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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트랙터 몰며 그림 그리는 ‘농부 화가’

해남 농부 화가 김순복

김세진

2018-10-12


마늘이 촘촘히 숭거진 마늘밭 저쪽 고랑엔 한 아짐이 무릎을 엉거주춤 편 채 허리만 깊숙이 숙여 마늘을 뽑고, 다른 쪽 고랑엔 한 아짐이 쭈그려 앉아 마늘 대를 턴다. 푸르른 밭과 마늘이 뽑힌 자리에 제 몸을 드러낸 흙, 그 위에 붉고 노란 작업복 입은 아짐들. 흔하게 볼 수 있는 시골 풍경이려니 싶다. 하지만 그림 속 숨겨진 이야기는 거기에 있던 사람만 안다. 이를테면 이런 대화랄까?

“허리 아픈데 앉아서 뽑지 그랴요?”

“앉아서 일하믄 무릎이 더 아픈께요. 잉.”


김순복씨의 그림과 문구 '마늘뽑기 - 허리 아픈디 앉아서 뽑지 그라요? 앉아서 일하믄 무릎이 더 아픈께요 잉~'

 

 

'단비' 기다리다 사시 되고 '낙숫물'에 검은털 돋고


해남에서 배추, 대파, 봄동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그림도 그리는 김순복 씨는 농부이고 화가이고 시인이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내 눈이 사시가 되었다’는 사모의 대상은 ‘단비’이고, 그 ‘낙숫물’에 ‘기분이 상쾌하여/ 내 머리에 절로/ 검은 털 돋겠구나’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다가도 ‘…장맛비 속에 갇힐 때는/ 자존심 한 귀퉁이씩 깎아/ 둥글고 순한 사람이 된다’고 자연의 섭리에 얼른 순응한다.


김순복

▲ ⓒ한살림


씨 뿌리기 전 갈아엎은 땅에게는 ‘너를 무엇으로 만들어 주랴/ 무슨 이름으로 만들어 주랴/ 투실투실 영근 고구마밭이라 하랴/ 속잎 쑥쑥 올라오는 배추밭이라 하랴’며 ‘이름’을 고민하고, ‘농사로 돈 버는 것이/ 풍년이 들면 싸고/ 흉년이 들면/ 외국에서 들여오니 싸고/ 원유값 동향에/ 배암처럼 영리하게/ 비룟값 농약값 잘도 기어오른다‘며 ’국제적인 농사’를 걱정한다.


생각만이 아니라 몸도 진짜 농부다. 그 힘들다는 유기농 농사를 하면서 다섯 아이를 키워냈고 남자들이 한다고 알려진 트랙터도 잘 몬다니 말 다했다.


“저도 트랙터 몰 줄 몰랐어요. 남편이 돌아가시고 나서 동네 남자들에게 부탁했는데 바쁜데 아쉬운 소리 하는 것도 민망하더라고요. 안 도와준다고 원망할 수도 없고 힘들었어요. 농사 자립을 하려면 트랙터를 몰아야겠다 싶어서 시작했어요. 겁나서 작은 것부터 했는데 이제 큰 걸 몰아요.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마음먹으니까 쉽더라고요. 이제 트랙터로 거름도 뿌리고 비닐도 씌우고 해요. 편하고 아주 당당해요. 나는 트랙터에 앉으면 로봇에 올라탄 것 같은 기분이 되어요. 트랙터 잘 모는 게 지금 제일 자랑스러워요.”



진짜 농부 화가가 나타났다


트랙터 모는 손은 낮엔 농사짓고 밤엔 그림 그리고 글 짓느라 바쁘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사람이든 뭐든 관찰하는데 그게 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하니까 신나요. 평범한 일상인데, 관찰하다 보면 안 보이던 게 보여요. 나는 대상을 똑같이 그리는 정물화는 재미없어요. 이야기나 생각이 안 담기면 사진과 그림이 뭐가 달라요?”


