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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5.18은

5‧18기념공원에 가다

인문쟁이 김경민

2019-07-26


5‧18 민주화운동(1980.05.18~27)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등교를 막는 계엄군들에게 저항하며 시작된 이 운동은 당시 전남 도청으로 시위대가 이동하면서 점차 규모가 커졌다. 이 민주화운동을 막기 위해 군부는 공수부대에게 ‘화려한 휴가’를 주며 시위대를 공권력으로 진압하고자 했다. 최루탄과 곤봉으로 무장한 군인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근처를 지나가는 시민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5월 21일, 구(舊) 전남 도청 앞에서 대치하고 있던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시위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도청 청사에 걸려있는 태극기를 마주하며 애국가를 불렀다. 계엄군은 기다렸다는 듯 시위대에 조준 사격을 가했다. 국민을 지키기 위한 조직이 국민들에게 총을 겨눴던 것이다. ‘설마 우리에게 총을 쏘겠어?’라고 생각하며 무방비로 앞을 지키던 시위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도청 앞 금남로 일대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고, 미처 피하지 못한 시민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이에 광주 시민은 경찰서와 탄약고 등에서 무기를 탈취했고, 시민군을 편성해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다. 편성된 시민군은 곧 전남 도청을 점거하였고 계엄군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실은 계엄군의 ‘전략적 후퇴’였지만, 당시 광주 시민은 독재에서 해방된 자유를 잠시나마 만끽했다. 


5월 26일, 계엄군이 곧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얻은 시민군은 끝까지 항전할 사람들만 남고 학생, 여성 등은 모두 귀가 조치 했다. 아무리 기세등등한 시민군이라도 잘 훈련된 군대를 이기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몰고 광주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시민군은 계엄군에게 처절히 패배했고, 오전 5시경 진압 작전은 종료되었다. 그날 아침 뉴스에는 ‘광주의 폭동이 완전히 제압되었으며, 시민은 사상자가 없고, 폭동자 사망 2명’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광주는 ‘폭동’이 발생한 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야만 했다. 주범인 신군부 세력은 승승장구하며 국가 최고 지도자가 되었던 반면, 피해자인 광주 시민은 상처를 가슴 속에 품어야만 했다. 그렇게 5‧18의 불씨는 꺼져 가는 듯했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1987년 6월 29일 직선제 개헌 약속을 받아내며 5공화국이 막을 내리자, 5‧18에 대한 진상 규명이 시작되었다. 진상 규명의 범위와 각 정권의 의지에 따라 5‧18은 공식 명칭이 수시로 바뀌었다. 전두환 집권기에는 ‘광주 사태’로 불렸고, 6공화국의 시작인 노태우 정권 때는 ‘광주 민주화운동’, ‘문민정부’ 시기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로 불린 김대중 정부 시기에 이르러 ‘광주’를 뺀 ‘5‧18 민주화운동’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 이는 5‧18이 광주 지역으로 한정할 수 없는 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2011년 9월, 각고의 노력 끝에 5‧18 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제 5‧18은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민주화운동 중 하나가 되었으며, 광주는 명실상부 세계 민주주의의 성지가 되었다. 최근 홍콩 민주화 시위 중 5‧18민주화운동의 상징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의 5.18 민주화운동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명예 회복과 진상 규명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가해자인 신군부와 그 추종 세력의 방해로 진상 규명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전두환은 지속적으로 5‧18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폭동’이라고 주장했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5‧18의 진실을 날조하거나 인터넷 상에서 조롱하는 등의 방법으로 광주 시민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주었다. 



5‧18 기념공원, 광주 시민의 생활이 되다



광주광역시에는 5‧18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유적지나 기념비가 많다. 5월 18일 시위가 시작되었던 전남대학교, 민주화운동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구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 민주투사들이 감금되었던 상무대 영창(현 5‧18 자유공원), 그날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망월동 묘지 및 5‧18 민주묘지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5‧18 기념공원은 광주 시민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공간이다. 


5.18 기념공원 안내도

▲ 5‧18 기념공원 안내도. 광주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시민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김경민 


광주광역시 서구 쌍촌동에 위치한 기념공원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비교적 큰 규모의 공원이다. 겉모습은 여느 공원과 다름없다. 운동하러 오는 사람, 가족과의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사람, 산책을 즐기는 사람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거대한 언덕을 끼고 있는 이 공원은 과거 군부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부대가 이전하면서 시에서 그 부지를 무상 양도받아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기념공원은 크게 기념문화관, 추모 공간, 산책로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공간은 공원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건물인 기념문화관이었다. 이곳은 5.18에 관련된 전시 행사가 주로 열리는데, 내부에 5‧18 당시 시가전을 미니어처로 구현해 놓아 그때의 상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매월 다른 기획의 전시 행사를 진행한다. 방문한 날은 안타깝게도 준비 기간이었는지 개방하지 않았다. 


