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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 유학자, 우암 송시열의 자취를 따라 걷다

대전 우암사적공원

인문쟁이 양재여

2018-12-13

 

어느덧 가을이 쓸쓸히 물러가고 겨울이 다가왔다. 저물어 가는 가을처럼, 화려했던 단풍잎도 하나둘 시들어 떨어진다. 마치 단풍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조선 후기의 대 유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을 생각하며 대전 동구에 위치한 우암사적공원을 찾았다. 


대전 우암사적공원 입구

▲ 대전 우암사적공원 입구


유학의 가르침이 새겨진 남간정사


우암 송시열 선생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조선에 유교가 뿌리박게 한 역사적 인물이다. 선생이 학문을 닦았던 곳을 재현한 우암사적공원에서는 정치적 사상적으로 한 시대를 호령했던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곳에는 우암의 시문집 <송자대전>의 목판인 '송자대전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유물관, 서원, 그리고 남간정사가 있다.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말년에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에 정진하고자 지은 건물이다.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334년 전 지어진 한옥이지만, 아름다운 자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우암이 학문을 연구했던 남간정사

▲ 우암이 학문을 연구했던 남간정사


남간정사는 우암이 학문을 닦고 연구했던 곳일 뿐 아니라, 유림들이 그의 사후에 <송자대전>을 펴냈던 곳이기도 하다. 유학자들의 정신이 서린 이곳에는 작은 것에서도 유학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간정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삼문을 거쳐야 하는데, 이 문은 허리를 숙여야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이가 낮다. 이는 항상 겸손함을 잃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문턱을 넘는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 옛 학자들의 올곧음이 느껴진다. 


남간정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 남간정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남간정사는 한국의 건축사에 있어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연못가 암반 위에 세워져 대청마루 아래로는 개울물이 흐르는데, 이는 무더운 여름날에도 시원한 바람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한옥에서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을 칸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홀수로 칸을 짓는 것과 달리 네 칸을 갖춘 점 또한 다른 건축물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연못과 어우러진 남간정사

▲ 연못과 어우러진 남간정사



조선의 주자, 송시열


우암 송시열 선생은 27세에 장원급제하고, 2년 뒤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학식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그는 ‘송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름에 ‘자’를 붙이는 것은 공자, 맹자, 주자만큼 뛰어난 성현이라는 의미다. 이는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송시열의 문집을 간행하며 붙여준 것으로, 그의 학문적 깊이가 널리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유학자인 주자를 굳게 믿고 따랐다. 주자의 사상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을 뿐 아니라, 그 사상에 기반하여 서슴없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학문적 논쟁인 동시에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다툼이었던 예송논쟁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송시열 선생이 주자를 닮았던 것은 사상뿐만이 아니었다. 주자는 중국에서 4대 임금을 모시다가 퇴출당한 후, 낙향하여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송시열의 삶 역시도 이를 닮아있다. 선생은 인조, 효종, 현종, 그리고 숙종까지 4대 임금을 모셨으나, 결국 제주도로 귀양을 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유물에 깃든 선비정신


정조가 설치한 규장각은 개혁정치의 산실로, 왕실의 도서관 역할을 했다. 왕실 교육을 위해 우리나라 유명한 학자들의 문집과 연보를 규장각에 모았다. 그 학자 중 우암 송시열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차린 정조는 이전에 간행된 그의 문집인 <우암집>과 <우암경례문답>에 부록, 연보 등을 합한 <송자대전>을 간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순종 때에 이르러, <송자대전>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우암사적공원 내 장판각에 남아있는 송자대전판은 1929년 문중과 유림이 모여 깎은 목판으로, 대전의 유형문화재 1호다. 


우암의 문집 <송자대전>의 목판이 보관된 장판각

▲ 우암의 문집 <송자대전>의 목판이 보관된 장판각


남간정사를 지나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유물관이 나온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유물과 행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원한다면 언제든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그의 자취를 밟아볼 수 있다. 


우암사적공원 유물관 입구

▲ 우암사적공원 유물관 입구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 / 칡뿌리로 쓴 ‘부끄러울 치(恥)’

▲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 / 칡뿌리로 쓴 ‘부끄러울 치(恥)’ 

 

유물관의 정중앙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초상화가 있다. 초상화 오른쪽을 보면, 커다랗게 쓰인 부끄러울 치(恥)를 볼 수 있다. ‘치’의 역사는 병자호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청에 항복하면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삼전도의 굴욕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을 몹시 부끄러워하며 칡뿌리에 묵을 묻혀 이 글자를 썼다고 한다.


효종이 우암 송시열에게 하사한 초구

▲ 효종이 우암 송시열에게 하사한 초구


유물관 한편에는 멋스러운 초구가 전시되어 있다. 갑옷도 아니고, 예복도 아닌듯한 이 옷은 효종이 우암 송시열 선생에게 하사한 것이다. 여기에는 삼전도의 굴욕을 마음에 새기며 조선의 위상을 다시 세우고자 했던 선생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효종은 청에게 받은 치욕과 원수를 갚기 위해 스승인 우암 송시열과 북벌 정책을 시행했고, 청나라의 매서운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담비 가죽으로 털옷을 지어 선생에게 하사했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대전의 명소 


대전 시민들의 발걸음이 항상 함께하는 우암사적공원

▲ 대전 시민들의 발걸음이 항상 함께하는 우암사적공원


우암사적공원은 사계절 대전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대전의 명소이다. 봄에는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고, 여름엔 녹음이 우거지며, 가을엔 단풍이 흐드러져 한옥에 정취를 더한다. 겨울철 하얀 눈이 내린 모습은 사진작가들에게 특히 사랑받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암사적공원에 의의를 더하는 것은 이곳에 담긴 우암 송시열 선생의 삶과 신념이다. 고즈넉한 정취가 가득한 공원을 걸으며 송시열 선생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조선 후기의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았던 유학자의 올곧은 정신과 기개에 마음이 숙연해질 것이다. 



주소 :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65

문화재 지정번호 : 대전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4호

번호 : 042-673-9286

이용시간 : 05:00~21:00 하절기(연중무휴)

                 06:00~20:00 동절기(연중무휴)

*공간정보 남간정사

장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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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쟁이 양재여
인문쟁이 양재여

2019 [인문쟁이 4기, 5기]


대전의 골목 골목을 거닐고 대전의 잊혀져가는 곳을 기록하고 대전의 축억을 기록하는 대전을 사랑하는 아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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