직접 농사를 지어 농사의 의미를 아는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진짜 농부 화가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림 속 이야기가 분명한 셈이다. 그래도 눈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김순복 씨는 그림 옆에 “도무지 예쁘게 쓰지 못한다”는 글씨로 글귀를 적어 놓기도 했다.


어릴 적 전국대회 상도 받았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었고 그 이후엔 생활하고 아이를 키우고 농사짓느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장은 형편이 안되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 열망이 있던 김순복 씨는 다섯 자녀에게 “나는 너희를 다 키우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그림을 그릴 거야. 그림 그리는 할머니가 될 거야”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손자까지 생기고 나니 그는 정말로 색연필을 집어 들었다. 3년 전이다. 이제 전시회도 하고 인터뷰도 하는 인기 작가가 되었으니 그의 꿈이 이뤄진 거다.


“어떻게 그림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어떤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면 머릿속으로 계속 그림을 그렸어요. 저 색깔을 어떻게 옮겨 볼까. 노을도 금방 사라지고 해도 떴다 사라지고 모든 게 빨리 지나가는데 그림은 그걸 고정하잖아요. 사진이랑은 또 달라요. 사진은 그냥 장면을 잡은 것뿐인데 그림은 화가의 생각을 담아 옮겨진 거라 더 멋있어요.”


그러다 책 한 권을 만났다.


“딸이 만 원짜리 상품권을 주기에 해남 서점에 가서 이것저것 보다가 우연히 <타샤의 스케치북>을 발견했어요. 책을 들춰 봤더니 이 할머니가 강아지나 아이들같이 소소한 걸 그려 놓은 거야. 나도 그 정도는 그리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딸이 선물한 72색 색연필로 작은 스케치북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세 권을 다 채우면 (그림 품새가)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 앉은뱅이 상 위에 펼쳐 두고 생각나면 언제든 그렸다. 낮에 농사지으며 찍어 둔 사진을 밤에 보며 서너 시간을 훌쩍 그림만 그렸다. 밥을 먹다가도 생각나면 연필을 들 수 있게 그림 도구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림 그리는 김순복씨

▲ ⓒ한살림


“제가 그린 그림을 어느 단체 채팅방에 자랑삼아 가볍게 올렸는데 그걸 본 사람들이 추천해줘서 물품을 내고 있는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 소식지에 싣게 되었어요. 3년 동안 매달 한 편의 그림을 꾸준히 그리고 이야기를 썼어요. 그리고 그걸로 탁상 달력을 만들어 주셔서 제 꿈이 이루어졌어요. 가까운 월성농협에 달력을 가져다 놓았더니 거기 드나드는 분들이 보시고 ‘그림 주인공이 나’라며 자랑스러워해 주시니 흐뭇했어요.”


그의 그림은 얼마 후에 <생산지에서 온 편지>라는 이름으로 엮였고 지난 6월엔 <농촌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시와 함께 엮어 출간되었다. 서울 시청과 전라남도 동부지역본부 해남의 행촌미술관 등에서 전시회도 열렸다.


좌) 김순복씨의 그림이 실린 탁상달력, 우) 도서 해남 농부화가 김순복의 그림과 시 농촌 어머니의 마음 표지

 

“사람들이 제 그림을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내가 뭔가 답답하니 그리고 싶었던 건데. 그리려는 대상이 사무칠 정도로 나에게 아우성치는 것 같아서 표현해 주지 않으면 괴로웠어요. 그려야 시원하고 그래서 그린 건데. 참 신기해요. 나 혼자 어둠 속에서 몰래몰래, 때론 우울한 마음으로 그린 것들인데 많은 사람 앞에 내걸려서 사람들이 본다는 게 무척 신기해요.”



이왕이면 다홍치마, 예쁘면 좋지!


