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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자의 즐거움

월광수변공원 봇둑길을 시와 함께 걷다

인문쟁이 양현정

2020-01-16


수령이 400년 정도 된 느티나무 앞에 서 있다. 거대하다. 나무 기둥에 두꺼운 밧줄이 둘러져 있다. 매해 정월 대보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금줄을 걸어 동제를 지냈던 흔적이다. 나무 밑동의 옹이가 대구 달성공원 늙은 코끼리의 거무죽죽하고 단단한 엉덩이를 연상시킨다. 발 달린 거대한 코끼리가 된 느티나무가 저벅저벅 쿵쿵 걸어 다니는 상상을 해 본다. 꿈 깨란 듯, 느티나무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오동나무 가지에서 까마귀가 깍깍 운다. 둥지를 고치는 중인지 부리에 나뭇가지를 물고 있다. 


이곳은 대구 달서구 도원동 1006번지에 있는 수밭골 입구다. 500여 년 전에 박 씨라는 선비가 땅을 일굴 때 울창한 숲을 보고 추전(萩田)이라고 부르던 것이 숲밭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수밭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서 산으로 이어져 있는 수로를 따라가면 청룡산에 오를 수 있다. 마을의 아래쪽으로는 도원지를 옆에 두고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청룡산을 뒤로 하고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오후 3시에 호기롭게 겨울산에 오를 엄두 따위 버리기로 한다. 


수밭골 입구 느티나무

▲ 수밭골 입구 느티나무 ⓒ양현정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요술 칠판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야



기형도의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에 대구는 ‘대통령을 뽑은 무서운 도시,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도시, 그리고 폭염의 도시’라고 적혀 있다. 요절한 시인의 책에 적혀 있는 어떤 말은 특히 경계 밖에서 서성이는 누구에게라도 달려들어 전언이 될 가능성이 크다. 광주에서 오래 산 나는 대구와 광주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 앞에서 자주 입을 다물곤 한다. 대신 특유의 순수함으로 세상의 그늘에 밝은 기운을 던지는 ‘시인’이 많은 도시라는 말을 읊조려보곤 했다.


최근 시 전문지 ‘시와 반시’에서 <다친 새는 어디로 갔나>를 출간한 김수상 시인의 시집을 들고 청룡산과 삼필봉 도원지를 옆에 둔 월광수변공원을 찾았다. 저 멀리 봇둑길 넘어 시인이 살고 있다는 미리샘 마을이 보인다. 시인은 근처에 오면 연락하라고 했으나,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 채로 시인의 산책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356번 버스 기점인 월광수변공원은 겨울의 쓸쓸한 공원답지 않게 사람들이 많다. 주차장에도 차가 가득 차 있다. 봄이 되면 만개한 벚꽃, 산수유, 개나리를 보러 오는 상춘객들로 붐비고, 장미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월광수변공원풍경

 

월광수변공원풍경

▲ 월광수변공원의 풍경 ⓒ양현정


수변공원 광장의 스피커에서 베토벤의 월광소나타가 흘러나온다. 월광은 대덕산과 청룡산 골 깊은 계곡에 달 비친 모습을 보고 지은 달비(달배)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인데, 공원의 배경음악으로 깔린 ‘월광’소나타가 좀 과한 설정인 듯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난다. 그냥 조금 부족한 대로 두면 안 되나. 그러면 안 되나. 월광수변공원에 꼭 월광소나타를 배경음악으로 흐르게 해야 하나. 회의적인 마음이 되어 공원을 걷는다. 여름의 수변공원에서는 도원지에서 펼쳐지는 음악분수 쇼를 볼 수 있다. 특히 밤에 펼쳐지는 분수 쇼는 검은 밤의 경관을 화려하게 물들이며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고 한다. 


공원 광장을 지나 봇둑길과 연결된 월광교를 걷는다. 무심히 걷다 검은 옷 일색인 사람들이 탕탕탕탕 통통통통 나무 데크를 걸으며 오가는 속도에 밀려 한쪽으로 비켜선다. 비켜 멈춰선 자리에서 역광으로 먹빛이 된 산그늘과 봇둑길 넘어 도시의 건물을 수면에 담고 있는 도원지의 풍경을 마주한다. 한 장의 데칼코마니 같은 장면을 사진에 담는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시인의 시집을 펼친다.


