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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시문학과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시와 철학이 띄우는 위로와 희망의 편지

인문쟁이 정해린

2015-12-30

문득 자신이 얼마나 비겁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 며칠 전, 아르바이트작업을 하던 중 담당자의 깔끔하지 못한 일처리로, 많은 사람들이 몇 주 동안 해 온 일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 놓였을 때 항의하지 못한 내 모습이 그러했다. 모 TV프로그램에서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난의 눈초리를 퍼부으면서도 바로 내 옆에 있는 반려동물에게는 귀찮다는 이유로 소리지르는 내 모습이 그러했다. 타인이 처한 부조리와 불의를 보고 입바른 소리를 하기는 쉬워도, 내가 그러한 상황에 놓였을 때 남에게 조언했던 것처럼 행동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성실이란 참이다. 거짓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지성과 능력이 비범하여도 그 지식과 능력이 약한 마음에 지배될 때 인생과 사회에 해를 끼치는 악이 되고 만다. 지식과 능력은 그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다. 선한 거지에 이끌리게 될 때 비로소 인생의 빛이 되고 힘이 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덕은 성실이다. 성실은 우리가 딛고 설 인생의 땅이고, 생활의 반석이다.-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p.160, 안병욱 


'철학의 집' 에서 이 문구를 마주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 건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나의 인문학적 소양은 아직은 얄팍한 지식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구터미널에 내려 동수리를 지나는 버스를 탔다. 동네슈퍼 주인아저씨와 버스터미널 직원 등 몇 사람에게 물어 겨우 행선지를 향하는 버스를 알 수 있었다. 하루에 세 번 밖에 운행하지 않아서 아슬아슬했다. 양구터미널에서 월명리행 버스를 타고 5분쯤 가니 동수리. 거기서부터 양구의 시골길을 감상하며 여유로운 걸음으로 약 15분 정도 거리다. 걷다보니 드디어 이해인 시문학과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을 마주할 수 있었다.



용머리 공원 內, 시와 철학의 공간

▲용머리 공원 內, 시와 철학의 공간 


입구에 들어서면 방명록이 비치된 자그마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세 가지 종류의 도장과 원고지, 펜이 준비되어 있었다. 남기고 싶은 말을 짤막하게 적고, 도장은 수첩에 찍어 남겨왔다. 1층에는 마음에 드는 글귀를 필사해보는 체험공간도 있었다. 정갈하게 놓인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옮겨적으며 글귀의 그 의미를 정성스레 새겨보았다.


필사체험공간

▲필사 체험 공간


자연을 노래한 10인의 시인 특별전시

▲자연을 노래한 10인의 시인 특별전시


1층 전시실에서는 지난 8월부터 ‘자연을 노래한 10인의 시인’이라는 타이틀로 특별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아쉽게도 이해인 수녀의 작품은 만나볼 수 없었지만, 대신 한용운, 김소월, 정지용, 김영랑, 백석, 박목월, 서정주, 박두진, 윤동주, 조지훈 등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시인들과 그 작품들을 엿볼 수 있었다.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하며 시인의 꿈을 키웠던 작품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어 옛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 직접 적어 남긴 오래된 노트를 비롯하여 그들의 첫 작품집 등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문학이라는 정적인 테마에 다양한 요소를 가미하여 보다 적극적인 체험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헤드셋을 쓰고 버튼을 누르면 귀로는 음악을 들을수 있고, 눈으로는 시를 감상할 수 있으며, 나뭇잎 모양의 메모지에 원하는 글을 적어 나무 모양의 조형물에 매달수 있다.


문학과 음악의 콜라보

▲문학과 음악의 콜라보


문학과 미술의 콜라보

▲문학과 미술의 콜라보


문학과 음악이 콜라보레이션된 공간에서는 외부의 소음에 방해 받지 않고 오직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어 시의 맛을 한층 깊이 음미할 수 있었다. 문학과 미술의 콜라보 공간은 본래 동시를 직접 지어보는 테마공간이지만, 매달려 있는 나뭇잎에는 보통 사람들의 소망이나 그들이 좋아하는 책의 글귀를 적어놓았다. 2층으로 올라가면 두 명의 철학자를 만나게 된다. 같은 해, 같은 고장에서 태어나 같은 일을 하며 90년 이상을 함께 했다는 두 철학자는 말이 필요 없는 서로의 지음(知音)이었다. 그들의 삶과 철학을 어록으로 접하는 경험도 좋았지만, 그것보다 ‘대학시절 철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고 존경하는 인물’이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친구와 선배’, ‘자랑스럽고 고마운 제자들’이라는 테마로 만든 패널들이 인상적이었다. 문득 나의 가치관에 영향을 준 인물, 친구, 후배 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언가를 보았을 때 감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나의 어떤 부분을 돌아볼 기회를 주는 공간이야말로 인문학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知音, 김형석 ․ 안병욱 선생

