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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공간

동춘당

인문쟁이 양재여

2019-01-10

대전은 조선의 대유학자 송시열을 배출한 선비의 고장이다. 그가 후학을 양성했던 ‘남간정사’와 더불어 단아하고 절제된 조선의 건축미를 대표하는 ‘동춘당’은 대전의 역사적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이종형제인 송시열과 학문적, 정치적으로 함께한 조선 중기의 학자 송준길이 자신의 호를 따서 건축한 별당이다.


▲ 동춘당 공원

▲ 동춘당 공원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에 자리하고 있는 동춘당은 세월의 변화 속에서도 곧은 절개를 지키듯 아파트 숲 가운데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대덕구에서 동춘당 공원을 조성한 이후 이곳에는 시민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동춘당 뒤편으로는 유형 문화재 제3호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종택이 있고,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 가묘(동춘당 4대조의 신위를 모신 곳), 별묘(동춘당 선생의 사당) 있다. ‘송씨가묘’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별묘는 문이 잠겨있어 일반인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동춘당 가묘, 별묘

▲ 동춘당 가묘, 별묘



기호학파의 중심에 섰던 동춘당 송준길


효종의 북벌론을 주도한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은 마치 ‘바늘과 실’ 같은 존재였다. 송준길은 송시열보다 한살이 더 많은 숙부였는데,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한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시대를 향유하며 조선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동료이기도 했다. 기호학파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아우르는 기호 지방에서 율곡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는 학파를 일컬었고, 바로 그 중심에 송준길과 송시열이 있었다.


보물 제 209호 동춘당

▲ 보물 제 209호 동춘당


송준길은 효종 때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임금으로부터 ‘불천위 신위’를 받은 대학자였다. 이는 나라에 큰 공로가 있어 후손들이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기를 나라가 허락한 것으로 송준길의 인품과 학문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가름할 수 있다. 


송준길의 별당인 ‘동춘당(同春堂, 보물 제209호)’은 대전에서 유일한 국가 보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다.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송준길은 지역 사회의 문화 교류를 위해 동춘당에서 독서와 강학 등을 가르치며 열린 학문의 장을 펼쳤다. 그 앞에 서서 학문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을지 상상해보니 당시의 열띤 토론이 창호지 문을 넘어 들려오는 듯하다.



학자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담은 별당


동춘당

▲ 동춘당 

 
 

‘동춘당(同春堂)’은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아라’는 뜻으로 송준길 선생의 아버지가 처음 세웠던 건물을 옮겨 지은 것이다. 현판은 송시열이 직접 쓴 것으로, 송준길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의 일이다. 친구이자 동료였던 송준길을 먼저 보내고 그가 없는 집에서 현판을 쓰던 송시열의 마음은 얼마나 적적했을까. 긴 세월이 흘러서도 누군가를 향한 다정함, 그리움, 그리고 슬픔은 현판 위에 오롯이 새겨져 있을 터였다.


동춘당 사주문

▲ 동춘당 사주문


동춘당 낮은 담장

▲ 동춘당 낮은 담장


사주문을 통해 동춘당에 들어설 때는 보통사람의 키보다 낮은 높이 탓에 누구든지 몸을 숙여 들어와야 한다. 들어오는 사람이 저절로 예를 갖추게 만드는 셈이다. 이처럼 사소한 부분에서도 항상 겸손하고, 모든 사람이 예를 존중하도록 가르친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뜻을 엿볼 수 있다. 


별당 주위는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낮은 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과 인간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으려 한 송준길의 높은 학문적 경지가 느껴지는 듯하다. 건물의 단아하고 화려하지 않은 절제미 또한 이러한 생각에 힘을 실어준다.


‘들어열개문’으로 문을 들어 올리고 있다

▲ ‘들어열개문’으로 문을 들어 올리고 있다. © 공공누리


300년 전 건축물인 동춘당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짜 맞추기 공법으로 세워진 것이 특징이다. 오른쪽 4칸 대청과 왼쪽 2칸은 온돌방이고, 전면은 쪽마루로 이뤄져 있다. 끝이 살짝 올라간 학 날개 모양의 팔작지붕은 특유의 우아한 자태로 주목받는다. 특히 눈에 띄는 구조는 문이 사분합(문짝이 넷으로 열리고 닫히는 문) ‘들어열개문’으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태는 문 아래를 들어 처마 쪽의 들쇠에 걸어 올리면 무더운 여름날에도 부채 하나로 여름을 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시원하다고 한다. 이처럼 자연의 빛과 바람을 집안으로 들임으로써 자연과 인간은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



조선 시대부터 계승된 빛나는 유산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학문적 수양뿐 아니라 시, 서, 화에 능통한 학자를 최고의 학자로 여겼다. 송준길은 학자이자 정치가로도 유명했지만, 17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대서예가이기도 했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그들만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양송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냈다. 철학과 작가 정신을 글에 녹여내어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이 커다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양송체는 당시 기호학파 문인들과 송씨 가문을 중심으로 추사체가 등장하기 전까지 조정과 향리에서 선호하여 사용되었다. 중후하고 웅장한 기운이 강한 송시열의 서예와 달리, 송준길은 화평하고 온화한 기운을 담아 대의와 절개를 품은 기질이 글자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손자의 사랑이 담긴 송준길 행초 서증손병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남은 섣달 몰아서 봄바람 만들려 했더니 다만 추위 속 매화가 맨 먼저 피어나네 듬성듬성 핀 꽃 잡아 눈과 다투지 말고 맑고 고운 자태 달빛 속에 갈무리하라 숭정기유 사월 춘옹이 손자 병하에게

▲ 손자의 사랑이 담긴 「송준길 행초 서증손병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송준길 행초 서증손병하」는 송준길이 64세 때 손자 송병하에게 써준 글로, 부드러우며 강렬한 서체가 묻어나는 송준길의 대표 작품이다. 송나라 양시의 칠언절구인 ‘저궁관매기강후’를 행초로 기록한 것인데, 송준길이 남긴 필적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폭으로 장지 네 장을 이어 붙였다. 수증자 손자 병하와 1669년이라는 필사연대의 기록으로 그 가치를 더하고 있으며 현재 보물 1672호로 지정되었다. 추운 겨울에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하는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이 느껴지는 시이다.


소대헌 - 호연재 고택

▲ 소대헌 - 호연재 고택


동춘당공원에는 송준길의 손자 송병하의 가족이 살던 소대헌-호연재 고택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호연재는 소대헌의 부인으로 조선 당대의 여류시인으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다. 송준길의 종택에서는 지금까지도 후손이 거주하며 직접 전통주를 빚는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고, 소대헌–호연재 고택에서는 평생학습교육원의 여러 강좌가 열려 학문의 가르침을 여전히 계승하고 있다. 조선의 한 시대를 풍류하고 호령했던 역사적 인물의 장소. 그곳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외로운 고택이 아닌, 누군가가 조상의 삶을 이어 오늘날까지 그 뜻을 계승하는 공간으로 남아있음에 감사하다.


장소 정보

  • 대전동춘당
  • 동춘당
  • 송준길
  • 보물제209호
  • 동춘당사주문
  • 들어열개문
  • 양송체
  • 소대헌
  • 호연재
인문쟁이 양재여
인문쟁이 양재여

2019 [인문쟁이 4기, 5기]


대전의 골목 골목을 거닐고 대전의 잊혀져가는 곳을 기록하고 대전의 축억을 기록하는 대전을 사랑하는 아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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