 붓둑길로 이어지는 월광교, 도원지에 비친 먹빛의 산그늘, 도원지에 비친 붓둑길 너머 아파트들

 

 붓둑길로 이어지는 월광교, 도원지에 비친 먹빛의 산그늘, 도원지에 비친 붓둑길 너머 아파트들

 

 붓둑길로 이어지는 월광교, 도원지에 비친 먹빛의 산그늘, 도원지에 비친 붓둑길 너머 아파트들

▲ 붓둑길로 이어지는 월광교, 도원지에 비친 먹빛의 산그늘, 

그리고 도원지에 비친 붓둑길 너머 아파트들 ⓒ양현정 

 

 봇둑 길 걸어 수변공원 가는 길 

 잉어도 강아지도 장미도 멍석딸기도 느티도 

 나무 그늘 가에 앉은 중년의 남자도 

 손녀의 유모차를 밀고 가는 허리가 굽은 노인도 

 눈 앞에 다 드러난다 

 보이는 곳까지가 그림이다 

 그것을 보는 나도 맑고 투명한 캔버스에 그려진 하나의 대상일 뿐 

 해가 지고 밤이 오고 노인은 죽고 장미는 시들어도 

 그것들 드러낸 이 바탕의 자리는 그대로이네 

 그날 내가 본 것들은 

 이 맑고 텅 빈 캔버스가 마련한 

 그림 그리기 대회에 불려 나온 손님들일지도 몰라 

 그 캔버스 속을 다녀간 것들은 

 어린 아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쓱 밀어버리면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요술 칠판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야 

 인생, 다만 그것일 뿐인데 


 _ 김수상, <손님> 전문


시인은 봇둑길을 걸어 월광교를 지나 수변공원으로 걸어나갔고 나는 월광교를 건너 봇둑길로 간다. 월광교 나무 데크 끝에는 신발 한 켤레가 양말을 담고 홀로 있다. 순간, 쿵 내려앉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금세 신발 주인을 만났다. 맨발이다. 건강을 위해 결연히 운동하는 사람의 신발을 보고 단박에 드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리라. 


두근거리는 마음을 물리치고 봇둑길 비탈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 내려가 보니 소복이 쌓인 흰 눈처럼 부드럽고 통통한 토끼 두 마리가 오물오물 배춧잎을 씹고 있다. 듣자하니 공원의 명물이다. 산토끼냐, 집토끼냐 물으니 산토끼인지 집토끼인지 모르겠으나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다 한다. 유난히 열매를 많이 매달고 있던 수밭골 입구의 감나무가 생각났다. 추운 겨울을 나는 새들을 위해 일부러 감을 따지 않았다는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부끄러움과 훈훈함이 다시 또 생생하게 살아났다.


흙길을 홀로 걷는 맨발, 월광수변공원의 명물, 토끼 두 마리, 겨울, 유난히 많이 남아있는 감들


흙길을 홀로 걷는 맨발, 월광수변공원의 명물, 토끼 두 마리, 겨울, 유난히 많이 남아있는 감들


흙길을 홀로 걷는 맨발, 월광수변공원의 명물, 토끼 두 마리, 겨울, 유난히 많이 남아있는 감들

▲ 흙길을 홀로 걷는 맨발, 월광수변공원의 명물인 토끼 두 마리, 

이 겨울 유난히 많이 남아있는 감들 ⓒ양현정



맑고 텅빈 고요 속을 걸어다니는 한 마리 나비, 시인



봇둑길 끝은 청룡산으로 오를 수 있는 산의 초입이다. 안내판을 살펴보니 산길을 따라가면 수밭재를 넘어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던 수밭골 입구로 갈 수 있다. 비탈에 선 나무와 나무 사이 좁은 산길은 텅 비어 있었다. 텅 빈 자리를 바라보며 시인의 시를 생각한다. 텅 빈 바탕의 자리에서 나비를 본 듯도 하다. 