▲서로의 知音, 김형석 ․ 안병욱 선생


 ‘김형석 선생은 항상 일기를 쓰셨다. 쓸 때는 2년 전과 1년 전의 같은 날 일기를 읽고 새로운 무엇을 찾곤 했던 것 같다’는 문장이 여러 권의 손때 묻은 일기장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매일 한 페이지 이상의 글을 쓴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차곡차곡 쌓인 일기장을 볼 때면 그 사람의 세월이 차곡차곡 쌓여 기록된 역사로 남았다는 것이 존경스럽고, 어딘지 모르게 숙연해진다. 이 공간은 김형석 선생과 안병욱 선생의 서재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의자에 앉기만 해도 책이 술술 읽히고, 주옥같은 글이 저절로 써 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펜스가 있어 직접 앉아볼 수는 없지만, 지식인의 서재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옥상의 청춘관

▲옥상의 청춘관


김형석 선생의 서재 

김형석 선생의 서재


안병욱 선생의 서재

 ▲안병욱 선생의 서재


시를 느끼는 공간도 철학을 마주하는 공간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옥상에 마련된 ‘청춘관’이 기억에 남는다. 탁 트인 옥상에 전면 통유리로 만든 휴식처 청춘관은 강의가 있는 날에는 강의실로 활용된다.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란 의미의 파로호와 함께 푸른 산, 소박한 시골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파로호를 바라보며 사람을 위한 길에 대해 생각해본다. 뜬금없이 옥상에 강의실을 두었는지 가슴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었다.


시와 철학의 공간에서는 2015년 9월부터 ‘양구인문대학’을 운영하였다. 두 달 간 매월 둘째, 넷째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총 5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거주지와 연령에 제한 없이 40명의 수강생을 선착순으로 모집하였고, 수강료는 3만원(수강생 자치회비와 강의노트, 교재 구입비 등)이었다. 김형석 선생의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강의를 시작으로 국내 최고의 인문학자들이 강의를 맡았다고 한다. 아쉽게도 2015년 강연일정은 11월 28일을 마지막으로 모두 종료되어 관심이 있다면 2016년에 시작될 새로운 일정을 기다려야 한다.


 청무성(聽無聲). 우리는 사람의 소리만 들어서는 안 된다. 역사의 소리, 양심의 소리, 영혼의 소리, 우주의 소리를 마음의 귀를 열고 들어야 한다.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 자전적 인생론 산다는 것 p.118 안병욱 



11월, 나라 안팎으로 불행한 사건이 잇따랐다. 국내에서는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여한 60대 노인이 경찰이 쏜 물대포를 머리에 수차례 직격으로 맞고 쓰러져 사경을 헤매게 된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국외에서는 프랑스 파리에서 IS의 자살폭탄 연쇄테러로 120여 명의 사망자와 35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처참한 사건이 있었다. 당장 시집 한 권, 철학서 한 권을 읽고 인문학적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배우며 소통한다고 해서 당장 사회의 부조리로 인해 죽음 앞에 놓인 사람들, 그 주위에서 슬픔과 허무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단 것인지 의구심과 자괴감이 들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고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는 치열한 삶이 인문학적인 삶이라면, 저와 같은 저항과 투쟁의 장소가 아닌가.

글을 쓰는 지금, ‘청무성’ 이 세 글자가 머리에서 메아리친다. 안병욱 선생은 들을 ‘청(聽)’자의 마지막이 마음 ‘심(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의 소리, 양심의 소리, 영혼의 소리 등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적인 인간’, ‘인간을 위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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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소개 자세히보기] 양구인문학박물관


※관람안내

- 관람시간 : 09:00 ~ 18:00 (입장시간은 관람종료 30분 전까지)

- 휴관일 : 1월 1일, 설날․추석 오전, 매주 월요일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휴관)

- 주소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파로호로 869번길 101 (용머리 공원 內)

- ☎ 033-482-9800


장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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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린
인문쟁이 정해린

[인문쟁이 1기]


정해린은 강원도 춘천시 퇴계동에 거주한다. 어떤 곳에 소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무소속 상태이다. 현재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법’ 을 찾고 있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하는 시민대상의 모임에 참여하여, 우선 나를 깨우고, 이후 다른 사람들의 깨움에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희망하고 있다. '요즘은' 철학자 니체를 만나보고 싶다. 인생 멘토의 권유로 인문쟁이에 지원하게 되었다. 좋은 경험을 쌓게 될 수 있을 것 같아 설렌다.
elenaryn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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