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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철저한 준비와 과감한 대처가 당의 한반도 장악 욕심 좌절시켜

- 이달의 답변 -

이상훈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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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54초 읽기 naver clova Dubbing

당시 신라가 최강대국 당에 대해 기민하고 과감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삼국통일이다’, ‘아니다’를 논하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신라가 북방 고구려 영토 전체를 아우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 아쉬운 대목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거나 비생산적인 논란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한민족 형성에서 가장 중요하고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는 7세기다. 삼국통일 전쟁으로 수백 년간 지속된 삼국시대가 종결되고 한민족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삼국통일 전쟁은 크게 백제・고구려의 멸망(660~668)과 신라・당의 전쟁(669~676)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했다. 이후 신라와 당은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장기간 전쟁에 돌입했다. 이른바 나당전쟁이다.

 

국내 학계에서는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승리와 삼국통일의 의의를 강조한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 학계에서는 토번(吐蕃, 7세기 초부터 9세기 중엽까지 중국 서남에 있던 나라)이 성장하자 그 틈을 타서 신라가 전쟁을 개시했고, 토번이 강성해지자 당군이 철수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고 본다. 또 신라가 옛 백제 영토를 ‘침략’하자 당이 신라를 ‘정벌’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삼국통일을 기념하고자 지어진 경주 통일전(좌)에는 (왼쪽부터)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의 사적비(우)가 있다. (이미지 출처: 경주남산연구소)

삼국통일을 기념하고자 지어진 경주 통일전(좌)에는 (왼쪽부터)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의 사적비(우)가 있다. (이미지 출처: 경주남산연구소)

 

 

정리하면 나당전쟁의 시작과 끝은 신라가 아니라 토번이 중심이다. 또 나당전쟁의 원인은 당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야욕’ 때문이 아니라, 신라가 옛 백제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당은 한반도 침략 야욕이 없었고, 신라는 전쟁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풍사훈비」, 나당전쟁의 인식을 바꾸다

1984년 중국 섬서성(陝西省) 한중시(漢中市) 마가만향(馬家湾鄕)에서 「풍사훈비(馮師訓碑)」가 출토되었다.

 

“과거에 부여(夫餘)의 나라가 진한(辰韓)의 궁벽한 곳에 있었는데, 큰 바다에 의지하여 복종하지 않고 큰 산에 의지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현경(顯慶) 4년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總管) 소정방(蘇定方)은 전정(專征)하라는 제(制)를 받아, 부족하나마 이를 좇아 오랑캐를 치게 되었다. (소정방은) 공(公, 풍사훈)의 계략이 뛰어나고 무리보다 빼어난 것을 알고, (당 고종에게) 함께 정벌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풍사훈비」에 따르면 당 고종(高宗)은 현경 4년(659) 소정방을 계림도대총관에 제수((除授, 관직을 내려줌)하였고, 풍사훈은 소정방에게 발탁되어 그 휘하에서 전쟁을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 당이 백제 원정에 나선 시기는 현경 5년(660)이다. 당의 경우 묘지명은 관(官)에서 주도적으로 작성하는 관찬(官撰)과 사적인 면이 강한 사찬(私撰)이 있었다. 하지만 사찬조차도 조정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풍사훈비」에 보이는 문구는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풍사훈묘비영」 (이미지 출처: Jingwei sina blog)

「풍사훈비」 (이미지 출처: Jingwei sina blog)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현경 4년(659)’에 소정방이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總管)’에 제수되었다는 점이다. ‘계림(鷄林)’은 신라를 나타내는 말이다. 소정방은 신라를 공격하는 대총관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659년 당은 백제 원정을 준비하면서 신라 정복까지 염두하고 있었다.

 

이는 『삼국사기』 권42 김유신 열전의 기록과 부합한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소정방이 백제 포로를 당으로 압송하자, 당 고종은 “어찌하여 신라는 정벌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소정방은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지금까지 김유신 열전의 내용은 과장이라 치부되었다. 하지만 「풍사훈비」를 참고한다면 새롭게 볼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좌)과 『삼국사기』(우) (이미지 출처: 한국 기록유산 Encyves, Wikipedia)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좌)과 『삼국사기』(우) (이미지 출처: 한국 기록유산 Encyves, Wikipedia)

 

 

