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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탐구하기와 우물 파기

- 이달의 답변 -

유준

2022-12-16

표절이라는 단어 자체를 들여다본다.

표절에 해당하는 영어 plagiarism은 라틴어 plágĭum에서 온 말로 ‘납치’, ‘유괴’와 같은 뜻이 있다.

특히 이 단어가 자유인을 노예로 매매하는 행위를 일컫는데 쓰였다는 점은 우리의 흥미를 끈다.

이에 의할 때 표절하는 행위는 자유인이어야 할 글 쓰는 자가 몇 푼의 글에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넘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이달의 주제는 ‘표절’이다. 매우 오래되고 익숙하면서도 안타깝게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문제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남아 있을 것처럼 보이는 문제라는 점이다. 베끼기에 대한 유혹은 언제나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며, 모든 유혹에 대해 그러하듯, 이 유혹에 대해서도 초연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언제나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가 이순원 선생님의 말씀은 여러 번,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그 말씀에 첨언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하겠으나 코너의 제목이 ‘이달의 답변’이니만큼 어떠한 형태로든 답변을 해야 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이순원 선생님의 글이 질문이라기보다는 의견을 적어주신 쪽에 가까우니, 이 글 역시도 답변보다는 제 나름의 어쭙잖은 생각을 적어볼까 한다. 명쾌한 답변을 기대하신 분들께는 미리 양해를 구한다.

 

표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표절을 피할 수 있을까? 표절을 대대적으로 옹호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리라. 그런 독창적이고 기이한 글을 쓸 능력도 내겐 없다. 그렇다고 또 한 편의 반듯한 글을 써내는 것은 그저 동어반복에 그칠 따름이니, 이를 어쩌나?

 

일단 표절이라는 단어 자체를 들여다본다. 표절에 해당하는 영어 plagiarism은 라틴어 plágĭum에서 온 말로 ‘납치’, ‘유괴’와 같은 뜻이 있다. 특히 이 단어가 자유인을 노예로 매매하는 행위를 일컫는데 쓰였다는 점은 우리의 흥미를 끈다. 이에 의할 때 표절하는 행위는 자유인이어야 할 글 쓰는 자가 몇 푼의 글에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넘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자유인인 자기 자신을 스스로 노예로 팔아넘기는 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표절하는 자들, 즉 남의 것을 가져다가 자신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을 남의 것으로 만드는 자들은 많다. 왜일까?

 

비판 혹은 비난하기 전에 일단 그러한 행위의 내막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주제의 원고를 청탁받고 생각지도 못했던 글을 쓰기 위해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을 하는 중이니 얼마간의 좌충우돌이 예상된다. 그래도 이쪽저쪽 직접 부딪혀봄으로써 또 하나의 표절로부터 벗어나보고자 한다.

 

 

도서 안나 카레니나 (출처: 알라딘)

도서 <안나 카레니나> (출처: 알라딘)

 

 

첫째, 표절은 사랑의 행위일 수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읽었던 십여 년 전의 어느 겨울날을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 작품의 작가라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훔치고 싶었다. 내 것으로 삼고 싶었다. 살아오면서 그 무엇에 대해서도 그런 애욕(愛慾)을 품어본 적 없기에 그와 같은 갈망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다시 한번 콕 집어 말하지만, 난 그와 같은 작품을 쓰고 싶었던 게 아니라, 바로 그 작품의 작가이고 싶었다. 『안나 카레니나』를 사랑했고, 그 작품이 내 창조물이기를 바랐다. 이러한 사랑이 지나치면, 그것이 정말 내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이 쓰는 글의 어느 행간에 그 애욕의 대상이 슬쩍 들어올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사랑으로 일심동체가 되었기에, 피아(彼我)의 구별이 사라져버린 것 아닐까? 그리고 이에 대해 한때 유행했던 드라마 대사를 빌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항변해 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둘째, 표절은 완전성에 대한 욕망일 수 있다. 또 한 번 『안나 카레니나』(1877) 얘기를 해본다. 톨스토이는 특유의 도덕적 열망으로 안나에게 어떤 결말을 선사한다(미래의 독자들에게 소위 ‘스포’가 될까 봐 자세히 말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체호프는 이것이 좀 마뜩잖았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온전히 나의 생각인지, 어디선가 읽은 것인지, 그 둘이 겹쳐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는 바로 다음 단락에서 할 이야기의 논거가 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는 유사한 모티프를 지닌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1899)에서 안나에게 다른 결말을, 훨씬 다양한 가능성을 함축한 열린 결말을 선사한다.


