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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 통하는 몇 개의 열쇠

서울시립대 박물관 전시 <서울 만화방>

인문쟁이 김은영

2019-10-01



어린 시절 공상과학 그리기를 하면 늘 해저터널을 그렸다. 하늘을 나는 비행선과 로켓 신발을 신고 구름까지 날아오른 사람, 사람처럼 걷고 말하는 로봇도 그렸다. 그리기를 하며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미래가 되면 원하는 사람은 로봇이 될 수 있고 우주를 오갈 수 있으며, 우주의 무중력을 유영하듯 깊은 바다 속을 탐험할 수 있으리라. 어린 시절의 '미래'는 서기 몇 년도로 정확히 지칭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그 오지 않은 시간에 인간은 반드시 지금보다 더 자유로울 것이라 믿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인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고민 없이, 방법 없이, 그저 믿음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기에 어느 만화영화에서 명시한 ‘서기 2020년’은 아주 먼 미래이자 세상에 없는 것들이 펼쳐질 꿈의 시간이었다.


만화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 한장면

▲1989년 KBS에서 방영된 만화영화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의 한 장면 


2020년이 멀지 않은 지금, 우주를 누비며 광선총을 쏘는 아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만화나 영화, 혹은 소설 속에만 존재한다. 어린 시절 꿈꾸던 미래 모습이 지금과 다르다고 해서 그 발전 속도에 실망했다는 것은 아니다. 공상을 공상에 그치지 않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한 걸음, 한 걸음씩, 그 노력을 이어가고 있을 테니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어린 시절 보던 만화에선 우주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만화 속 주인공은 물론이고 주인공의 능력과 미션, 대결 상대와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우주와 연결돼 있었으며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만화에는 왜 그토록 많은 우주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일까. 우주와 만화는 어떤 관계일까?



오래된 우주, 어린 시절의 만화



<서울만화방> 전시장 외관 및 입구 풍경 / 문구 : 서울만화방

▲서울시립대 박물관 정면 외관 및 전시장 입구 모습 ⓒ김은영


어린 시절의 우주를 떠올리게 하는 한 전시장이 있다. 서울시립대 박물관에서 열린 〈서울 만화방〉은 19세기 말부터 1970년대까지의 우리나라 만화 자료를 수집하여 공개한 전시이다. 6.25 전쟁 때 '삐라'에 실린 만화부터 서울을 배경으로 한 만화 모음까지. 영상이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 만화를 접하는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인쇄 만화들이다.


<서울만화방> 전시물 및 옛 만화방을 재현한 공간

▲ 〈서울 만화방〉 전시물과 옛 만화방 모습을 재현한 공간 ⓒ김은영


만화를 보기 위해선 동네 만화방으로 가야 했던 시절. 〈서울 만화방〉에는 정지된 그림과 활자화된 의성어로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상상했던, 그 시절의 만화를 전시하고 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만화책과 그 앞의 소파는 옛 만화방을 떠올리게 한다. 벽걸이 TV에선 「로보트 태권 V」가 흘러나오고 누군가 소파에 기대 앉아 그 빛바랜 영상을 바라보고 있다. 만화영화 속 ‘착한 쪽’과 ‘나쁜 쪽’은 치열하게 싸우고 승리는 언제나 착한 쪽 몫이다. 배경이 우주로 넓혀져도 그 선악 구도는 바뀌지 않는다. 광활한 우주에는 악당이 있기 마련이고 그 반대편에는 정의와 평화를 지키려는 선의의 수호자가 있다. 대결에 필요한 것은 더 뛰어난 무기와 초능력이며 같은 편끼리 협동심도 중요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대결에서 ‘이기는 쪽’에 자신을 대입하곤 한다.


만화책 표지 / 문구 : <우주결사대> 제 1권 <독수리5형제> TBC TV AFKN TV 절찬 방영중인 장편 과학 만화영화

▲1977년에 발간된 만화책 「우주 결사대」 표지와 1979년 TBC에서 방영된 만화영화 「독수리 오형제」 극장판 포스터 ⓒ김은영


그렇다면 만화는 단지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우주와 미래라는 배경을 사용한 것일까. 가령 '우리 동네'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보다 '지구'나 '우주'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 더 크고 흥미진진할 테니 말이다. 우주의 또 다른 존재인 외계인은 어떨까. 조금씩 다르면서도 몇 가지의 공통점(머리는 크지만 팔다리는 짧은)으로 묶일 수 있는 만화 속 외계인은 지구인을 도와 평화를 지키기도 하고 때론 절대 악이 되어 지구 정복을 노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 중에는 정의의 수호나 악당과의 대결과는 동떨어진 외계인도 있다. 



‘깐따삐아 별’에서 온 외계인


<아기 공룡 둘리> 속 한 장면, 도우너

 ▲타임코스모스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는 도우너. 