국외 학계에서는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가 옛 백제 영토를 잠식해 들어가면서 나당전쟁이 발생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과 「풍사훈비」의 기록을 따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 당은 660년 백제 원정을 준비하면서 이미 신라까지 점령할 의도가 있었으며, 신라에는 이러한 속내를 숨긴 채 연합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신라를 전략적 파트너로 삼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신라를 제대로 된 우방국으로 대우한 적이 없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과정에서 정보 공유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작전 지휘권은 오로지 당이 가지고 있었다. 당은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백제의 멸망 후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을 다스리기 위해 세운 관청) 주둔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했고, 665년 취리산(就利山) 회맹(당나라의 강요로 신라와 백제가 맺은 동맹)을 통해 웅진도독부를 신라와 대등한 위치에 올려두었다. 또 고구려 공격 과정에서는 신라의 장군 임명권과 병력 징발권까지 마음대로 행사했다. 당은 스스로가 세계의 중심이자 ‘종주국(宗主國)’이고, 신라는 변방의 ‘번국(蕃國)’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은 신라를 자신의 세계 질서를 관철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여겼다. 신라는 언젠가 병합할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신라는 백제・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당의 진의를 파악하고 당과의 전쟁까지 염두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 권7 문무왕 11년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는 나당전쟁 직전에 “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는 것은 겉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당의 기만 전략과 압박에 신라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당전쟁은 신라의 옛 백제 영토에 대한 ‘야욕’ 때문이 아니라, 당의 한반도 ‘침략’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나당전쟁의 승리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 신라의 능동적이고 적절한 외교 전략이다. 신라는 669년 4월경 옛 백제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고 난 후 당에 사죄사를 파견했다. 672년 8월 석문(石門, 황해도 서흥군 서흥면) 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또 당에 사죄사를 파견했다. 675년 2월 칠중성(七重城) 전투에서 당군에게 패하자 또 사죄사를 파견했다. 신라는 당과의 전황이 불리해질 때마다 사죄사를 파견해 당과의 긴장 관계를 완화하고자 했다.

 

나당전쟁 동안 신라는 수시로 당에 사죄사를 파견하며 저자세를 보였다. 이런 모습이 외교 측면에서 굴욕적이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라는 669년 사죄사 파견 후 670년 오골성(烏骨城) 공격을 준비했고, 672년 사죄사 파견 후 673년까지 대대적인 축성 작업을 단행했다. 또한 675년 사죄사 파견 후 9월에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이었음에도 신라는 군사적 공세와 외교적 유화를 상황에 맞춰 적절히 구사했던 것이다.

 

둘째, 신라의 지속적이고 정확한 정보 수집이다. 신라는 삼국 정립 시기부터 치열한 정보전을 지속했다. 나당전쟁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670년 3월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선제공격하고, 옛 백제 영토를 신속히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한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671년 1월 당군이 웅진도독부를 구원하려 한다는 정보를 얻은 신라는 대아찬 진공(眞功)을 옹포(甕浦)로 보내 방어했다. 673년 9월 당군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기 전에, 대아찬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이끌고 서해를 지키게 했다. 675년 2월 당군이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는 9군(軍)을 출동시켜 대비했다. 이렇게 볼 때 신라는 나당전쟁기에 지속적으로 당군의 동향을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해나갔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신라의 고구려 부흥 운동 지원과 요동 선제공격이다. 당시 신라의 지원이 없었다면 고구려 부흥 운동이 그렇게 큰 규모로 확대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와 고구려 부흥군의 고연무가 2만 연합군을 형성해,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공격했다. 연합 작전은 보다 강력한 국가가 주동권(主動權)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설오유・고연무 연합군의 요동 공격은 신라의 전쟁 의지가 반영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육군사관학교에 세워진 화랑상. 신라통일의 한 축을 담당했던 화랑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만들어졌다.

육군사관학교에 세워진 화랑상. 신라통일의 한 축을 담당했던 화랑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만들어졌다.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연합군이 요동을 선제공격하자 당은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 부흥 세력을 타격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웅진도독부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사이 신라는 670년 백제 고지(故地)의 82개 성을 전격 공략했고, 671년 소부리주(所夫里州,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를 설치해 영토화를 진행했다.

 

넷째, 신라의 전격적인 백제 고지 점령이다. 신라의 백제 고지 점령은 669년에 시작, 671년경 거의 마무리되었는데 개전 초기 단기간에 점령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점령 속도가 더뎠다면 당의 지원군이 도착해 웅진도독부의 잔류군 및 백제 유민군과 함께 신라를 압박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전쟁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신라의 방어 전선은 고구려 고지 남부와 백제 고지 전체에 걸쳐 있어 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또 공격을 위해 병력을 집중하는 것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신라는 백제 고지에 투입했던 주력군을 북상시켜 고구려 고지 전선에 투입했다. 신라는 이후 전개될 당과의 전면전에 앞서 측후방의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해, 한반도 내에서 전략적 우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다섯째, 신라 수뇌부의 유연한 대처 방식이다. 신라는 670년 3월 요동을 선제공격해서 나당전쟁 초기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672년 8월 석문 전투에서 대패하자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해 방어 위주의 대응으로 전환했다. 또 당시 출전 장수 및 지방 행정 수장들에게 일정한 권한을 위임해 자율성을 보장하고자 했다.

