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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제비집 같은 대폿집에 라벨의 ‘볼레로’가 울렸지

마산 ‘고전음악의 집 만초’ 조남륭·엄학자 부부

권영란

2018-03-19

 

가게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서는 순간 멈칫했다. 입구 왼쪽 의자에 담요를 둘러쓴, 잠든 노인이 있었다. 당혹감도 잠시, 인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제야 탁자 세 개와 스탠드바가 있는 10여 평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정면으로는 음악가들의 브로마이드 사진이 붙어 있고, 오른쪽 벽면에는 오래된 인켈 오디오가 있고, 엘피(LP) 음반과 시디(CD), 폰 카라얀의 초상화가 달려 있다. 왼쪽 벽에는 베토벤, 토스카니니, 차이콥스키 석고상이 나란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 아래 200여 장이나 될까, 낡고 빛바랜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 고전음악의 집 만초'. 지난 48년 동안 '고전음악의 집'으로 알려진 곳이다. 쉽게 '만초'라 한다. 지난 시절 경남 마산지역 청년들과 예술인들이 이곳에서 청춘과 예술과 시대를 논했다. 지금은 장사를 하는가 싶은, 개점휴업 상태다. 누워있던 이가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1971년부터 경남 마산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자리해 온 '만초'의 주인장 조남륭(83)씨였다.

 

음악다방 ‘만초’ 외관 조남륭·엄학자 부부
▲ 음악다방 ‘만초’의 주인 조남륭·엄학자 부부

 

간판도 없는 대폿집으로 시작

 

'만초'는 1971년 북마산 문창교회 옆 대폿집에서 시작됐다. 간판도 없이 탁자 몇 개뿐인 지붕 낮은 대폿집이었다. 경남 의령에서 농사짓고 살던 부부가 아이 셋을 업고 경남 마산으로 옮겨와 아이들과 먹고살기 위해 펼친 전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어. 서울에 갔더만 온통 음악 천지야. 어른들 따라 댕기면서 오만 음악 다 듣고 다녔어. 우리 집안 어른들이 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어. 서울다방,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가기 전 종로2가 단성사 뒤 르네상스 음악다방에 가곤 했다. 그때만 해도 의자가 말이야 병원 가모 있는 기다란 나무의자, 스피커는 라카 스피커…. 6.25 전이었지. 열 두서너 살인가…그때부터 접했지. 그래가꼬 '1812년'(차이콥스키, '1812년 서곡') 같은 거, 옛날 포를 쏘면서 연주하는 기 있었어. 대포 소리 날 때쯤이면 주인이 스피커 소리를 팍 줄이고 그랬어. 그러던 기억이 나네. 그때부터 따라 댕깄어. 단성사 영화도 보러 댕깄지. 6.25 때는 걸어서 부산까지 갔다. 부산 피난 가서 보니까 얼라들이 다방은 못 가는데 음악실은 갈 수 있었어. 광복동 뒤에 아폴로음악실(나중에 칸타빌레로 바뀌었지만), 미화당 음악궁전, 부평동 오아시스도 있었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부인 엄학자(77)씨가 들어와 자연스레 자리를 같이 했다. 엄씨는 옛 기억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는지 목소리를 높인다.


"당시 진해에서는 유택렬 선생이 하는 흑백다방이 있었고, 대구에는 녹향이 있었지. 그때는 클래식 음악 듣는 사람들이 많았어."


대폿집에서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베토벤이니 쇼팽 등의 고전음악이 늘 흘러나왔으니 음악을 좋아하는 대학생이나 예술인들의 발길이 자연 잦아졌다. 마땅히 간판도 없으니 손님들마다 약속을 정할 때 "거, 클래식 나오는 집에서 만나"라고 했던 것이 단골 중 누군가가 급기야 한쪽 벽에다 페인트로 '고전음악의 집'이라고 써줬다


"허름한 대폿집인데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으니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상타 했을끼라. 그러더만 사람들이 자꾸 모이기 시작하데. 내가 좋아하는 거니 내 들을라꼬도 틀고 또 사람들이 좋다, 좋다 하며 찾아오니 더 좋은 음악을 틀었던 거지."


누구나 가난하고 고단했던 그 시절, 밤늦도록 멸치에 고추장 놓고 대폿술을 마셨으나 낡은 턴테이블에서 지익직거리며 흘러나오는 쇼팽이나 베토벤은 사람들을 잠시나마 아름다운 세계로 데려다 주곤 했다. 때론 숨어서 일을 도모하던 대학생들의 아지트가 되기도 했다. 제비집 같은 대폿집에는 날마다 사람들이 들락날락했다.

 

창동 시절의 '만초' 내부 조남륭 씨 예전 사진
▲ 한쪽 벽에 폰 카라얀이 그려져 있던 창동 시절의 '만초' (좌)조남륭 씨

 

운동권 학생들과 예술인들의 아지트

그러다 1973년 오동동 '코아양과' 맞은편 2층에다 새 둥지를 틀었다. 온통 검은 색 실내의 벽에는 젊은 화가의 손을 빌어 카라얀과 오케스트라 악단을 크게 그렸다. 시대는 암울했지만, '고전음악의 집'은 마산지역 대학생들과 예술인들에게 하나의 해방구가 되었다. 막걸리 한잔에도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로 밤을 샜다. 조씨는 그 시절 정치사회적인 동향을 자세히는 몰랐지만 유신정권은 '아니다'고 생각했다.


