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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역에서 빛바랜 감성을 찾다!

열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 벽제역

인문쟁이 이재형

2019-05-10

지난해 5월 은퇴를 했다. 남들 다하는 은퇴였다. 한마디로 시원섭섭했다. 은퇴 후 가장 먼저 생각난 말은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광고 카피다. 내게 딱 맞는 말이다. 34년간 일했으니 이제 떠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아내도 은퇴했다. 아이들 다 키웠으니 가정에서 해방될 때가 됐다. 아내와 함께 언제, 어느 곳이든지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게 여간 좋은 게 아니다.


벽제역 Byeokje Station 碧蹄驛

▲ 경기도 고양시 벽제역(폐역) ©이재형

 

은퇴를 앞두고 디지털 노마드(Nomad, 유목민)로 살고 싶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계정을 만들었다. 1년여 만에 페친(페이스북 친구) 수가 4천명을 넘어섰다. 페친들과 교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침, 저녁으로 안부를 전하는 절친도 많다. 얼마 전 한 페친이 올린 벽제역 사진을 보고 요즘 말로 훅 갔다. 낡은 벽제역에 무슨 볼 게 있겠냐 했지만, 폐역에 중장년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몰린다는 것에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뭘 볼 게 있다고 거길 가는 걸까?

 

 

 

벽제역은 왜 SNS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걸까?


벽제관 고지 碧蹄館 古址

▲ 벽제관 고지 유래비 ©이재형


아내와 버스를 타고 2시간 걸려 벽제역에 갔다. 버스에서 내려 벽제역으로 가는 길목에 벽제관 터였음을 알리는 유래비가 있다. 유래비를 읽어보니 명나라 사신들이 많이 오갔던 곳이다. ‘벽제’는 조선시대 명나라 사신이 머물며 휴식을 취했던 벽제관(碧蹄館)의 이름을 딴 것이다. 벽제역이라는 이름은 행정구역 벽제읍에서 유래했다.


벽제역에 도착하고 보니 폐역이다. 더 이상 열차가 다니지 않는다. 오랜 흔적을 머금은 채 낡을 대로 낡았다. 그런데 젊은이들의 인스타 성지(핫 플레이스)란다. 내가 갔을 때도 중·고등학생과 젊은 연인들이 많이 왔다. 음산하지만 쓸쓸하진 않았다.


일영 日迎 lryeong 능곡 陵谷 Neunggok 장흥 長興 Jangheung 신촌 新村 Sinchon 의정부 議政府 Uijeongbu 서울 Seoul 타는곳 Tracks 乘車場

▲ 벽제역 행선지 표시 ©이재형

 

낡은 벽제역사에는 기차 행선지 표시가 그대로 붙어있다. 벽제역은 서쪽으로는 능곡과 서울 신촌 방향, 반대쪽은 장흥과 송추, 의정부까지 갈 수 있는 작은 기차역이었다. 개통 당시 약 31km 구간을 운행했었고, ‘능외선’이라고 불렀었다. 능외선 중 벽제역은 간이역 6개 중의 하나였고, 1일 6회 왕복운행을 했다. 서울역에서 출발해 신촌, 수색, 용산역, 청량리, 의정부를 순환했다고 하니 이용객이 꽤 많았을 것이다.


여객열차 운행 당시에는 인근에 벽제유원지가 있었기 때문에, 벽제역은 행락객 등 하루 이용객 수만 한 때 1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나 역시 대학을 다닐 때 벽제유원지로 MT를 오기도 했었다. 신촌에서 열차를 타고 벽제역에서 내렸다. 하지만 KTX 개통 등 교통환경의 변화에 따라 벽제역은 2004년 4월1부터 교외선 영업을 중단했다. 그 이후 벽제역에는 열차가 다니지 않는다.



벽제역은 2004년 이후 열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


벽제 東亞曰報

▲ 벽제역은 2004년 4월1일 폐쇄됐다. ©이재형

 

대학 졸업 후 약 35년 만에 페친 덕분에 벽제역에 다시 오게 되었다. 철도와 관련된 각종 기계와 신호기들이 녹슨 채 방치돼 있다. 폐쇄된 지 15년이 지났으니 역사는 폐가처럼 보인다. 한 때는 기차가 오가던 우리네 삶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벽제역에서 잃어버렸던 빛바랜 추억이 떠오른다. 폐역 특유의 감성도 물씬 풍겨난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선로를 따라 아내와 걸으니 연애시절 데이트하는 기분이다. 먹고 사느라 앞만 보고 달려왔던 34년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선로는 한 걸음 한 걸음 걷기에 딱 알맞은 거리다. 선로를 따라 걸으며 열차가 올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멈춘 마법의 공간같다. 수도권에서 이런 낭만을 맛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몰리는 것인가?