 

앞서 662년 정월, 김유신은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달하기 위해 출정했다. 이때 문무왕이 상벌(賞罰)을 오로지 김유신만이 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의종사권(便宜從事權)을 부여한 사례가 있다. 이후 나당전쟁의 전장(戰場)은 이전보다 확장되고 동원되는 병력 규모는 더욱 커졌다. 신라는 출전 장수들에게 군령권의 상당 부분을 위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좌)와 문무왕(우) (이미지 출처: 한국 기록유산 Encyves)

신라의 김유신 장군(좌)와 문무왕(우) (이미지 출처: 한국 기록유산 Encyves)

 

 

여섯째, 신라의 효과적인 방어 전략 수행이다. 672년 8월 석문 전투에서 크게 패한 신라는 673년까지 신라 전역에 대대적인 축성 작업을 단행했다. 당군의 침입에 대비해서 주(州) 단위의 광역 방어 체계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중앙의 지원 없이도 장기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다. 석문 전투에서 보이는 주요 지휘관은 중앙의 진골 장군이었으나, 석문 전투 이후 전투에서는 성주(城主)・현령(縣令)・소수(少守) 등 지방 관원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성이 함락되는 상황에서 신라 중앙군이 적극적으로 구원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 사망한 지휘관은 모두 지방 관원이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신라는 지방 방어성을 의도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개별 지방성 입장에서 본다면 신라 수뇌부의 행위는 잔인하게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의 전체 국면에서 본다면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당군은 수백 개의 신라 방어성을 일일이 공략하면서 남하해야 했고, 남하하면 할수록 보급로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석문 전투 이후 전면전을 회피하고 소모전을 유도해서 당군의 병참(군사 작전에 필요한 각종 장비와 물자) 문제를 불러왔다.

 

 

나당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쟁은 정치를 동기로 발생한다. 전쟁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국가의 정치적 목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자국의 이익 추구다. 따라서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은 전쟁의 목적과 목표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라의 나당전쟁 수행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의 전쟁 목적은 한반도와 만주를 장악해 당의 기미지배(羈縻支配, 다른 나라에 중국식 지방행정 제도를 구현하는 것)를 완성하는 데 있었다. 신라의 전쟁 목적은 평양 이남의 영토를 실질적으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은 나당전쟁 이후에도 명목상 신라왕을 ‘계림도독(鷄林都督)’으로 삼았다. 이에 당이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은 한반도에 대규모 원정군을 투입하고서 허울뿐인 명목만 얻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반면 신라는 백제 고지와 고구려 고지 남부를 실질적으로 영토화해, 목표하던 바를 이루었다.

 

 

한반도와 중국

한반도와 중국의 지리적 환경

 

 

당은 태종 이래 고종에 이르기까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나당전쟁의 패배로 그간의 노력과 성과를 포기해야만 했다. 당 왕조가 한반도에서 물러난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강력하게 성장한 토번 때문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실패한 것이다. 신라는 백제나 고구려처럼 멸망하지 않았다.

 

당이 신라 전선보다 토번 전선을 상대적으로 중시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라는 당시 사방으로 팽창하던 최강대국 당의 공세를 지원 세력 없이 홀로 막아냈다. 결국 신라가 장기간의 전쟁을 통해 당의 한반도 지배 의도를 좌절시켰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아쉬운 점은 있어도 민족문화 원형 마련은 신라의 공

우리는 대륙을 호령한 고구려나 바다를 누비던 백제가 아닌 변방의 소국 신라가 통일한 것을 두고 못마땅하게 여긴다. 역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 우리가 사용하는 말, 우리가 누리는 문화의 원형을 마련한 것이 신라다. 물론 신라가 우리 민족을 완벽히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은 분명하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완전히 숙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삼국통일을 이끈 문무왕이 묻힌 문무왕릉(좌)와 문무왕릉 가까운 곳에 세워진 감은사의 석탑(우)

삼국통일을 이끈 문무왕이 묻힌 문무왕릉(좌)와 문무왕릉 가까운 곳에 세워진 감은사의 석탑(우)

 

 

당시 신라가 최강대국 당에 대해 기민하고 과감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삼국통일이다’ ‘아니다’를 논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신라가 북방 고구려 영토 전체를 아우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 아쉬운 대목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거나 비생산적인 논란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현재 한반도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국에 둘러싸여 있다. 7세기 신라는 외부의 지원 없이 최강대국 당과 장기간 전쟁을 벌여 살아남았다. 신라는 지속적인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했으며, 상황에 따라 군사적 공세와 외교적 유화를 적절히 구사했다. 나당전쟁에서 승리해 한민족의 원형을 만든 신라의 사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인문 쟁점은?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인문학적 과제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깊은 사색, 허심탄회한 대화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매월 국내 인문 분야 전문가 두 사람이 우리들이 한번쯤 짚어봐야 할 만한 인문적인 질문(고민)을 던지고 여기에 진지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9월 [이달의 답변] 신라의 철저한 준비와 과감한 대처가 당의 한반도 장악 욕심 좌절시켜

 

- 지난 글: 9월 [이달의 질문] 삼국통일 전쟁기, 약소국 신라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나?

- 다음 글: 10월 [이달의 질문] 현실 반영 못하는 딱딱한 성문법, 한글 맞춤법 없애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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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우리나라 전쟁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 사관 생도들에게 한국사와 군사사를 가르치고 있다. 펴낸 책으로 『나당전쟁 연구』, 『전략전술의 한국사』,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전쟁 이후의 한국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군인수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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