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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마을을 찾아서

광주에 조성된 고려인 동포들의 정착지

인문쟁이 김경민

2019-10-29

 

고려인 마을의 이국적인 건물 / 문구 : 고려인센터

▲고려인마을 풍경. 한국적인 2층 건물에 러시아 색채가 덧붙여져 묘한 느낌을 준다. ©김경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2동 산정공원 일대는 이국적인 건물들과 러시아어, 한국어 공용표기가 많이 보인다. 곳곳에서 낯선 러시아어 대화가 들리면서도 상점에서는 익숙한 한국 노래가 흘러 흡사 외국의 한인 타운을 방문한 느낌을 준다. 이곳은 일명 ‘고려인마을’로 불리며, 고려인이라는 재외동포들이 정착하여 지내는 곳이다.



'고려인'은 누구인가? 



1910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국권 침탈과 강압적인 통치 방식에 반발한 많은 한인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또는 살기 위해) 한반도를 떠나 만주, 연해주, 미주 등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중에서 연해주에 정착했던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 서기장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 일대로 강제 이주했는데, 이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고려인마을 상가 건물  / 문구 : 세종약산 010-6378-5390

▲ 고려인마을 어느 상가 건물 모습. 한국어와 러시아어가 같이 보인다. ©김경민



고려인의 행적 



1937년 소련의 서기장 스탈린은 일본 스파이의 침투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연해주 지방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동시켰다. 명령에 불복하는 사람들과 지식인들은 숙청되었으며, 마치 죄인 호송열차 같은 열악한 기차 시설 탓에 이주 과정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오랫동안 일구어 비옥해진 연해주에서 쫓겨나 당도한 곳은 돌이 굴러다니며 잡초가 무성한 척박한 땅이었다.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게 된 한인들은 특유의 근성으로 벼농사를 성공시키는 기적을 만들어내며 중앙아시아에 서서히 적응해 나갔다. 하지만 적응하는 동시에 조국과의 연결은 점차 약해졌다.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거주와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945년 한반도 해방의 기쁨을 고려인은 함께 만끽할 수 없었다. 또한 소련은 각 민족의 모국어 사용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고려인도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고려인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정체성이 희미해졌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은 대체로 민족 단위로 분립되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으로 각 민족은 독립하였지만 고려인은 확고한 정치체제를 확립하지 못해 민족 국가를 만들지 못하였고, 중앙아시아 각국으로 흩어졌다. 신생국가에서도 고려인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였는데 각 국가가 배타적인 민족주의 정책을 전개함에 따라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일부는 조상의 고향인 연해주, 한국으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고려인마을 주민지원센터 / 문구 : 고려인 광주진료소 동포체류지원센터

▲ 고려인마을 주민지원센터. 진료소 외에도 라디오나 tv를 송출하는 방송국도 있다. ©김경민 


2005년 고려인의 ‘대모’ 격인 신조야 여사가 지금의 자리에 30명의 고려인을 위한 정착지를 마련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점차 확대되어 2019년 현재 약 3000명의 고려인이 이곳에 살고 있다. 



고려인마을 협동조합 



엄밀히 말해 고려인마을은 지명이 아니라 사회단체이다. 공식적으로 ‘고려인마을 협동조합’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들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2동에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일대를 고려인마을이라고도 한다. 거리 곳곳에 이색적인 간판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러시아어와 한국어가 같이 쓰인 간판을 보고 있으면 외국에 있는 ‘한인타운’을 방문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중 가장 ‘핫하다’는 ‘고려인마을 가족카페’라는 이름의 식당에 가보았다. 들어가자마자 이국적인 풍취가 눈과 코를 자극하였다. 메뉴판에는 만두, 샐러드 등 익숙한 음식도 있었지만 보르시치(토마토스프), 양고기 꼬치구이 등의 생소한 음식이 더 많았다. 종업원들도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한국어에 서툴렀고, ‘바디 랭귀지’와 짤막한 영어로 겨우 음식들을 주문해 먹어보았다(솔직히 내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식후에 고려인의 정착과 생활을 돕기 위한 센터를 방문했다. 한국식 주택 사이에 세워진 이 건물은 색채나 모양이 주변의 건물들과 확연하게 차이 나서 더욱 눈에 띄었다. 센터에는 고려인 4,5세대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도 운영하고 있는데 봉사활동 겸 이곳을 견학하였다. 센터에서 만난 아이들은 동양인 특유의 두상과 서양인의 눈매를 동시에 가져 고려인의 유랑의 역사가 보이는 듯하였다. ‘안녕’하고 건네는 인사에 아이들은 수줍은 듯 웃으면서 러시아어로 무어라 답을 했다. 아마도 러시아어로 인사를 한 것이었으리라. 


고려인마을 아동센터 간판 / 문구 : 다문화아동 커뮤니티센터

▲ 고려인마을 더문화아동 커뮤니티센터 ©김경민 


처음 만나는 어색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인 아이들은 밝은 모습으로 방문자를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신기했는지 어린아이다운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아직은 한국어가 서툰지 대화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세대가 지났기 때문에 순혈 한국인 아이들과는 모습이 다른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랑하고 활기찬 모습은 여느 한국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무적자에서 동포로

 

 

제3조(외국국적동포의 정의) 법 제2조 제2호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을 말한다.

 1. 출생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했던 사람(대한민국정부 수립 전에 국외로 이주한 동포를 포함한다)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사람

 2. 제1호에 해당하는 사람의 직계비속(直系卑屬)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사람

 

한때 이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자신의 국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재외동포의 범위를 ‘동포 3세’까지로 한정하는 법령 때문이었다(재외동포법 시행령). 만 20세가 되었을 때 취업비자 또는 학업비자를 신청하지 않는다면 부모님이 떠나왔던 국가로 돌아가야만 했다. 즉, 대학 입학과 취업만이 살길이었다. 하지만 올해 7월 법령이 개정되면서 이러한 걱정은 줄었다. 위의 개정된 재외동포법으로 고려인의 자손으로서, 그리고 동포로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는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거의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재외동포 체류자’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고려운 4.5세대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 / 현수막 문구 : 광희학교 고려인마을 청소년 역사교육

▲ 고려인 4,5세 아이들의 모습. 천진난만한 모습이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역사콘텐츠제작팀 광희 



에필로그 



센터를 나와 산정공원 쪽으로 가다 보면 커다란 표지판들이 곳곳에 보인다.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는 방법, 수거해 가는 날짜 등이 적혀 있는 표식에는 한국어 외에도 영어, 러시아어, 그 외 중앙아시아의 언어로 그 내용들이 쓰여 있다. 갓 이주해 온 사람들을 위한 작은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무단투기를 금지하는 경고 표시판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당신의 조국은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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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권 김경민
인문쟁이 김경민

2019 [인문쟁이 5기]


1994년 6월생. 평소에 역사를 좋아해 '역사 덕후'로도 불리며 그의 가방속에는 항상 역사책이 있다고한다. 현재 '역사콘텐츠제작팀 광희'의 일원으로써 광주,전남의 역사를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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