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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찾는 발굴과 보전, 개발 쫓겨 뒷전은 곤란

- 이달의 답변 -

이청규

2020-11-03

 

인문 쟁점은?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인문학적 과제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깊은 사색, 허심탄회한 대화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매월 국내 인문 분야 전문가 두 사람이 우리들이 한 번쯤 짚어봐야 할만한 인문적인 질문(고민)을 던지고 여기에 진지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이달의 질문] 문화재 보존 vs 경제 개발, 영원한 딜레마를 풀 해결책은 / 질문자 -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Q. 문화재 보존 vs 경제 개발 딜레마를 풀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또, 고고학과 문화재 발굴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보존과 개발, 대척점 사이에서 수많은 경험과 현장에서 보고 느낀 이청규 교수님(고고학자, 영남대 명예교수)께 고견을 구합니다. 

 

[이달의 답변] / 답변자 - 고고학자, 영남대 명예교수 이청규




A. 숨은 역사 찾는 발굴과 보전, 개발 쫓겨 뒷전은 곤란

 


 

1995년까지 전국에서 이뤄진 유적 발굴은 전부 합해서 150건을 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에 1000건이 넘더니, 2015년 이후에는 1500건에 달하게 되었다. 주목할 것은 그중에 10% 미만이 순수한 학술 연구 또는 유적의 정비를 목적으로 한 발굴이고 90%는 이른바 ‘구제발굴’이라는 점이다. 문자 그대로 개발로 인하여 파괴되는 유적과 정보를 구제할 목적으로......

 


유적 발굴, 고가의 골동품 때문에?

 

 

유적은 왜 발굴하는가. 높은 값에 사고 팔 수 있는 골동품을 얻기 위해서인가. 그렇다고 답하는 고고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랬다면 그는 도굴꾼이나 다름 없다. 중세부터 유럽에서 재력과 권력이 있는 왕실, 교회나 귀족들이 고대 그리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고미술을 수집하는 것이 성행하였고 그것이 고고학의 뿌리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고고학, 또는 유적 발굴이라면 돈 많은 사람들의 고미술 수집을 연상하지만 현대 학문으로서의 고고학과는 크게 다르다.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은 역사학이며, 상당 부분 사람들이 남긴 문헌 기록에 의존한다. 그러나 인류의 기록은 기껏 거슬러 올라가야 5천 년 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따지자면 2천 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기록된 내용은 매우 희귀하다. 기록을 하는 사람은 한정되고, 그의 생각에 따라서 그 내용이 잘못될 가능성이 많다.



고고학, 기록으로 접근 안되는 과거를 밝히는



고고학은 그러한 기록으로 접근이 안되는 인간의 과거를 밝히는 학문이다. 유적 유물 자료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없거나, 설혹 알 수 있는 과거라 하더라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설명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따라서 고고학을 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다름 없는데, 다만 근거 삼는 자료와 접근방법이 다를 뿐이다.


유적을 발굴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유물이나 유구(遺構)1)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료가 놓여 있었던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유구와 유물이 놓인 층위와 동반관계가 중요하다. 마치 범죄 수사팀이 사건의 내용을 추적하는 단서로서 사람들이 남긴 물적 증거와 그 현장을 조사하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기록이 전하지 않는 지역 주민, 민족, 인류사회의 과거를 밝히는 것이 고고학의 핵심 목적이다.

1)유구(遺構) :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출처:표준국어대사전)



제주상모리 유적 원경

제주도 상모리 유적 원경 : 1980년대에 지표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최남단 유적(이미지 출처 : 이청규 개인소장)

 


필자는 1980년대 중반 30대 초반에 서울에서 제주도로 건너가 10년 넘게 살면서 고고학을 하였다. 수백년 과거 이전에 제주도에 살던 사람들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기록은 매우 적다. 더군다나 그대부분 제주도 사람들이 남긴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비롯한 주변의 역사가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이 남긴 기록으로만 보면 제주의 역사는 고려시대 이전으로 거의 거슬러 가지 못하고, 다만 신화로 전하는 내용이 있었을 뿐이다. 



상모리 청동기시대 토기

상모리 유적 출토된 무문토기: 청동기시대 한강유역 등 한반도에서 출토된 공렬장식이 있는 무문토기. 한반도 주민이 건너갔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이미지 출처 : 이청규 개인소장)

 


상고시대 제주도 사람-탐라 주민이 남긴 것은 유적과 유물뿐이다. 고대 한국과 중국, 일본 사람의 기록에도 전하지 않는 삼국시대 이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제주도에서 고고학을 하는 첫 단계는 발굴이 아니라 지표조사로서 해안가, 들판, 동굴, 하천 유역 등 과거의 사람들이 남기거나 만들었던 지표상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찾은 유적을 대상으로 필요할 경우 예산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틈틈이 작은 규모의 학술연구를 위한 발굴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1만년 전부터 1천년 전까지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비롯하여 고대 탐라의 여러 시대에 걸쳐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살아왔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각 시대별로 그들이 어느 곳에서 건너와 정착하고 마을을 늘리고 누구와 교류하였는지를 밝히는 단서도 찾을 수 있었다. 



