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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옛날에는 북적북적 재밌었지

세일주조장 박환서 대표

엄보람

2018-07-20


막걸리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만든 것을 사 먹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집에서 술을 담그는 가양주 문화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 시절에는 동네의 수만큼이나 많은 양조장이 있었다. 당연히 맛도 조금씩 달랐다. 그것이 우리 술, 막걸리의 묘미다. 그러나 입맛이 변하고, 사람들이 양조장을 직접 찾아가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되면서 동네 양조장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그 옛날 대전에도 20여 개의 양조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형 양조회사를 빼고는 서너 곳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중 하나인 세일주조장은 오래전 산내면의 막걸리를 책임졌던 소규모 양조장이다.



우마차로 막걸리 실어 나르던 시절


세일주조장은 1963년 12월 17일에 박환서 사장의 아버지가 지금 자리에 세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향인 금산에서 계속해 오던 인삼농사를 하고, 양조장 운영은 당시 열아홉 살이던 박환서 사장이 죽 맡았다.


박환서

ⓒ엄보람


“본래는 양조장이 금산군 복수면에 있었어. 거기서 고모님이 6~7년을 했는데, 산내면 대성리(지금의 대성동)로 이전해 왔지.

옛날에는 양조장이 면에 하나씩 있었는데, 복수면에는 두 개나 있었어. 더군다나 그쪽이 오지라서 판매량도 별로 없었지.

그래서 이쪽으로 오면 시장성이 좋을 것 같았어.”


당시 대전 시내에는 양조장이 많았다. 세일주조장은 산내면에 있는 유일한 양조장이었지만, 박환서 사장은 처음 자리를 잡은 뒤 판로를 찾지 못해 5~6년 정도 고생을 했다. 인근 지역은 기존에 있던 다른 양조장들이 판로를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걸리를 팔기 위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배달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자전거랑 마차가 운반수단이었어. 만인산까지 배달하고, 정생리까지도 갔지. 우마차로 배달했는데, 산악지대라서 불편하기도 불편했어. 그래도 팔아야 하니까 가야지. 그러다가 1970년도쯤에 양조장들이 합동해서 판매 구역제를 실시하면서 ‘산내면에서 생산한 건 산내면에서만 팔아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한 거여. 그때부터 판로가 좋아졌지. 처음에는 일하는 사람 세 명으로 시작했다가 1970년쯤에는 열 명 정도 됐어. 호황시절이었어요. 그때는 하루에 천 리터는 거뜬히 팔았어. 그 후로도 2000년까지는 괜찮았지. 그러다 점점 살기가 좋아지면서 막걸리를 안 먹게 되고, 맥주 쪽으로 다 가서 막걸리는 사양산업이 된 거죠.”


옛날이야기에 한창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때쯤, 누군가 바깥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막걸리 두 병만 주세요.”

문을 여니 동네 주민인 듯 보이는 편한 차림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박환서 사장은 문밖으로 몸을 빠끔히 내밀어 마당에 있는 아들에게 막걸리를 내주라 이른다.


“옛날에는, 그러니까 1963년에는 한 말(20리터)에 200원이었지. 그때는 막걸리를 사러 오면 나무로 만든 한 말짜리 동그름한 통에다가 막걸리를 담아 주고, 가져오면 닦아서 다시 쓰고 그랬어.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이 사러오고 그랬지. 지금은 옛날에 비하면 거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서 하루에 200리터 정도밖에 안 팔려요. 차로 동네슈퍼하고 음식점 같은 데 조금씩 납품하고, 이렇게 간간이 사러 오는 사람들이 있죠. 큰 마트는 들어가지도 못해. 그래도 지켜야겠다는 애착이 있어요.”



쌈박한 맛은 밀가루가 낫고, 쌀은 은은한 맛이 낫지


“막걸리는 큰 체에다가 손으로 막 거른다고 해서 막걸리야. 막걸리를 만들려면 일단 밀가루를 반죽하고 고두밥을 쪄서 종곡균을 섞어 38~40도에서 42시간 배양을 해야 돼요. 이것을 항아리에다가 넣어 물하고 혼합해서 72시간을 발효해요. 이것이 1차 발효지. 그다음에는 또 고두밥을 쪄서 물과 누룩을 섞어 덧밥을 넣어요. 이렇게 해서 96시간을 발효시켜요. 그러니까 최소 8일은 돼야 막걸리가 완성되는 거죠. 우리는 아직도 전통 누룩을 사용해서 만들고 있어요.”


