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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를 좇아 인문유랑을 떠나며...

황풍년

2018-03-13

유난히도 추운 겨울을 지내고 맞는 새봄인지라 감흥이 각별하다. 봄볕은 더욱 애틋하고 따뜻함을 누리는 기쁨이 새삼 짜릿하다.
엊그제 풋풋한 봄동배추가 밥상에 올랐다. 잘깃잘깃 씹히는 식감이 일품이었다. 겨우내 시린 바람을 피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던 시간만큼 제 속 깊이 품었던 향긋하고 달큼한 맛을 한껏 토해냈다.

“잉! 여름엔 살이 찌고 겨울에 맛이 들지.”
벌써 5년 세월이 흘렀다. 바닷바람 세차던 엄동의 새벽녘, 그물에 걸린 숭어를 따내던 전남 영광 두우리갯벌의 팔순 어부가 생각났다. 쫀득하고 담백한 겨울 숭어의 풍미 또한 모진 한파에 부대끼며 깊어지는 맛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우리네 어르신들이 노상 되뇌는 “사람도 고생을 해본 뒤라야 듬쑥하니 철이 든다”는 지론을 자연의 이치로 환히 밝혀주신 게다.
그렇다. 고난과 시련의 세월을 맨손 맨몸뚱이로 헤쳐 온 장삼이사의 순정한 인생스토리라야 철든 사람만이 가진 진진하고 내밀한 향기를 뿜어낸다. 부나 권력을 이룬, 빼어난 소수의 성공담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저릿한 재미와 물큰한 공감이 일렁인다.
새봄 설레는 마음으로 사람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까닭이다.

쇠락해가는 구도심에 붙박힌 아주 오래된 이발소 풍경, 시골마을 구순 노인의 견결한 삶의 철학이 배인 ‘애지중지 소장품들’의 속내, 엄혹하던 시절에 가난한 예술가들을 따뜻하게 품어온 선술집의 사연, 4·3의 한을 절절하고 애틋한 제주어로 노래한 할머니 시인, 어마어마한 댐 건설이 불러온 작은 마을의 변천사 속에서도 옛것들을 품어온 내력….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강원도 등 지역은 다르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머지않아 우리들의 기억에서 쉬이 사라질 법한 고만고만한 내용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욱신거리고 광포한 개발독재가 인권을 짓누르던 불우한 시대를 관통해온 사연들이다. 너나없이 빈한했으나 끈끈한 인정을 나누었고 뜨거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혀온 생생한 체험담들이다.

 

그 무수한 사람살이의 총합이 오늘의 삶과 문화를 지탱하는 근원적인 힘이요 또 내일의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다.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다독이는 탁월한 기억이요 기록이다.        
무엇보다도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 저마다 혼신을 다해 살아낸 삶으로 도달한 궁극의 사람다움을 만나게 된다. 한데 모여 유장한 역사의 강물을 이뤄낸 자잘한 물방울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희열이 있다. 새삼스레 밀려오는 인간존엄의 각성은 이내 스스로의 자존감을 곧추세워 쿵쿵 심장을 울린다. 


“꽃 중에 질로(제일로) 이삔 꽃은 사람 꽃이제.”
아지랑이 고실거리는 들판에선 호미소리 괭이소리 쟁쟁 커지고, 강퍅한 세상 고단한 삶에 용기를 북돋는 어르신들의 씩씩한 추임새도 들려온다.
정직한 노동으로 한생을 이룬 사람 꽃의 향기를 좇아 즐거이 유랑을 떠나봄 직한 계절이다. 인문의 가치에 매료돼 진정 사람다움을 갈망해온 누구라도 기꺼이 동행이 되어 오순도순 길을 떠나면 얼마나 좋으리.

아! 팔도강산 이 골 저 골 사람살이는 굽이굽이 유장도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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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황풍년
황풍년

월간 <전라도닷컴>, 도서출판 '전라도닷컴'의 편집장 겸 발행인으로 전라도 어르신들의 말씀과 오래된 마을을 기록하는 책과 잡지를 펴낸다.
저서로 <풍년식탐>, <촌스러움의 미학> 등이 있다.
* 월간 <전라도닷컴>은 오늘 아니면 기록하지 못할 전라도 사람, 자연, 문화를 기록하는 잡지이다. 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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