원형 광장에 있는 시민군을 본 뜬 조형물 모습

▲ 원형 광장에 있는 시민군 조형물 Ⓒ김경민

 

기념문화관을 나오면 넓은 원형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광장의 끝부분에는 시민군을 묘사한 조형물이 서 있다. 두 명의 시민군이 다쳐 쓰러진 시민군을 부축하는 모습이다. 그 뒤로 물결 모양의 기둥 수십 개가 서 있다. 넓은 시야로 보면 기둥의 군락이 모여서 하나의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원형 광장의 흰 바닥과 조화를 이루며 기둥들이 태극모양을 형상화하고 있다. 시민군 동상은 각 조형물이 표현하고자 하는 영역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5‧18민주화운동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지하 추모 공간에 있는 어머니 상. 축 늘어진 아이를 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추고 공간에 있는 어머니 상

▲ 지하 추모공간에 있는 피에타를 연상시키는 어머니 상. 앞 쪽에 있는 역사의 큰 물결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듯 하다. Ⓒ김경민


시민군 동상의 뒤쪽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추모 공간으로 통하는 계단이다. 5‧18 당시 희생되었던 이들의 이름이 벽면에 가득히 적혀 있다. 그 넓은 벽면을 가득 채운 이름을 보고 있으니, 당시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는지 재차 실감하게 되었다. 둥근 벽면에 빼곡히 쓰인 넋을 대변하듯, 추모 공간 중앙에는 죽은 소년을 안고 서 있는 어머니의 동상이 자리한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시키는 동상이다. 맥없이 쓰러진 소년을 안고 있으면서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열 보다 더 진한 슬픔이 느껴진다. 

 

지하에서 올려다 본 시민군 조형물

▲ 지하 추모공간에서 바라본 시민군 조형물 Ⓒ김경민

 

 

5‧18 RED FESTA,청년에게 축제가 되다



5월이 되면 광주는 매우 바쁘다. 5‧18기념식 행사도 진행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행사들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 중 5‧18 관련 축제가 바로 ‘5‧18 RED FESTA’이다. 2004년부터 꾸준히 진행되어온 레드 페스타는 ‘민주, 인권, 평화’를 주제로, 5‧18의 정신을 기리고자 만든 축제다. 매년 약 1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한다. 참가자 대부분은 청소년이다. 축제 콘텐츠는 부스에서 열리는 다양한 프로그램, 플래시몹, 토크쇼 등이 있으며, 5‧18 당시의 상황을 연출한 퍼포먼스로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올해는 주먹밥 만들기 체험, 5‧18 사적지 맞추기 등이 진행되었고, 플래시몹은 ‘임을 향한 행진곡’을 이용하였다. 



에필로그 

2019년 5월 18일에 생각한 것 



전날인 5월 17일 밤부터 광주‧전남 지역에는 비가 세차게 내렸다. 학교에서 시험 공부 중이었는데 우산이 없었던 터라 비가 그치면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한 시간 동안 내린 비에 쓸려 내려갔다. 광주와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세찬 비가 내렸고, 다른 지역은 야구 경기가 진행될 정도로 마른하늘이었다. 그렇게 비를 흠뻑 맞고 집에 가는 도중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이 비는 39년의 세월을 견뎌온 억울한 영혼들의 눈물이 아닐까. 그 억울한 사람들에게 권력은 어떤 만행을 저질렀던가. 


5월 18일 당일, 나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서야 했다. 기념식을 가지도, 보지도 못했다. 여전히 광주는 비가 오고 있었다. 다만 전날에 비해 빗발은 약해졌고, 아르바이트가 끝난 오후 1시 즈음에는 햇살도 고개를 내밀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대통령의 기념식 연설을 보았다. 대통령은 연설 중간중간 울컥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간간이 비추는 햇살 사이로 남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나는 어떤 확신을 느꼈다. 버스를 내려 ‘518’번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는 국립묘지를 향했다. 이미 끝난 행사장을 지나 ‘유영봉안소’에 엉거주춤 서서 간단히 묵념하였다. 다음엔 마음가짐을 제대로 갖고 찾아오겠다고, 누구일지 모를 이에게 약속하면서. 내년은 5.18 40주년이 되는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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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쟁이 김경민

2019 [인문쟁이 5기]


1994년 6월생. 평소에 역사를 좋아해 '역사 덕후'로도 불리며 그의 가방속에는 항상 역사책이 있다고한다. 현재 '역사콘텐츠제작팀 광희'의 일원으로써 광주,전남의 역사를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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