각했고 원천이 된 소설을 찾았다.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스무 살에 가네시로 카즈키의 『레벌루션 no.3』를 읽고 씩씩대며 화를 내는 내가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연령인 십 대에 읽지 못한 게 그냥 몹시 억울했다.

 

 

도서레벌루션 no.3 (출처: 알라딘)

도서 <레벌루션 No.3> (출처: 알라딘)

 

 

『레벌루션 no.3』는 동명의 작품과 두 편의 중편이 모인 연작소설집인데 이 작품을 이끄는 ‘더 좀비스’는 삼류 남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47명의 아이들이다. 더 좀비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두 가지 이유다. 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평균 학력이 뇌사 판정에 버금가는 혈압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 요컨대 뇌사 상태인 좀비스는 학력 사회에서 ‘살아 있는 시체’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였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아서’다.

 

더 좀비스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서는 바꾸려는 목적으로 근처 명문여고 축제에 몰려가 짝짓기를 시도한다. 이 일을 엉뚱하고 무모하게 3년이나 시도를 하는데 결국에는 성공해버린다. 혼자라면 웬만하면 하지 않을 행동들을 친구들과 모였기에 과감히 할 수 있다. 친구 무덤에 가기 위해 모은 돈을 날치기 당했을 때는 다 같이 모여 이 돈을 되찾아 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여대생의 스토킹범을 힘을 모아 잡기도 한다. 

 

운동장이나 학교 옥상에 더 좀비스가 모여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치기 어린 행동을 계획하는 모습을 읽으며 낄낄거리며 웃다가 마냥 부러워 속이 쓰렸다. 주인공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앞으로 펼쳐질 일을 ‘우리들의 사소한 모험담’이라고 표현했는데 ‘우리들’과 ‘사소한’과 ‘모험담’은 따로 있을 때도 각각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인데 이 세 개가 합쳐지다니. 나는 사회를 전복시킬 정도의 비장하고 대단한 걸 꿈꿔본 적도 바라지도 않는다. 홀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캐릭터의 이야기보다는 혼자가 아니라 우리일 때 가능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주는 힘은 강하다. 돌이켜보면 서툴고 어리숙한 내 사람을 버티게 해준 건 옆에 있던, 같은 상황에 처해 있던 동료들이었다.

 

고등학생 때 나는 학교에서 자주 구역질을 했다. 내 기분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성적은 위가 아닌 아래로만 가려고 했고 예상치도 못한 친구와의 갈등이 생겼다. 지금은 욕을 거의 안하지만 그때는 입에 욕을 달고 살았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십대들이 욕을 많이 한다고 어른들이 뭐라고 하는데 욕이라도 해야 그 시기를 버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시절 나는 학교라는 공간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그 공간에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나만 문제가 있지 않았다. 쟤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또 쟤도 그랬다. 들리던 소문에 따르면 옆 반에도 또 그랬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라 우리들은 엇비슷한 소소하고 다양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어리바리한 나를 우리가 지켜줬다. 옆 반과 문제가 생기면 같은 반이라는 이유만으로 뭉쳤고 우리 반이 체육대회에서 이기기 위해 악을 쓰고 달렸으며 우리 반의 이름으로 고3임에도 불구하고 가장무도회를 모의고사보다 더 열심히 준비했다.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나는 ‘우리’의 도움을 받았다. 병원에서 자연임신이 힘들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너무 절망스런 마음에 또 지구가 멸망해버리기를 바랐고(이제는 함부로 그러지 않는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이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 내 이야기를 했다. 한 번도 만나거나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이들이 나를 위로하며 댓글을 달고 쪽지를 보내줬다. 그들은 나도 그랬다고 말해주며 조언을 해줬다. 그러자 내 문제는 나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의 고민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때 랜선 동료들에게 감동을 받아 무조건 ‘맞아’라고 말해주는 인터넷 고민카페 이야기인 『맞아언니 상담소』를 썼다.

 

 

‘우리’라는 ‘판타지’

여전히 우리들이 모여 무언가를 하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박서련의 소설 『더 셜리클럽』에는 ‘셜리’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이국의 셜리 할머니들이 설희(셜리)에게 도움을 준다. 셜리 할머니들은 아무 대가 없이 설희를 아껴주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함께 한다. 어떻게 고작 이름이 같단 이유 하나로 그럴 수 있는지 물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도대체 누가 그런 대가 없는 선의를 베푸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은 대가를 바라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은 지도 모른다. 고작으로 사람은 움직이는데, 움직이는 이가 한 명이 아닌 ‘우리’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고작이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 『런던 프라이드』가 보여주는 연대의 힘은 더 세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게이 레즈비언들의 ‘우리’와 광부노조 ‘우리’가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소수였던 그들은 또 하나의 우리들이 되면서 강해진다. 이는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내가 가야 할 지향점을 알려 주었다. 우리들이 모여 무언가를 해내는 이야기를 볼 때면 가슴이 마구 설레고 인생을 잘 살아가고 싶다. 나아가 나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도서 더 셜리클럽 표지 (출처: 알라딘), 영화 런던 프라이드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도서 <더 셜리클럽> 표지 (출처: 알라딘), 영화 <런던 프라이드>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집단과 모임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일 것 같은데, 고백하자면 실은 나는 두 명 이상 만나는 것을 어려워한다. 여러 명이 함께하는 모임에 속해 있지 않고 친구를 만날 때도 일대일로 단둘이 만나는 것을 선호한다. 여러 명을 만나고 오면 기운이 쭉 빠져 쉬어야 한다. 작가라는 직업이 좋은 이유도 나만의 공간에서 홀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인 게 외롭지 않고 고독하지도 않다. 혼자 있을 때 가장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이야기는 내게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평범한 일반인이 재벌이나 유명인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능하지 실상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판타지인 것처럼 여러 명이 모여 무언가를 해내는 이야기는 내 삶에 있어서 판타지에 가깝다. 어쩌면 나는 늘 혼자 있기에 내가 직접 만들거나 읽고 보는 이야기 속에서만이라도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기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의 이야기’는 손에 닿을 수 있는 판타지다. 내 비록 지금은 혼자 있지만 만약 내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모험을 해야 할 경우가 있을 때 기꺼이 내게 손을 내밀어줄 ‘우리’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내겐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문학을 읽고 쓰고자 하는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너도 그렇구나. 우리가 모두 그렇구나. 이런 공감과 동질감을 느끼고 깨닫기 위해 말이다.

 

우리라서, 우리가 있어서, 우리가 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우리라서 다행이야

- 지난 글: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지나가는 계절을 견디고 있는 모든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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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정 작가 사진
김혜정

작가
책, 드라마, 영화를 좋아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십 대 시절부터 공모전에 도전해 100여번 떨어진 후 작가가 된 성공한(?)이야기 덕후. 지금도 1년에 책 150권, 영화 100편, 드라마 50편을 보며 이야기에 빠져 산다. 성장담을 쓰면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이킹걸즈』, 『닌자걸스』, 『판타스틱걸』, 『다이어트 학교』, 『오늘의 민수』, 『오백 년째 열다섯』등의 청소년 소설과 『헌터걸』, 『맞아언니 상담소』, 『우리들의 에그타르트』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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