벽제역 인근 기찻길 마을

▲ 벽제역 인근 기찻길 마을 ©이재형

 

벽제역 바로 옆에는 마을이 있다. 옛날에 하루에 6번 왕복으로 기차가 다녔는데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적막한 시골마을이 됐다. 마을사람들은 하루에 몇 번씩 다니는 기차를 보며 시간을 체크했을 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다 그랬으니까.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칙폭, 칙칙폭폭~” 기찻길을 걸으며 초등학교 때 배운 동요가 생각나 흥얼거렸다.


벽제역 건널목에는 차와 사람이 자유롭게 지나다닌다. 열차가 다니지 않으니 차단봉이 내려올 리 만무하다. "땡땡땡~~" 열차가 온다며 차단봉이 내려오면서 요란하게 울리던 경고음도 더 이상 없다. 그래도 어릴 때 봤던 철도 건널목 풍경 그대로다.


관리원 없음 전동 차단기 정지 STOP

▲ 벽제역(폐역) 건널목 ©이재형



벽제역 핫플레이스는 인생샷 남기기 좋은 터널


벽제역 핫플레이스는 따로 있다. 역을 기준으로 송추와 장흥 쪽으로 약 5분쯤 걸어가면 보이는 작은 터널이다. 벽제역보다 이곳이 젊은이들이 인생샷 남기기에 더 좋은 곳이다. 터널 길이는 약 30m 정도다. 터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한 장 올리는 게 요즘 젊은이들의 핫템이란다. 나는 사진을 찍는 것보다 여름에 터널에 돗자리 깔고 앉아 쉬면 시원하겠다고 얘기했다. 이래서 꼰대 소리를 듣는다며 아내가 힐책을 한다. 사실 나도 꼰대가 되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벽제역 터널

▲ 기차가 다니지 않는 벽제역 터널 ©이재형

 

어두컴컴한 터널 안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뒤에서 대기한다. 그래서 가능한 빠르게 사진을 찍고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안 그러면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어두운 터널이지만 어둠을 그대로 살려 사진을 찍으면 예술사진처럼 멋지게 나온다. 카메라가 아니라 핸드폰으로 찍어도 잘 나온다. 젊은이들을 따라 순서를 기다려 아내와 나도 멋진 포즈로 사진 한 장을 남긴다.


따뜻한 봄날을 맞아 한 무리의 고등학생이 와서 자기들만의 포즈로 화려한 인생샷을 남기려고 몇 번이고 사진을 찍는다. 때로는 단체로 펄쩍 뛰기도 하고, 서로 부둥켜안기도 하면서 말이다. 우리 부부도 이런 시절이 있었는데, 세월이 야속하다.



벽제역에서 빛바랜 아날로그 감성을 찾다!


아날로그 향수가 풍기는 벽제역 철로

▲ 아날로그 향수가 풍기는 벽제역 철로 ©이재형

 

숨이 막힐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다. 다들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가! 이런 날들이 계속된다면 인생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싶다. 나 역시 지난 34년간 그렇게 살아왔다. 은퇴 후 이제야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있다. 고생한 내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토닥거림이다. 목적지가 어디어도 좋다. 떠난다는 것은 인생의 설레임 그 자체다.


벽제역은 폐역이다. 덜컹거리며 철로 위를 달리는 열차를 볼 수 없다. 은퇴한 나처럼 편히 쉬고 있는 역처럼 보인다. 물끄러미 바라보면 어느 시골 간이역 냄새가 난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지만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곳이다. 지금 남기는 인생샷들이 추억이고 기록이 될 것이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떠난 뒤의 벽제역은 적막감마저 흐른다. 이런 분위기가 좋다. 


벽제역에서 곧게 뻗은 철길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내 인생은 앞만 보고 똑바로만 살아오지 않았는가, 융통성이 없이 살아오진 않았는가? 지금이라도 뒤를 돌아볼 여유를 찾으니 좋다. 지금 가고 있는 인생의 길이 제대로 가는 길인지 묻고 싶다면, 빛바랜 아날로그 향수를 찾고 싶다면 세대를 막론하고 벽제역 한 번 가보길 권하고 싶다.


○ 벽제역(폐역) 교통편

3호선 삼송역 6번 출구에서 790번, 033번, 053번 버스 이용(벽제역 하차)


장소 정보

  • 벽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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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인문쟁이 이재형

2018, 2019 [인문쟁이 4,5기]


이재형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17년째 살고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생활을 했고 34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낸 후 요즘은 아내와 어디론가 여행 떠나기를 좋아한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말처럼. 은퇴 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활발히 하며 ‘갑분싸’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생 2모작을 인문쟁이와 함께 하면서 여행과 인문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 세계에서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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