나는 이 두 작품이 세계문학사상 각각 장편과 단편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지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미학적인 차원이든 윤리적인 차원이든 또 다른 어떤 차원이든, 자신이 흠모해 마지않는 한 작품에서 흠모해 마지않을 수만은 없는 부분을 (자신이 생각할 때) 좀 더 나은 방식으로 만들어 (역시 자신이 생각할 때) 더욱 완전한 것이 되게끔 하려는 욕망, 이 욕망은 존중되어야 한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 『안나 카레니나』의 표절이란 소린 들어 본 적이 없다. 문제는 이 완전성에 대한 욕망이 기술적인 차원에서 또 어떤 깊은 철학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고 그저 어설픈 흉내에 그치고 마는 경우다. 이런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작품들은 생각보다 꽤 많다. 그러나 난 이를 무작정 타박하고 싶지만은 않다. 계속해서 좀 더 낫게 실패하기만을 바랄 뿐이다(방금 이 문장은 베케트의 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베케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문장이다. 표절일까? 봐줄 만한 인유나 창조적 변용일까?).

 

셋째, 표절은 망각의 저주(혹은 축복)일 수 있다. 세상엔 읽기 중독에 빠진 희한한 사람들이 있다(나도 그중 하나다). 너무나 많은 것을 잡다하게 읽다 보면, 우리 뇌의 기억 회로에서 혼선이 빚어진다. 그 결과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 우선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인다. 춘향이가 인당수에 빠지기도 하고, 심청이가 수청을 거부하기도 하며, 선녀의 옷을 훔친 나무꾼이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선물로 받게 되는 수가 생기기도 한다. 다음으로 문장이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헷갈리는 일 역시 생겨나기도 한다.


난 언젠가 첫 책이 나온다면 서문엔 이렇게 적으리라, 하고 끄적거려 본 적이 있다. ‘내 글은 얕다. 하여 익사의 위험이 없다. 편하게들 읽으시라(“가벼이 물장구들 치시라”였던가?). 편하게 읽기마저 귀찮다면 냄비 받침으로라도 쓰시라.’ 쓰고 보니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특히 냄비 받침 어쩌고 하는 마지막 문장의 출처가 지금까지도 의심스러운데, 예전에 읽은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비슷한 구절을 본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꼭 닮은 문장을 찾지는 못했다. 혹시 아는 분 계시면 말씀 전해주시라.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의 노트에 끄적거리는 것이 아니고, 공적인 경로를 통해 발표하거나 출간하는 경우라면 그 정확한 출처에 대해 꼼꼼히 살피는 게 마땅하겠으나, 인간의 꼼꼼함이라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저 다독도 병인양 하노라, 하는 수밖에.

 

이상이 표절을 옹호,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행위에 담긴 마음을 이해해보기 위해 도출해낸 생각들이다. 하나같이 구차하다. 채권자 샤일록을 순식간에 채무자로 몰아넣는 포오샤(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가 된 것 같다. 의뢰인이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죄 취지로 그를 옹호하려는 변호사가 이런 기분일까? 그러나 눈앞에서 의뢰인의 1파운드의 살이 도려내지는 모습을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엄정한 정의의 집행보다 세심한 자비의 실현이 인간 세계의 더 큰 축복임을 역설하는 포오샤의 연설은 (그 의도가 살짝 의심스럽긴 하나) 감동적이다. 물론 이는 샤일록의 입장에선 다소 억울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자비의 가치를 강조하는 포오샤의 말을 그가 좀 더 귀 기울여 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는 힘들다.


위에 적은 내용들, 즉 표절에 담긴 세 가지 사연, 물론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한번 이해해보자는 취지로 펼쳐본 의견들은 이런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표절-문학계나 학계나를 가리지 않고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이를테면 스스로도 표절임을 뻔히 알면서도 특정 목적을 위해 거리낌 없이 베끼기를 일삼는 행위, 그러면서도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 채로, 그 목적 달성에 희희낙락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자비를 베풀어야 할까? 아직까지 내 마음의 너비는 그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이 문장의 주어를 ‘우리’라고 써도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왼쪽부터 폭풍우, 수상록 (출처: 알라딘)

왼쪽부터 <폭풍우>, <수상록> (출처: 알라딘)


 

T. S. 엘리엇은 “미숙한 시인은 모방하고 성숙한 시인은 훔친다”라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는 훔치는 것이 (재)창조에, 모방이 도용에 해당한다. 즉 기존의 작품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더 나은 것, 더 참신한 것으로 (재)탄생하게끔 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그 선대의 작품에 대한 예의이자, 예술(가)의 책무가 된다. 이를 다시 한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부연해본다.


켄지 요시노는 셰익스피어의 『폭풍우(The Tempest)』에서 ‘곤잘로’가 상상하는 유토피아가 몽테뉴의 『수상록』 에 나오는 「식인종에 대하여」라는 장의 내용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1)고 말한다. 덧붙이기를 셰익스피어 역시 1603년 영어로 번역된 몽테뉴의 글을 읽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표절 의혹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앞선 아이디어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확장하고 심화하여 새롭게 창조해내는가를 논하기 위해서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견해이다. 이 수긍은 켄지 요시노의 설득력 있는 논리 이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자체의 탁월성에서 비롯된다. 『폭풍우』를 읽을 때나 「식인종에 대하여」를 읽을 때 나는 언제나 깊은 감동에 젖는다. 셰익스피어가 몽테뉴의 작품을 베끼지 않고 훔쳤기 때문이다.