2000년 이후 유적발굴 90%는 속도 중시 구제발굴

 


논의의 대상을 지역이 아니라, 남한 전체로 돌리면, 1995년까지 전국에서 이뤄진 유적 발굴은 전부 합해서 150건을 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에 1000건이 넘더니, 2015년 이후에는 1500건에 달하게 되었다. 주목할 것은 그 중에 10% 미만이 순수한 학술 연구 또는 유적의 정비를 목적으로 한 발굴이고 90%는 이른바 ‘구제발굴’이라는 점이다. 문자 그대로 개발로 인하여 파괴되는 유적과 정보를 구제할 목적으로 발굴하는 것이다. 행정복합도시 세종시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지방 신도시와 주택단지, 고속도로 등의 광역 개발에 따른 엄청난 규모의 구제발굴이 2000년대 이후 실시되었으며, 지표 혹은 지상에 아무런 흔적이 없어 유적이 없거나 드물 것 같았지만 막상 발굴하면 예상하지 않은 유적을 찾게 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다. 



중도유적 지석묘

춘천 중도의 지석묘 유적 : 레고랜드 개발에 따른 구제발굴의 현장. 수백기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함께 확인된 지석묘군임(한강문화재연구원 발굴) (이미지출처 : 이청규 개인소장)

 


그중 한 사례가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춘천 중도 유적이다. 북한강 한가운데 위치한 섬에 유적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197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한 1기 원삼국시대 주거지, 1980년대 한림대에 의한 청동기시대 지석묘 1기 발굴 등으로 밝혀진 바 있다. 이런 사실 때문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에서는 2010년 전후에 춘천 중도를 관광지로 개발하고자 하는 지방자치단계의 계획이 수립될 때부터 유적 보존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앞서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예상할 수 있는 유적의 규모가 크다는 점도 고려됐지만, 중도라는 독특한 입지가 더 큰 이유로 작용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서 관광지 조성을 위한 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그에 따른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구제발굴이 실시되었다. 그러면서 추정에 그쳤던 청동기 시대와 원삼국시대의 대규모 취락이 조성된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학술적 목적으로 발굴할 경우 최소한 수십년 걸려도 못 끝낼 발굴을 예정된 개발 계획에 따라 불과 2년 남짓한 기간에 끝낸 것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유적 보존의 문제이다. 매장문화재 보호법에 따르면 유적은 원칙적으로 발굴하면 안된다. 후손에게 보존하여 물려주어야 할 민족 혹은 인류 유산이므로 전문 고고학자에 의한 발굴 자체도 원형을 돌이킬 수 없도록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발굴을 통하여 얻는 정보는 최첨단의 기술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여유를 갖고 시행하는 학술발굴도 아닌 구체발굴이, 앞서 보듯 매년 1천 건 넘게 전국 도처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유물도굴, 부끄러운 우리 역사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20세기 들어와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상황,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최대규모의 한국 전쟁을 겪었다. 20세기 후반에도 매우 빈곤한 경제상태에 놓인 저소득 개발 국가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에 국민의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국가의 시책과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일반 국민의 바람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최소한의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의 파괴가 불가피하다면 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게 지나칠 경우가 문제이다.


역사학이나 문학, 철학 등과 달리 고고학의 역사는 매우 일천하다. 본격적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서북지역 국가의 학자들에 의해 근대고고학이 시작될 때 발굴을 착수한 많은 중요한 장소는 지중해 연안의 식민지이거나 그와 다를 바 없었던 상황에 처한 국가의 고대 도시 유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학문적 사고에는 고미술을 애호하는 호고주의(好古主義)2)적인 관점, 혹은 고대문명 중심의 제국주의 시각이 투영되어 있었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박물관에 가면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 혹은 중동 지역의 예술품이나 건축물을 쉽게 볼 수 있다.