김순복 씨의 그림 속 사람들은 표정이 살아 있다. 그의 그림은 따스하고 다정다감하고 밝은 기운을 준다.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닮았다. 그런데 그의 둥글둥글한 미소는 힘든 일을 겪은 뒤에 오는 깊은 행복으로 인한 것이란다.


김순복씨가 그린 그림들 (좌측부터 감나무와 고양이, 손수레 끄는 그림, 노세)

 

“남편이 있어야 행복하란 법 있나요? 사랑하고 진짜 사랑했어. 무척 사랑했어요. 49살에 혼자가 되었지만 없다고 불행해져야만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싶어요. 없는 걸 가지고 신세 한탄하고 울고 있으면 뭐해요.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이니 외로운 대로 견뎌야지, 뭐. 외로운께 시간도 많아. 남편 있을 땐 거기에만 신경 쓰느라 나 자신을 돌아볼 새가 없었어. 이제 나 자신으로 살면 되지.”


‘내 육십 평생 흙에 묻혀/ 얼굴에 고랑이 깊어지지만/ 마음은 늘 그대로라서/ 스무 살 기운은 살리지 못해도/ 누구를 원망해 이 못난 내 청춘을 뽑아내면/ 서방 잃은 설움 씻기는 것 같고’라고 쓰면서도 ‘부부의 일상’이라는 그림에서는 농부 부부와 닭, 소를 같이 그리고는 “소가 닭 보듯 한다고? 그랑께, 천생연분이제”라고 재치 있게 풀어내는 유쾌함이 그에게 있다.


김순복씨가 그린 그림과 문구 '부부의 일상 - 소가 닭보듯 한다고? 그랑께 천생연분이제'


“시집살이하고 49세에 남편 잃고 애 다섯에 아픈 아이도 키우면서 얼마나 고난의 순간이 많았겠어요. 그런 일을 겪을 때 고난에 지면 죽죠. 그래서 이것은 경험이야, 라고 생각해요.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슬픈 얼굴을 하면 애들에게 부담되기에 그런 표정 안 보이려고 했어요. 그림도 재미있고 따스하게 하려고 했어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따스한 시선은 농촌 아짐들도 그냥 넘겨볼 수 없다. ‘보인다/ 주름투성이 얼굴 속에/ 굽은 허리 몸매 속에… 어여쁜 여자/ 자식 낳아 기르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농사일에 돌아설 새 없이/ 늙어가는 어머니/ 속에는 예쁜 여자 들어 있다’ 그리고 ‘할머니 소리가 당연하여도/ 예쁘다는 말은 듣고 싶다/ 화장품 토닥토닥 바르는 것 보면/ 립스틱 곱게 바르는 것 보면/ 아름다운 여자다’라며 마음도 읽어 준다.


그 자신이 아름다운 여자라서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걸 테다.

그녀도

‘가을이면… 입술에/ 팥 빛 칠을 하고 싶다/ 선명하게 도드라진 붉은 색에/ 하얀 금은 고운 잇속/ 좀 대담한 입술로/ 가을이 가져온 색깔을 노래하고 싶다. 가을이면 나는 깨질 듯이 맑은 하늘 아래/ 팥 빛 옷을 입고… 목깃으로 하얀 동정을 달고 싶다/ 누가 보아줄까 염려 않는 팥꽃처럼/ 그냥 고운 가을 여자가 되고 싶다… 손바닥에 펴보고 쥐어보고/ 자꾸만 봐도 이뻐서/ 내 팥/ 내 팥 귀한 내 팥/ 마음까지 예쁜 팥색을 닮고 싶다’.


마음까지 예쁘게 한다니 이 가을. 나도 그 입술 색에 욕심이 난다. ‘체리 색’ 아닌 ‘팥 빛 색’ 립스틱, 언제 한 번 나도 빌려주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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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세진
김세진

숨어 있는 소소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일상을 이야기와 음악으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 덕분에 눈이 맑아지는 행운을 누리고 있습니다.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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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사진 이미지

김**

2018-11-29

힐링되는 게시글.. :)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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