아이디어의 차원이든 구성의 차원이든 또 다른 어떤 차원이든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예술의 역사에서 흔한 일이다. 이 빈번한 일의 사실관계를 일일이 규명하기란 쉽지도 않을뿐더러 (때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두 개의 대성당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법하다. 로댕의 조각상 ‘대성당’(1908)과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대성당」(1981), 73년의 시차를 두고 빚어진 이 두 작품은 마치 작품 속 맞닿은 두 손처럼 상호 조응하며 의미의 상승을 이끈다. 서로 닿은 두 개의 손(즉, 두 영혼)이 만들어내는 시공간 안에서 탄생하는 이해와 공감이 거대한 건축물 대성당에 못지않은 위대함을 지닐 수 있음을 우리는 이 두 작품에서 보게 된다.


그런데 카버는 로댕의 작품을 직접 관람하거나 적어도 알고 있었을까? 이 질문은 그리 생산적인 것이 못 된다. 관람이나 인지 여부가 작품의 가치나 의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카버의 「대성당」은 그 자체로 미학적 완성의 끝을 보여주며 우리를 보다 높은 곳으로 이끈다. 이는 로댕의 ‘대성당’이라는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도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그 두 작품을 모두 감상하고 이해하며 상호조응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심화하려 할 때 두 작품은 개별적으로 더욱 빛남과 동시에 서로를 더욱 반짝이게까지 한다. 즉 홀로는 별이요, 짝으로는 별자리를 이룬다. 이런 별과 별자리가 우리 (문)학계의 하늘에도 더 많이 빛나기를 바랄 뿐이다.

1) 켄지 요시노, 『셰익스피어, 정의를 말하다』, 김수림 옮김, 지식의날개, 2012, 417쪽.

 

 

왼쪽부터 필경사 바틀비, 바틀비와 바틀비들 (출처: 알라딘)

왼쪽부터 <필경사 바틀비>, <바틀비와 바틀비들> (출처: 알라딘)


 

그런 점에서 가령 문예공모 시에 관련 분야를 신설하는 건 어떨까? 이를테면 소설 분야 오마주 부분, 시 분야 오마주 부분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가령 나는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1853)를 읽을 때마다, 우리 시대의 바틀비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작품 중에 스페인 작가 엔리께 빌라-마따스의 『바틀비와 바틀비들』(2000)이라는 작품이 있다. 멜빌의 작품으로부터 대략 150년의 시차를 두고 쓰인 이 작품은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더없이 훌륭한 오마주이자 창조적 변용이다.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나는 엘리엇이 미소 짓는 모습을 떠올린다. 저 하늘 어딘가에서 이 작품을 읽고 자신이 얘기한 ‘훔친다’의 의미를 완벽히 이해한 예로 흡족해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물론 멜빌 역시도 이 미소의 행렬에 동참하리라 믿는다.


우리 문단에도 이런 반가운 예들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음지에서 교묘히 베끼려 하지 말고, 양지에서 과감히, 그리고 섬세하게 훔쳐보는 것이다. 문예공모 시에 그러한 분야를 신설하든가, 아니면 작품을 두 편씩 받되, 한 편은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을(여기서 ‘완전히’는 매우 수상쩍은 수식어이긴 하지만…), 한 편은 기존의 작품을 새롭게 변용한 작품을 받아서 이 둘의 배점을 70 : 30 정도로 하여 수상자를 결정하는 건 어떨까?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은 바늘로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고 했다. 글을 쓰는 매 순간 이런 자세를 유지하기란 실제로 바늘로 우물을 파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게다. 그러나 이것이 어렵다 하여 남이 파놓은 우물을 함부로 탐하는 일은, 설령 아무리 제 목이 마르거나 제 논바닥이 갈라지는 상황이라 해도 쉽게 이해받을 만한 일은 못 된다. 하물며 그래 놓고도 아닌 척하는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그 우물을 과연 그 사람은 어떠한 방식으로 팠는가에 대해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우물가를 세세히 조사해보고 그 물을 한 모금 정도 마셔보는 일은 납득할 만하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물맛을 지닌 우물, 혹은 더 시원시원한 방수(放水)의 가능성을 지닌 우물을 파내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고 기울이고 또 기울이는 일, 그러다 바늘을 수백, 수천 개씩 부러뜨려 먹는 일은 마땅히 격려받을 만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우물의 물맛과 방수는 모든 마른 목과 마른 논을 축이고 적실 것이며 언젠가 또 다른 근사한 우물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12월 [이달의 답변] 우물 탐구하기와 우물 파기

- 지난 글: 12월 [이달의 질문] 한국 문단의 표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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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 문학평론가 사진
유준

문학평론가
고려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2007년 계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한 이후, 시와 소설에 대한 평론을 여러 편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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