 비가 오면 나비는 어디서 잘까, 

 사치로운 걱정도 더러 하였으나 

 비 오는 산길을 다녀온 후로는 

 나비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빗방울 하나에도 작은 잎들 기척을 하고 

 나비는 빗속에서도 

 넓은 잎 아래를 찾아서 잘도 날아다녔다 

 머리가 자꾸 희어지는 

 나도, 어쩌면 

 맑고 텅 빈 고요 속을 걸어 다니는 

 한 마리 나비일지도 모를 일 

 빗소리에 드러난 고요, 

 눈 앞의 일들 다 드러내는 바탕의 자리, 

 그 어둡지 않은 속살 안에 안기면 

 나도 빗속을 움직이는 한 마리의 사람 나비 

 맑고 투명해서 오직 모른 뿐인 그 자리 

 나비 따라 오래 날아다니다 왔다  


_ 김수상, <모르기까지> 전문


다시 또, 산을 뒤로 하고 봇둑길을 걸어 돌아 나오는 길. 호기롭게 버렸던 수밭골 입구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산의 초입에서 산길로 들어서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는다. 미련을 다시 주워 담는다. 월광수변공원에 놀러온 다른 산책자들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봇둑길 끝 청룡산 입구에서 한참 안내판을 바라보며 실랑이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발목을 다친 새 한 마리 

 절뚝이며 꽃가지에서 

 꽃가지를 건넌다 

 외발로도 중심을 잡으며 

 꽃잎 하나 밟지 않는다 

 새의 무게를 

 하늘이 반쯤 안았다 

 연두의 그림자를 

 가지에 떨궈 놓고 

 다친 새는 어디로 갔나 

 봄 하늘 묽다 


 _ 김수상, <묽다> 전문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말을 뱉어내는 일보다, 타인과 대상의 말을 귀하게 여기며 들어주는 시인의 수줍은 얼굴을 생각하며 그가 다녔을 길을 걸어보는 일이 즐겁다. 시인은 말이 많고, 소설가는 말이 없다는 세간의 소문이 꼭 맞는 것 같지는 않다. 김수상 시인은 시인이란 끝까지 칼날을 자신에게 겨눠야 하며, 자신을 불편하게 하면서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시를 통해 삶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달콤한 인생>의 선우가 했던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는 영화 대사에 보다 수긍하는 나는 과연 칼날을 자신에게 향할 수 있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또 여러 날 여러 해 곱씹어 보는 수밖에. 


 마음에 마음을 통째 들이부었다 

 어떤 마음은 마음에 들었다 

 들지 못한 마음은 

 마음이 받아주지 않는 그곳에 

 울음 하나를 새겼다 

 검고 단단했다 

 먹빛 저녁 

 누가 자꾸 울며 따라온다 


 _ 김수상, <먹감나무> 전문  


최근 대구교육박물관에서 발행한 <대구의 산업사와 문화예술사를 통한 융복합 체험교육 개발 보고서>에는 ‘대구 지역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6‧25전쟁기 문학인들이 대거 모여들어 생활하게 됨으로써 독특한 전시 문단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대구 문단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는 점은 특별히 인식되어야 마땅하다’고 적혀 있다. ‘휴전 과정에서부터 이런 분위기는 점차 사그라졌지만 이후 대구문단은 상당기간 동안 이 전시 문단의 여진 속여 놓여’있었으며 그 후 지역 일간지, 지역 문학잡지, 동인 활동에서 파생된 고교 문예반의 약진을 통해 시의 명맥을 유지했다고 밝히고 있다. 


‘시인이 우글거리는 도시’라는 말의 어원은 이러한 역사적 시간들 속에서 시작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기형도의 산문집을 읽으며 밑줄을 긋던 시간을 압도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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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인문쟁이 5기]


글로 스스로를 세우고 위로 받았듯 내 글이 누군가를 세우고 위로해 줄 수 있기 바란다 그들의 곁에 서서 바람과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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