(이미지 출처 : KBS 「아기공룡 둘리」의 화면 캡쳐본)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는 좀 색다른 외계인이 나온다.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고길동 집 마당에 불시착한 이 외계인의 이름은 '도우너'다. 빨간 코에 빨간 타이즈를 입은 이 금발의 외계인은 지구와 십만 광년 떨어진 ‘깐따삐아 별’에서 왔다. 화가 나면 박치기로 벽을 부수고 기분이 좋으면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기분파로 자신은 고향 별에서 ‘온따삐아 별’로 가는 도중 '타임코스모스'가 고장 나는 바람에 지구에 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도우너의 바이올린 모양 우주 이동 장치인 타임코스모스

▲ 도우너의 '타임코스모스' 

(이미지 출처 : KBS 「아기공룡 둘리」의 화면 캡쳐본)


'시간'과 '우주'라는 단어를 이어붙인 이 타임코스모스는 중력과 무중력은 물론 미래와 과거를 오갈 수 있는 궁극의 교통수단이다. 겉보기엔 지구의 바이올린이란 악기와 매우 흡사하다. 바이올린처럼 몇 개의 현이 고정돼 있고 울림통이 있으며, 현을 조율한 다음 활로 문지르면 작동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깨에 걸치는 것이 아니라 울림통 위에 앉아 '깐따삐아!'라고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여행을 하는 도우너와 둘리 친구들

▲ 타임코스모스를 타고 '깐따삐아!'라고 외치는 도우너와 시간 여행을 하는 둘리와 친구들 

(이미지 출처 : KBS 「아기공룡 둘리」의 화면 캡쳐본)


마치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 음악의 시공간이 펼쳐지듯 타임코스모스가 작동하면 비현실의 세계가 펼쳐진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고장이 잦다는 것. 도우너는 여러 번 혼자 쪼그리고 앉아 타임코스모스를 수리하지만 기계는 원하는 타이밍에 단번에 작동한 적이 없다. 이 변덕스러운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은 만화 캐릭터들 중 가장 어린 희동이다. 희동이는 도우너가 애지중지 하는 타임코스모스를 거칠게 다룬다. 누군가의 머리를 내려치는 망치로 쓰기도 하고 파리채로 때리기도 한다. 그런데 희동이의 방식이 기계를 작동시킨다. 우주의 온갖 물리법칙을 가볍게 뛰어넘는 타임코스모스가 기계의 작동 원리를 무시한 채 그저 '느낌'대로 행동하는 희동이의 엉뚱함에 반응하는 것이다. 


희동이가 작동시키는 타임코스모스

 ▲ 파리채로 멈춰버린 타임코스모스를 작동시키는 희동이 

(이미지 출처 : 「아기공룡 둘리」의 화면 캡쳐본)



엉뚱할수록 더 멀리



만화의 세계에선 어린아이일수록, 이치에 맞지 않는 방법일수록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열린다. 이 엉뚱함은 일상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을 바꾸기도 한다. 공룡인 둘리는 여자 인간인 '영희'를 '오빠'라고 부른다. 외계인인 도우너는 고길동과 그의 가족들을 '애완동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동네 사람들은 둘리와 도우너를 '개'와 '오리' 라 생각한다. 공룡과 외계인, 그리고 인간은 서로를 각자의 틀 안에 넣어 해석하는 것이다. 도우너가 처음 희동이를 봤을 때 '이거 먹는 거야?'라고 말한 장면을 봐도 그렇다. 한 살짜리 아기도 차 한 대를 거뜬히 들어 올리는 깐따삐아 별의 세계에선 지구의 질서와 개념들이 오히려 말이 안 되는 엉뚱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그것이 만화의 세계이고, 그렇기에 그 세계에선 더 멀리, 더 자유롭게 우주라는 미지로 갈 수 있다. 


우주로 여행을 떠나는 둘리와 친구들

▲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둘리와 친구들  

(이미지 출처 : KBS 「아기공룡 둘리」의 화면 캡쳐본)


또 하나, 만화 속 캐릭터가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이유가 있다. '친구는 만났지만 일억 년 전' 엄마를 그리워하는 둘리, 불시착한 지구에서 '애완동물'에게 구박을 받으며 사는 도우너, 서커스단을 탈출한 또치와 무명가수 마이콜, 그리고 역시나 엄마와 떨어져 '형아'만 따라다니는 희동이까지. 우주라는 미지로 떠나는 그들은 저마다 하나씩 쓸쓸하고 서글픈 마음을 가졌다. 어쩌면 타임코스모스가 바이올린 모양을 닮은 것도 그들의 마음이 바이올린의 음색과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기 공룡 둘리> 극장판 포스터와 <서울 만화방>에서 상영중인 만화영화 <태권V> / 문구 : 우주를 난장판으로 만들꺼야!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우리동네 만화방

 ▲ 1996년 「아기공룡 둘리」 극장판 포스터와 전시 〈서울 만화방〉에서 상영중인 「태권V」 영상 ⓒ 김은영


〈서울 만화방〉 전시는 옛 만화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통로였다. 그 만화들에서 보던 어린 시절의 우주는 어떻게 해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밤하늘 저 멀리 빛나는 별빛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 없는 것, 오지 않는 것을 꿈꾸는 아이의 마음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그리워하는 그 이상한 시간의 세계를.



장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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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쟁이 김은영
인문쟁이 김은영

2019 [인문쟁이 5기]


서울에 살며 일하고 글 쓰는 사람. 비와 냉면을 좋아하고 자서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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