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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육십 넘어 다시 꾸는 꿈

"한평생 배움의 한, 이제야 풀어요" 런던화점 박용숙 할머니

한수미

2018-11-30


“영어를 배우니까 시장 가는 길에 영어 간판을 읽는 재미가 쏠쏠해요.

열심히 공부해서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춰 미국 여행을 하는 것. 이게 지금 제 꿈이에요.”


한때는 번화했던 충남 당진시 합덕읍에 위치한 합덕시장. 장날이면 당진 사람은 물론 옆 동네 사람들도 짐 한가득 안고 오가던 시장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었고, 이제는 장날에도 한산하다. 이곳에서 박용숙(67) 씨는 43년간 묵묵히 가게를 꾸려나가고 있다.


도서 '엄마도 영어공부 할 거야!'를 들고 있는 박용숙 할머니


구두 가게인 런던화점을 운영하는 그는 요새 살맛이 난다.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길거리에 나가면 한글이 아니라 영어가 더 눈에 들어온다. 농협에 가면 BANK(은행)가 있고, 달력을 보면서는 오늘이 MONDAY(월요일)인 것도 안다.


“전에는 ‘New’를 앞에 두고도 엔(N)밖에 못 읽었어요. 지금은 ‘New’가 ‘새로운’이라는 의미라는 걸 알고요,

또 ‘News’가 ‘새로운 소식’이란 것도 알아요. 여러분도 배우세요. 배우니까 이렇게 행복합니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영어책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알파벳 하나 읽지 못했던 그는 이제 새로운 꿈을 꾼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추고 미국을 가겠노라고.



중학교 졸업 포기……

배움의 한 남아


박용숙 씨는 합덕읍 신리 출신으로 3남 3녀 부잣집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남매들은 동네에서 수재로 소문이 날 만큼 공부를 잘했고, 모두 대학까지 진학했다. 하지만 그는 신촌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학업을 접었다.


“남들보다 어린 7살 나이에 학교에 들어갔어요. 누이와 형제들은 다들 공부를 잘했는데,

저는 학교에 일찍 간 탓인지 공부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겠더라고요.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요. 그래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어요.”


배움의 한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결혼을 하고 두 자녀를 키우면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은 늘 가슴 한구석에 자리했다. 아들과 딸이 집에서 과외를 받을 때면 옆에 앉아 무슨 공부를 하는지 귀를 기울이곤 했다. 아이가 산수 문제를 풀 때 옆에서 같이 풀어보기도 했다. TV를 볼 때는 중요한 정보가 나오면 메모하기 위해 한 손에 펜을 꼭 쥐고 시청할 정도로 학구열이 불탔다.


좌) 노트에 빼곡히 적힌 영어 공부 흔적, 우) 영어 공부를 위해 본 도서들


“TV에서 중요한 상식이 나오면 공책에 적어가며 봤어요. 어깨너머라도 뭔가 배우고 싶었죠. 한평생.”



한번 해보자! 영어 공부라는 것을


그러던 그가 학교에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어려운 형편으로 학교를 마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문해학교인 해나루시민학교가 운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학교로 향했다. 그렇게 입학을 했지만, 가게를 비울 수 없어 결국 학교 다니기를 포기했다. 대신 영어 공부를 독학하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영어라고는 알파벳 대문자만 떠듬거리며 겨우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신발가게를 운영하면서 흔하게 볼 수 있는 ‘Size’도 몰랐고 ‘Black’도 읽을 수 없었다. 40여 년 넘게 늘 보던 글자들이었지만 그에게는 그냥 검은 글씨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배움의 열망이 불타던 그였기에 포기하지 않고 알파벳 책을 펼쳐 한 자 한 자 쓰고 외우기 시작했다.


“천안에서 영어 강사를 하는 딸과 함께 중국에 갔을 때가 있었어요. 한국말 하나 안 통하는 중국에서 영어도 할 줄 모르니까 답답한 거예요.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저에게 딸이 물었죠. 꼭 어려운 영어 공부를 해야겠느냐고요. 딸에게 ‘한 글자라도 배우고 싶다’고 답했어요.

그러고 한국에 돌아오니 딸이 저에게 알파벳 책을 선물해줍디다.”


알파벳 책을 선물 받은 지 5개월이 지났을까. 박 씨는 알파벳을 읽고 쓰는 것은 물론 동사까지 공부해 간단한 영어 문장을 변형해 쓰고 읽을 수 있게 됐다. 학구열에 불탄 엄마를 본 딸은 그에게 《엄마도 영어 공부 할 거야!》라는 또 다른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남편 송재길 씨는 “아내가 하루에 대여섯 시간은 공부한다”며 “배움에 대한 열의 하나는 최고”라고 말했다.


“중국에 사는 아들을 오랜만에 봤을 때였어요. 제가 영어를 하니 아들이 놀라더라고요.

손녀는 저한테 동영상 사이트로 영어 공부하는 법도 알려줬어요.”



꾸준히 노력하면 삶이 즐거워진다


박 씨는 남편과 함께 런던화점을 43년째 운영 중이다. 기성화 구두 판매는 물론 제 발에 꼭 맞는 수제화를 맞출 수도 있다. 가죽부터 디자인까지 손님의 취향에 맞추고 있다. 구두 수선 역시 직접 부부가 한다.


좌) 런던화점 내부, 우) 런던화점 외부


그는 일과 공부뿐만 아니라 취미도 열심이다. 합덕읍 주민자치센터에서 실시하고 있는 에어로빅반에 매주 세 차례 다니고 있는데 회장까지 맡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구두 제작과 수선 일을 해왔기 때문에 팔과 다리 곳곳이 아팠다”던 그는 “하지만 에어로빅을 배우고 난 뒤 아픈 곳도 없이 활력이 넘친다”고 말했다.


일도 열심, 취미도 열심 그리고 공부까지 열심히 하는 그에게 목표가 생겼다. 2년 후에는 영어책을 읽고, 또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되면 외국에 가서 영어로 말을 하는 것이다. “싱가포르에 여행 갔을 때 한밤에 호텔 직원이 문을 열더니 영어로 말을 했다”고 말하며 그는 “당황스러워 그냥 문을 닫아버렸는데 다음에 해외여행을 가면 꼭 영어로 외국인과 대화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사실 처음엔 제가 못 할 줄 알았어요. 그래도 배우고 싶어서 공부했죠. 근데 생각보다 공부한 내용이 잘 기억나고 어렵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이럴 때마다 저 스스로 대견하고 또 자부심이 든답니다. 모두 늦었단 생각 말고 지금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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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한수미
한수미

현재, 당진시대 신문사에서 취재기자로 활동하며 당진 곳곳의 소식을 찾아 취재·보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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