"예술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운동권 학생들도 자주 오고 밤새 토론하고 그랬어. 한번은 학생들이 회의를 하는기라. 데모 회의를 한 기지. 막 헤어지니까 남성동 파출소에서 올라오는기라. 정보를 듣고 딱 들이닥치는데…. 아이고, 그때 만약에 우리가 들켰으면 끝이었을끼다. 어마어마했다. 그때가 한창 데모 시절이니까. 76년 그때가 그랬다. 마산에서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숨어서 모임을 하니까…. 그 당시는 주대환(현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도 우리 집에 살다시피 했다. 서울대 간첩사건으로 엮인 서광태도 왔었고…."


'고전음악의 집'은 수년 동안 번성기였다. 들어오는 돈도 많고 나가는 돈도 많았다. 이들 부부는 아끼는 게 없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쩔쩔 매는 학생이 있으면 등록금을 내주고, 누가 생활이 어렵다는 얘기가 들리면 슬쩍 생활비를 건네기도 하고, 돈 없이 술 마시러 오는 예술가들에겐 다음에 갚으라며 그냥 베풀었다. 나중에 화가는 그림을 가져오고, 조각가는 조각 작품을 가져오고, 시인은 시를 써서 갖다 주었다. 밥값이고 술값 대신이었다. 지금도 어수선한 가게 안 골방에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문학이나 음악, 그림을 하는 젊은 청년들이 많이 왔다. 작곡가 조두남 선생도 내려오면 왔지. 진주 설창수 선생도 왔고. 시인 이선관, 구상, 박재호, 송인식 관장, 게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최운, 시인 정진업 선생 등 다들 단골이었지."

 

손문상 화백이 그린, '만초'에서의 조남륭씨
▲ 손문상 화백이 그린, '만초'에서의 조남륭씨

 

그러나 장사가 잘 되자 건물주는 나가라고 했다. 도리 없이 옛 중앙극장 인근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전과는 달랐다. 결국 '고전음악의 집'은 1978년 말 문을 닫게 된다. 다시 마산 창동 골목 안에다 가게를 연 것은 10년도 더 뒤인 1990년대 초였다. '만초'는 전 주인이 걸어두었던 상호였다. 부부는 그걸 그대로 달아두었다. 그래서 '고전음악의 집'은 '만초'가 되었다.


"만초라는 기, 뜻이 좋더라고. 덩굴 만(蔓)에 풀 초(草) 아이가. 다들 덩굴처럼 엉켜 있다. 어울렁 더울렁 살자는 뜻이지. 가족처럼 말이다. 같이 음악을 하고 니 술 내 술도 없고 같이 합이 돼가꼬. 잘난 것도 없고 그리 지내자는 거제."


'만초' 시절에도 부부는 폰 카라얀의 지휘곡을 번갈아 틀었다. 골목 안에는 음악이 가득했고,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었다. 마치 1971년 처음에 간판도 없이 대폿술을 팔던 때의 분위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옛 추억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예전처럼 막걸리나 소주 맥주를 마시면 술값만 내면 됐다. 안주야 멸치, 땅콩 등과 안주인인 엄씨가 그날그날 내어주는 게 다였다. 때로는 두부와 간장이 나오고, 때로는 삶은 달걀이 나왔다. 찾아온 이가 배고프다면 엄씨는 라면을 끓여주었다. 정해진 값이 없으니 술값 외는 챙겨주면 받는 식이었다. 한 쪽 벽면 가득한 낡은 사진들 속에는 이름을 알 만한, 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이 웃고 있다. 덩굴처럼 얽혀 한 시절을 보냈던 이들이 조남륭·엄학자 부부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한 사람씩 튀어나올 것 같다.

 

예술인들과 벗처럼 지낸 젊은 시절의 조남륭씨(좌) 48년 동안 ‘만초’를 찾은 손님들의 사진
▲ 예술인들과 벗처럼 지낸 젊은 시절의 조남륭씨(좌). 48년 동안 ‘만초’를 찾은 손님들의 사진이 한 쪽 벽을 가득 메웠다

 

부인은 가곡을 부르고 남편은 자작시를 읊었다

 

엄씨는 노래를 잘 부르기로 유명했다. 가곡에서부터 이미자 노래까지 다양하다. 오늘은 엄씨가 이야기 중간에 현제명 작곡 ‘그 집 앞’을 불렀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수줍은 듯 입을 가리고 음을 놓칠세라 정성스럽게 불렀다. 노래는 마음을 휘저어놓을 만큼 청아했고 눈물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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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권영란
권영란

현재 〈한겨레〉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전라도닷컴〉과 〈경남도민일보〉에 연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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