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인문360인문360

인문360

인문360˚

[춘천] 고향과 소양강의 옛 기억 전하는 ‘사람책’

춘천 품걸리 김호성 이장

유현옥

2018-03-14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한때 국민가요였던 ‘소양강 처녀’의 배경지는 춘천이다. 소양강은 이 노래 덕에 많은 이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강이다.


홍천, 인제 지역 몇 개의 지천이 합류하여 이룬 소양강. 춘천으로 흘러들어 다시 자양강과 몸을 섞어 북한강 큰 줄기를 이루어 한강으로 향하는 물길이다. 조선시대에는 정선, 평창, 인제 등지의 뗏목이 한양으로 운송되던 강이다. 그래서 그 강에는 떼꾼들이 부르던 아리랑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강을 어디서 어디까지 소양강이라고 말해야 하는지는 종종 곤혹스럽다. 강줄기를 자른 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이 멈춘 곳, 거기에 커다란 호수가 하나 생겼다. 소양호. 품걸리는 그 소양호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1973년 완공된 소양강댐은 개발시대 상징물


소양강댐에서 배를 타고 40여 분을 가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섬 아닌 섬마을. 춘천시 동면에 위치한 품걸리는 동면 상걸리 방향으로 진입할 수 있는 육로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길은 춘천과 홍천을 잇는 외곽도로로 이어져 춘천 도심과는 한참 떨어져 있는데다 굴곡이 심하고 산중턱을 가로지르는 벼랑길이어서 겨울철에는 드나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품걸리 2개의 리 가운데 품걸1리로 가려면 겨울철에는 뱃길이 한결 편하다.


해질녘의 소양호 전경품걸리로 들어가는 배 수영선박

▲ 해질녘의 소양호 전경(좌) 품걸리로 들어가는 배 수영선박(우) ⓒ임재천


1973년 완공된 소양강댐은 개발시대의 상징물이었다. ‘동양최대의 사력댐’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람들에게 국가의 힘, 건설의 힘을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다.


춘천, 양구, 인제 지역의 6개면 38개 리(3000여 가구, 1만8546명 거주)가 이 댐으로 인해 물속에 잠겼다. 품걸리도 아랫마을이 잠기고 윗동네만 남아 있다. 논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산등성이에 불을 질러 농사를 하던 화전 동네였다.


수몰 전 품걸리에는 14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아랫말거리, 윗말거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지금의 품걸1리는 윗말거리이다. 높은 지역이어서 수몰을 면한 것이다.


품걸1리 이장 김호성(1957년생)씨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60년 넘는 세월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 조부모부터 부모님, 그리고 자신에 이어 1남1녀 자식들까지 치면 4대가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품걸리의 이장이자 집배원인 김호성씨

▲품걸리의 이장이자 집배원인 김호성씨(59)


댐과 화전정리로 마을을 떠난 사람들 소양강댐이 생기면서 생긴 수몰지 가운데 춘천 지역은 북산면과 동면 2개 면의 21개 리 마을(1447여 가구, 8880명)이 수몰되었는데 김호성씨가 졸업한 품안초등학교도 그때 물속에 잠겼다. 그래서 학교는 이곳 품걸리로 이주하였다.


수몰민들이 고향을 떠나고, 댐으로 교통이 불편해진 마을은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때마침 1970년대 정부가 대대적으로 추진한 화전민 정리사업도 주민이 줄어드는 원인이 되었다.


비탈밭에 콩과 옥수수를 농사지으며 살아가던 화전민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하나 둘 떠나 도시 외곽으로 흘러들어갔다. 

 

“74년도부터 화전민 이주정책으로, 5개년 계획으루다가, 헐벗은 산 나무심기가 추진됐지. 박정희 대통령이 그래가지구 심어진 게 잣나문데, 화전민들이 떠났지. 마지막으로 떠난 사람들이 77년도에 떠났을 거야. 물에 잠긴 이후에도 인구가 어느 정도는 형성됐었어요. 그래도 화전농이 나갔으니까 인구가 줄어들었지.”


1968년부터 시작된 소양강댐 건설은 춘천 사람들을 흔들었다. 거대한 건설사업 덕에 일자리가 생기고 돈이 돌았다. 댐이 건설되는 인근 샘밭에는 함바집이 생기고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수몰예정지역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잃고 춘천 외곽으로 또는 경기도 지역으로 삶의 터를 옮겨가야 했다. 이어진 화전 정리사업도 춘천의 산마을에 살던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로 흩뿌렸다. 이들에게는 보상금이 나왔는데 갑자기 목돈을 손에 쥔 사람들은 도박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도박으로 전 재산을 털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던 말(출처 : 국립국어원)


“품걸리가 소양댐 저거 돼 가지구, 70년서부터 78년 그때가 도박의 왕국이었어, 여기가. 하여튼 소양댐 생기구선 보상받은 돈들, 그거를 노리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그래서 내가 75, 76년도에 4H클럽 조직해 가지구서 그때 당시에 여기(내집) 사랑방에서 발족을 했어(그때는 마을회관이 없었어요). 여기 벽에다가 빙 돌아가면서 4H 마크, 4H 표어를 붙였어. 도박을 뿌리뽑아야 되겠다 싶어서 ‘도박없는 품걸리’ 표어도 만들었어.”


마을 청년들이 나서서 도박을 근절하겠다고 어르신들과 대결 아닌 대결을 벌이고 실랑이를 하던 기억이 김호성씨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다. 외지에서 꾼들이 들어오고 마을 어른들이 함께 판을 만들어 소를 담보로 하고 쌓아놓은 낟가리를 담보로 벌이던 도박 풍경이 선연히 그려진다. 결국 마을어르신들이 손을 들었던 그 시절 이야기가 한 편의 무용담처럼 다가온다.