2) 호고주의(好古主義) : 옛 것을 좋아함


독일 베를린 박물관에는 터키의 로마시대 페르가몬 신전 전시실이 있다. 오스만투르크 터키 정부의 정식 허가를 받아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현지의 건축물을 그대로 이전 복원 전시한 것이다. 현지에 보존되는 것이 바람직한데도, 독일로 옮겨 갔다. 그것은 당시 외교적으로 곤궁에 처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 즉 터키 국가의 보존 능력과 정책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선사와 고대의 여러 유적을 조사하고 발굴을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고고학의 출발이다. 그것은 유럽 제국주의 고고학과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날 관점에서 볼 때 제대로 된 발굴이 아니어서 많은 정보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유적 자체가 파괴된 것도 상당하며, 일본인이 사주하여 조선인이 도굴한 다음 약탈당한 유물 또한 부지기수이다. 이는 자국민에 의한 많은 도굴의 단초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우리들이 여전히 식민지적 상황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볼 수밖에 없음을 떠올리게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마산현동유적

▲마산 현동 고분 유적: 최근에 도로 건설 구간에서 수백기의 가야고분이 확인된 유적(삼한문화재연구원 발굴) (이미지 출처 : 이청규 개인소장)

 


그러한 식민지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유적 보존에 보다 힘쓰고, 파괴를 최대한 막고, 발굴조사를 철저히 하는 것이 20세기 이 땅에서 민족의 긍지를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이다. 아마도 21세기에 들어와 대한민국처럼 엄청나게 많은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지는 국가의 사례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상당한 숫자가 도로, 아파트, 신도시, 공단 등의 신축과 개발에 따른 구제발굴인 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을 한다고 할 때, 현지 원상 보존이 어려울 경우 차선책으로 기록상으로나마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을 들여, 오랜 시간 동안 발굴한 다음, 유물을 복원하고, 사진을 찍고 도면을 그려 보고서를 반드시 출간해야 한다. 정확한 유물과 유구의 형태와 특징, 그 출토상황이 함께 파악될 때, 당대의 사정을 제대로 밝힐 수 있는 세밀한 정보가 확보된다.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 유물자료는 엄청나게 많다. 그리고 상당수는 신라 금관과 같은 유물이 아니라, 토기조각처럼 일반 사람이 보기에 하찮은 유물이다. 이러한 자료를 박물관 혹은 연구소 수장고에 쌓아 놓는 이유는 그 하나하나가 과거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로, 미래에 비록 고고학자, 역사학자가 아니더라도 다방면에 걸쳐 접근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알고 싶은 사실이 무엇인가에 따라 발굴보고서에 기록된 내용과 보관된 유물을 이해하는 관점이 달라진다. 전세계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굵직한 연구주제만 열거해보자. 인류의 기원과 진화, 국가의 형성과 발전, 전쟁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궁정의 구조와 생활, 종교의 예배 대상과 신전의 구조, 고대 미술의 세계 등 실로 무궁무진하다. 이와 같은 여러 주제를 밝히기 위하여 고고학은 인문학적 상상력에 자연과학적 분석, 그리고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현대 최첨단 방법기술과 학제간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종합학문인 것이다.

 


스스로 문화유산을 귀하게 여겨야 함에도



발굴된 많은 유적이 그렇듯이 앞서 소개한 춘천 중도 유적의 경우 발굴조사가 종료된 지금 남아있는 것은 이미 많은 유물을 들어낸 빈 공간의 유구이다. 얼핏 쓸모없는, 그래서 파기해도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고조선과 삼국시대 초기에 한반도 선주민이 살았던 역사의 현장으로서 보존하여 먼 미래에 더 좋은 방법과 관점으로 검토하고 활용될 수 있도록 유구의 위를 일정 높이로 복토(覆土)3)하여 보존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쉬운 대로 중도 현지에서 발굴된 지석묘4)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만드는 등, 일반 시민의 관람 활용을 위한 유적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3) 복토(覆土) : 흙을 덮는 일

4) 지석묘 : 큰 돌을 몇 개 둘러 세우고 그 위에 넓적한 돌을 덮어 놓은 선사 시대의 무덤


자신의 역사를 존중하고,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귀하게 여길 때, 진정한 글로벌 수준의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 시민과 정부 모두 그러한 인식이 필요한데, 그에 이르지 못하는 작금의 사정이 안타깝다. 지금도 사전 지표조사를 통해서 많은 유구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존을 고려하지 않고 개발에 수반되는 구제발굴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 것이 선진국 문턱에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11월 [이달의 답변] 숨은 역사 찾는 발굴과 보전, 개발 쫓겨 뒷전은 곤란 ⑥

11월 [이달의 질문] 문화재 보존 vs 경제 개발, 영원한 딜레마를 풀 해걸책은 ⑤

10월 [이달의 답변] 인류세는 인류 종말로 귀결할까 ④

10월 [이달의 질문] 인류세,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요?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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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호암미술관 연구원, 제주대학교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한국고고학회, 한국상고사학회, 영남고고학회, 한국 청동기학회의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문화재청 매장문화재 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고고학연구>< 해상활동의 고고학적 기원> <다뉴경과 고조선>과 역서로 <고대문명의 이해>, <중국고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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