좌) 막걸리 장독대, 우) 현수막- 막걸리란! 큰체에다 모루미와 물을 붓고 손으로 막걸르기 때문에 막걸리 입니다. 모루미: 거르기 않은 원주

ⓒ엄보람


세일주조장에서 만드는 산내막걸리는 100프로 밀가루를 원료로 해서 만든다. 1963년 정부는 쌀 부족에 따른 조치로 쌀로 막걸리를 빚지 못하게 하고, 밀 막걸리나 옥수수 막걸리 등을 장려했다. 그러나 밀은 밀대로, 쌀은 쌀대로 서로 다른 개성을 지녀 쌀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밀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밀 막걸리는 색이 짙고 걸쭉하며 묵직한 맛을 내는 반면, 쌀 막걸리는 색이 비교적 맑고 깔끔한 맛을 내는 게 특징이다. 한편 밀은 냉기를 지니고 쌀은 온기를 지녀 여름에 밀 막걸리를 마시면 열기를 내려 주고, 추울 때 쌀 막걸리를 마시면 한기가 가신다고도 한다. 하지만 근래에는 오히려 밀 막걸리를 찾아보기가 힘들어 이를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 박환서 사장은 “쌈박한 맛은 밀가루가 낫고, 쌀은 은은한 맛이 낫지.”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로 두 막걸리의 차이가 단번에 가늠이 됐다.


세일주조장의 발효실은 마당 안쪽 깊숙한 곳에 있었다. 박환서 사장이 ‘외인출입금지’라고 팻말을 달아 놓은 발효실의 나무문을 ‘드르륵’ 열었다. 그 걸음을 따라 왠지 두근대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발효실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달큰하고 구수하고 아릿한 누룩향이 훅 끼친다. 발효실 안에는 가슴께까지 오는 커다란 옹기 여남은 개가 각자 맡은 일을 해내고 있었다. 안온한 공기에 발걸음을 떼기가 못내 아쉬웠다. 바로 옆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다 만든 막걸리를 병에 포장하는 병입시설이 있는 곳이다.


박환서 사장이 자루바가지로 커다란 스테인리스 통에 담긴 막걸리를 한 바가지 떠서 권했다. 한 모금 마시니 단박에 “맛있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탄산이 거의 없는 구수하고 향긋한 맛이다. 발효가 덜 된 술은 탄산 맛이 난다고 했다.


산내막걸리

ⓒ엄보람



설에는 한 달 전부터 서둘러야 했어


“옛날에는 결혼할 때나 장례 치를 때 막걸리가 필수 음료였어. 설 대목에는 말할 것도 없이 굉장히 바빴죠. 막걸리가 평소의 서너 배는 나가서 한 4~5천 리터 팔았지. 설대목이 되면 한 달 전부터 준비해야 했어요. 그때는 떡 방앗간이랑 양조장이 제일 바빴지. 1970~1980년대만 해도 그랬는데, 1990년대가 지나면서 현대화 바람이 분거야. 옛날에는 북적북적해서 재밌었지.”


한때는 10여 명의 일꾼이 분주히 일하여 꽤 소란스러웠을 양조장. 지금은 박환서 사장과 아들이 단출하게 지키고 있다. 다른 일을 하던 아들이 얼마 전부터 양조장 일을 돕고 있다고. 옛날에는 매일 작업하는 게 당연했지만, 요즘은 판매량이 많지 않아 사나흘에 한 번꼴로 작업을 한다고 했다. 박환서 사장은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이에요.”라고 담담하게 말하지만, 뒤늦게 막걸리 맛을 깨친 기자는 그런 상황이 아쉽기만 하다. “열심히 해서 소비자 기호에 맞게 하려고 해요.”라는 뒤이은 말에 든든한 마음이 들지만, 51년간 지켜 온 맛만은 그대로 지켜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대덕군에서 양조장 하시던 분들이 세천, 신탄진, 진잠 세 곳에 있는데 그분들이랑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요.

뭐라고 하긴, 다 침체돼서 어렵다 그러죠.”


양조장을 나서는 길, 보슬비가 내리는 유난히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잠깐 몸서리를 쳤다. 파전에 막걸리 한잔이 절로 생각나는 날씨다. 문득 ‘이런 날에는 옛날에도 막걸리가 잘 팔리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면 장사가 안됐어요. 옛날에 막걸리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일할 때 많이 먹기 때문에 농주라고 했어요.

비가 오면 일을 못 나가니까 자연히 막걸리가 안 팔렸죠.”


떠나기 전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번 카메라를 꺼내 오래된 현판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러자 박환서 사장은 “이것도 벌써 51년이나 됐네….허허.” 하며 웃음 짓는다.


현판과 박환서

ⓒ엄보람


소로 나르던 막걸리를 차로 나르는 시절이 되었어도 옹이의 막걸리가 익는 속도는 변함이 없다. 같은 손길과 정성을 들여야 같은 맛이 난다. 긴 세월을 지나오며 변화는 언제나 세상의 몫이었다. 현판이 처음 걸리던 그 시절, 고된 농사일을 안주 삼아 마시던 막걸리는 이제 지나간 세월을 안주 삼아 찾는 술이 되었는지도.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아 자꾸만 뒤를 돌아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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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엄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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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창간한 문화예술잡지 《월간 토마토》 전 취재기자. 기어코 묻기보다는 ‘차마’ 묻지 못할 때 가 많다. 기꺼이 이야기를 내놓는 이들에게 늘 빚을 지고 있다. 침묵 뒤에 숨은 말들을 좋아한다. 이 원고가 실린 책 《우리가 아는 시간의 풍경-도시의 숨결을 찾다》의 공동저자이다.《우리가 아는 시간의 풍경-도시의 숨결을 찾다》는 2016년 세종도서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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