이주한 품안학교에서 1년에 한번씩 운동회


품걸1리에는 현재 25가구가 산다. 더덕과 콩을 마을 특산물로 재배하고 잣 수확도 하여 소득이 쏠쏠하다. 화전농을 정리하면서 주변 산에 잣나무가 대대적으로 심어졌는데 그 나무가 자라서 잣을 수확하고 있는 것. 국유림이지만 주민들이 약간의 도지를 내고 잣나무를 관리하며 열매를 거두고 있다.


품걸리 배터에서 품걸천을 끼고 마을 안쪽으로 가다보면 집들이 하나 둘 보인다. 아주 오래된 슬레이트집이 있는가 하면 현대식으로 개조된 집도 있다. 산비탈에 주인 없이 버려져 바람이 조금만 불면 훅 날아갈 것 같은 폐가도 보인다. 소양강댐 방향을 빼고는 어디를 둘러봐도 산이다. 가리산 자락 산마을은 하늘이 좁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나 간간이 찾아오던 마을은 최근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이 뚜벅뚜벅 걸으며 위안을 찾는 걷기길을 갖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걷던 길이 춘천의 봄내길 5코스(소양호 나루터길)와 6코스(품걸리 오지마을길)가 된 것이다.

품걸리 마을 봄내길 이정표옛 품안초등학교 모습

▲ 품걸리 마을 봄내길 이정표(좌) 옛 품안초등학교 모습(우)  ⓒ 이병훈


봄과 가을이면 서울과 춘천 인근에서 사람들이 찾아든다. 삼삼오오 발걸음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오지마을의 모습이 변치 않았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지만 이곳에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많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삶이다. 그래서 이 마을도 조금씩 지난 시간들이 지워지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도시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게만 보이는 풍경들이 여럿 남아 있다. 수몰로 인해 이곳으로 이사 온 품안학교도 그 중의 하나다. 분교가 되었다가 결국 폐교된 뒤 서울 사람들이 매입해서 펜션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교실 안 풍경은 사라졌지만 학교 건물과 마당은 여전하다. 이 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일 년에 한번 이 마당에서 동창회를 겸하는 운동회를 연다. 그날은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주민들이 모이는 마을잔칫날이다.


“학교는 지금 호수에 다 들어가 있어요. 나는 이미 졸업한 뒤였고 우리 동생이 품안초등학교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지. 나는 22회고 동생은 26회여.”


60대 동문들의 학교는 물속에 있고, 그 이후 연령이라면 현재의 학교에서 졸업했지만 이들은 동창회 날이면 ‘품안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다.


잿간, 겨릿소리 등 유무형의 옛것들 지키며

 


마을에는 몇 개의 잿간도 남아 있다. 재래식 변소인데, 그 기능은 특별하다. 돌 두 개를 놓고 그곳에서 용변을 본 뒤 뒤편에 쌓아둔 재와 섞어 두었다가 다시 농사용 비료로 순환시키는 생태변소. 그래서 잿간에는 농기구가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김호성씨 집에도 잿간이 있다.


그는 걷기길을 따라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오면서 오래된 집을 고쳐서 민박집을 만들었는데 처음엔 이 잿간도 없애려고 하다 그대로 두었다. 때로 얼굴을 찡그리는 이들도 있지만 이 잿간이 신기해서 일부러 용변을 보는 이들도 있다.


더덕과 콩, 그리고 잣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김호성씨는 이 마을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다. 2남1녀의 장남인 그는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만 나오고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했다. 그리곤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아가며 혹독하게 농사를 배웠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억척스레 일하면서 마을을 진득하니 지켜왔다.


그렇게 지켜왔던 것 중의 하나가 ‘겨릿소리’이다.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산비탈 밭을 갈기 위해 두 마리의 소가 끄는 겨리(소 한 마리가 끄는 쟁기는 호리, 두 마리가 끄는 것은 겨리)를 이용해 밭을 갈 때 소들을 부리기 위해 하던 소리. 그는 그 소리를 하며 농사를 지었다.


 

김호성씨 댁 잿간품걸리를 지키는 김호성 씨

▲ 김호성씨 댁 잿간(좌) 품걸리를 지키는 김호성 씨(우) ⓒ 이병훈


김호성씨에게는 농사 외에 직업이 하나 더 있다. 그는 집배원이다. 교통 오지인 품걸리를 위해 우체국에서 이 마을을 전담하는 직원으로 그를 특별 채용했기 때문이다. 하루 두 번 들르는 배로 우편물이 오면 그걸 받아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배달한다.


마을이 점점 옛 모습을 잃어가고 농사도 예전 같지 않지만, 소양강물처럼 깊고 넉넉한 마음을 가진 그는 이 마을에서 오래오래 살아가며 마을의 역사, 소양호의 옛 기억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사람책’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인문유랑
  • 춘천
  • 사람책
  • 소양강댐
  • 이주
  • 디아스포라
  • 화전
  • 김호성
  • 품걸리
필자 유현옥
유현옥

<문화통신> 편집주간. 강원도의 문화를 소재로 글을 쓰고, 문화기획을 하고 있으며 <느릿느릿 춘천여행> 등의 책을 썼다.
* <문화통신>은 문화공동체인 (사)문화커뮤니티 금토가 발행하는 잡지로 강원도 지역민의 삶과 문화를 담은 계간지이다.

댓글(0)

0 / 500 Byte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