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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인물을 돌아보며 나아가는 미래

인문쟁이 정지안

2019-01-02

홍성을 딛고 날아오른 위인들


홍성은 충남의 서쪽에 위치해, 서해안과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다. 보기에는 평범한 농촌 마을인 이곳에서는 예로부터 훌륭한 위인들이 많이 태어났다. 고려의 명장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격파한 무민공 최영(武愍公 崔瑩 : 1316~1388), 단종복위를 꾀한 사육신(死六臣)인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問 : 1418~1456). 또한, 일제식민시대 저항의 상징인 백야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 선사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 1904~1989)가 홍성 출신이다.


김좌진 장군(白冶 金佐鎭 將軍 : 1889~1930)과 한용운 선사(卍海, 萬海 韓龍雲 禪師 : 1879~1944)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항일독립운동이라는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백야 장군은 홍성의 갈산면 남쪽 끝자락에 그리고 만해 선사는 홍성의 결성면 북쪽 끝에 그 삶의 흔적이 자리해 있다.


국가를 향한 헌신, 김좌진 장군의 생가 터


홍성 갈산 김좌진 장군 생가

▲ 홍성 갈산 김좌진 장군 생가 Ⓒ 정지안


홍성 갈산 김좌진 장군 생가 안마당 시렁

▲ 홍성 갈산 김좌진 장군 생가 안마당 시렁 Ⓒ 정지안


홍성군 갈산면에 있는 김좌진 장군 생가는 작은 산들로 둘러싸인 넓은 평지에 있다. 이곳에서 김좌진 장군이 태어나 성장했다. 생가는 원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훼손되었으나,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으로 문간채와 사랑채가 복원되었다.



홍성 갈산 백야기념관 

▲ 홍성 갈산 백야기념관 Ⓒ 정지안


생가 터 옆으로 가면 백야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기념관 입구 외벽에서 김좌진 장군이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이 새겨진 조각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는 김좌진 장군의 활약과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의 상황을 자세하고 생생하게 담고 있다. 당시 사용했던 총기류와 청산리 전투의 장면, 항일무장독립운동의 조직도 등 다양한 자료와 방법으로 관람객들에게 그 시절의 모습을 전한다.



홍성 갈산 백야기념관 내 대한독립


▲ 홍성 갈산 백야기념관 내 대한독립 Ⓒ 정지안


기념관 내에 가장 인상 깊은 전시품은 광복군의 병사들이 조국독립과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맹세나 다짐 등을 적어놓은 태극기였다. 이는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있는 원본을 복사해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글자와 함께 새겨 넣었을 그들의 굳건한 마음은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홍성 갈산 백야공원 내 마지막 말씀 비석

▲ 홍성 갈산 백야공원 내 마지막 말씀 비석 Ⓒ 정지안


또한,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 근처의 백야공원에는 하나의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장군이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순간에 했다는 말이 새겨 있다.


‘할 일이…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보다도 나라에 대한 큰 책임감이 담긴 말에서 그가 삶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홍성 결성의 만해 한용운 선사 생가


홍성군 결성면 자리한 한용운 선사 생가지에서는 생가 터, 만해사(卍海祠), 민족 시비 공원 그리고 만해문학체험관을 볼 수 있다. 주차장에서 생가 터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공약삼장(公約三章) 비석이다.


홍성 결성 한용운 선사 생가지 내 공약삼장 비석

▲ 홍성 결성 한용운 선사 생가지 내 공약삼장 비석 Ⓒ 정지안


공약삼장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인 ‘3‧1 독립선언서’에 담긴 내용이다.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한 후 한용운이 덧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위 공약삼장 비석의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면 아래와 같다.


<공약 3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하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홍성 결성 한용운 선사 생가지 내 만해동상과 생가 터

▲ 홍성 결성 한용운 선사 생가지 내 만해동상과 생가 터 Ⓒ 정지안


공약삼장 비석을 지나면 만해동상과 생가 터가 보인다. 초가지붕을 덮은 조그마한 집은 작고 초라해 보이나, 이곳에서 자란 이가 행한 일은 누구보다도 크고 위대하다. 한용운 선사는 이 자그마한 곳에서 거룩하고 큰 꿈을 꾸었을 것이다.


홍성 결성 한용운 선사 생가지 내 민족시비공원 비

▲ 홍성 결성 한용운 선사 생가지 내 민족시비공원 비 Ⓒ 정지안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의 소망을 전했다. 이를 비석에 새겨 전시한 민족시비공원을 생가 터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30~40여 개의 시비가 자리한 이곳은 한용운 선사의 ‘복종’을 시작으로, 다양한 민족 시인들의 시를 만날 수 있다. 김달진(씬냉이꽃; 사람들 모두/산으로 바다로/…), 김광섭(내가 사랑하는 나라; 지상에 내가 사는 마을 하나 있으니/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 이러라/…), 변영로(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등 수많은 시비(詩碑)가 있다.


홍성 결성 만해 문학 체험관 입구

▲ 홍성 결성 만해 문학 체험관 입구 Ⓒ 정지안


만해 생가 터와 시비공원을 둘러보고 내려오면 주차장 오른쪽으로 만해 문학 체험관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만해선사가 일생에 이뤄낸 탁월한 문학적, 불교학적 업적이 잘 정리되어 있다.


홍성 결성 만해 문학 체험관 내 만해 연보

▲ 홍성 결성 만해 문학 체험관 내 만해 연보 Ⓒ 정지안


체험관은 그의 독립운동가의 면모보다는 문학가이자 불교인으로서의 면모에 주목했다. 그러나 한용운 선사의 모든 활동은 독립운동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그의 열망이 그의 작품과 활동 속에 항상 스며들어 있었다.


백야와 만해의 삶의 현대적 의미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따른다. 현재 한국이 독립된 나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이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 김좌진 장군과 한용운 선사와 같이 모든 생을 나라를 위해 바쳤던 그들이 지금의 자유를 만들었다.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변하고 반복된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과거를 반추하는 일은 어리석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들여다봐야 한다. 과거 수많은 사람의 선택이 현재를 만들었듯이 지금 우리의 선택들이 내일의 모습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장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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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쟁이 정지안

2018 [인문쟁이 4기]


정지안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초중고까지 20여년을 살았고, 10여년 꿈이란 것 때문에 서울 생활을 했다. 그 후로 직장 때문에 충남 당진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직장에서 잘려 놀고 있는데, 여하튼 20여년 살고 있다. 이것저것 별것 없는 일을 하면서 산 세월을 합치니 50은 넘었고, 60도 내일 모레인가보다. 사람들은 언제나 파란하늘을 보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는데, 가끔은 하루 종일 하늘마저 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래도 그런 나를 위하는 사람도 역시 나 여야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살기를 바란다. 좀 느리게 살아 보기를 바란다. 내가 느리게 사는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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