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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계절을 견디고 있는 모든 ‘나’에게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김민경

2022-11-11

딱 한 번 돌아갈 수 있다면, 잠깐의 호사처럼 방안에 들어온 햇볕을 쬐며 혼자 앉아 있는 내 곁에 가만히 앉아 있어 주고 싶다.

그리고 늘 적절한 말과 타이밍을 잡지 못하던 그 시절의 나에게,

미지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서 두렵기만 했던 나에게, 도망치고 싶기만 했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러고 나서 꼭 안아주고 싶다.

 

 

 

한때 ‘인생의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유행’이라고 쓴 이유는 이런 대화를 하지 않은지 최소한 십여 년은 흘렀기 때문이다. 쓰고 보니 유행이 지났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겠다. 여하튼, 쓸데없는 이 질문을 서로 주고받으며 길지 않은 생의 한 시절을 때론 웃으며, 때론 울적해 하며 이야기하곤 했다. 나는 항상 딱히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없으며 ‘절대 이십 대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골목의 조』(송섬, 사계절, 2022)를 읽으며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나의 이십 대가 하나둘 되살아났다. 소설 속 화자인 ‘나’와 이십 대의 내가 다르면서도 비슷했던 것이다. 동생이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나는 혼자 세 곳의 자취방에 살았다. “매일같이 무언가를 후회했지만 그 무엇도 변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서툴고 어려워서 도망치고 싶기만 했다.

 

 

책 골목의 조 (출처: 알라딘)

책 <골목의 조> (출처: 알라딘)

 

 

누구나 어느 시점이 되면 학교나 집이나 친구가 전부이던 세상에서 울타리 밖으로 나간다. 나 또한 울타리 밖의 세상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서울에도, 대학교에도, 새로운 사람들에도,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책을 읽어도 “애써 집어넣은 활자가 이마의 얇은 피부를 통해 그대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고향 친구들을 만날 때는 마음이 온전했는데, 자꾸 기대게 될까 봐 일부러 그들과 멀리하기도 했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단어는 하나같이 변변찮은 것이었다, 어떤 것은 너무 탁했고 또 어떤 것은 필요한 것에 비해 너무 컸다. 모든 단어에 ‘너무’가 붙었다. (중략) 매일 밤마다 번호도 매기지 못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와 베개맡에 고인다.

- 『골목의 조』 중에서

 

 

 소설 속 ‘나’처럼 대화에 서툴렀던 나는 수시로 내가 내뱉은 말과 내뱉지 못한 말 사이에서 방황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어떻게든 타인의 세계에 끼고자 애를 썼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이런저런 것들을 했다. 그 시절에 내가 한 것들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아무런 연결성이 없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은 없지만 좋아서 한 것도 없다. 『골목의 조』를 읽으며 내가 왜 그랬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바깥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끈이 희미해질까 봐, 아무도 나를 모르게 될까 봐, 끝내는 미아가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살아간다는 일은 이렇게 두려운데, 남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해보았어야 했다. 둘러대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 『골목의 조』 중에서

 

 

나의 첫 자취방은 반지하였다. 물론 여느 공인중개사처럼 이 정도면 반지하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뒤로 오르막길이 있던 건물은 20도 정도 삐딱하게 지어졌고 하루 중 잠시 그 삐뚜름한 틈을 비집고 해가 들긴 했다. 계절에 따라 해가 드는 시간이 달랐기에 나는 가능한 그 시간에는 자취방에 있으려고 했다. 그럼 0도와 20도 사이, 비어 있는 그 공간은 무엇이었을까. 『골목의 조』의 “남겨진 골목”과 달리 아무도 갈 수 없고 그저 창을 통해 시멘트벽 사이로 떨어지는 낙엽과 햇살만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쓸데없으나 건물을 올리려면 생길 수밖에 없는 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깨달았다. 그 공간 덕에 내가 햇볕을 쬘 수 있었고 첫 자취방에서의 시간을 견뎠다는 것을.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서야 말이다.

 

 

노을지는 창 (출처: 저자 제공)

노을지는 창 (출처: 저자 제공)


 

소설 속 ‘나’와 ‘조’에게도 그 골목은 점차 둘만 아는 빈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처음엔 발코니처럼 고양이들을 내보내고 빨래를 널기도 하고 캠핑용 등과 작은 테이블, 비치 체어를 두는 실용적인 장소였다가 “그곳에 가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 기꺼이 받아주는 마지막 장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여전히 골목을 떠나지 못하는 건, 사실 네가 아니라 나일지도 몰라. 조, 골목에 있고 싶다면 얼마든지 있어도 돼. 그곳은 그러라고 있는 장소니까. 원한다면 언제든 내 창문을 노크해도 좋아. 네가 떠나기 전까지 나는 여기에 있을게.

- 『골목의 조』 중에서

 

 

‘조’의 부재가 길어지자 ‘나’는 “날짜를 제대로 셀 수 없”고 시간도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끼지만, 결국 ‘여린 용기’를 내어 “강한 중력처럼” 끌어당기는 과거를 마주한다. ‘조’에게 건네는 ‘나’의 조곤조곤한 말에 축축한 슬픔이 묻어 있지만, 이제 ‘나’는 “중요한 것은 미아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자기 곁에 없는 세 존재로 인해 “유독 많이 슬프고, 헤어나오기 힘”든 날이 또 오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자신에게 “힘주어” 말한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나’는 “아무런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현실의 사건들을 겪으며 책을 읽고 술을 마시고 끼니를 이어가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견디며 살아갈 것이다.

 

이 작품은 제2회 박지리 문학상 수상작이다. 심사평 중에 딱 와닿는 말이 있었다.

 

 

연하고 담백한데 이상하리만큼 빠져들어 읽게 되는 묘한 소설이다. 소설을 다 통과할 때 불러오는 감정은 크고 강렬했는데, 재독이나 삼독을 해도 이 작품의 최종 감정이 휘발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소설 속 ‘나’를 과거로 끌어당기는 강한 중력처럼 이 책은 나를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던 이십 대로 끌어당겼다. 놀랍게도 나는 처음으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딱 한 번 돌아갈 수 있다면, 잠깐의 호사처럼 방안에 들어온 햇볕을 쬐며 혼자 앉아 있는 내 곁에 가만히 앉아 있어 주고 싶다. 그리고 늘 적절한 말과 타이밍을 잡지 못하던 그 시절의 나에게, 미지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서 두렵기만 했던 나에게, 도망치고 싶기만 했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러고 나서 꼭 안아주고 싶다. 여전히 나는 대화에 서툴러서 두서없이 이런저런 말을 하겠지만, 이 말들은 꼭 내 마음에 가닿으면 좋겠다. 정말 고생하고 있다고, 도망쳐도 되고, 길을 잃어도 된다고, 너만 바라보라고, 너를 믿으라고…….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지나가는 계절을 견디고 있는 모든 ‘나’에게

- 지난 글: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우리가 찾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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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소설가 사진
김민경

소설가
작품으로 소설 『앉아 있는 악마』와 『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 동화 『우리 동네에 놀러 올래?』가 있으며, 그림책 『나의 구름 친구』, 『지금, 바로 여기』 등을 번역했다. 창작모임 ‘작은 새’ 동인이며, 2017년 제2회 새싹문학 젊은작가상,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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