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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미를 품고, 일상의 공간으로 확장되다 : 경복궁, 고종황제의 서재 집옥재'

역사적 의미를 품고, 일상의 공간으로 확장되다 -경복궁, 고종황제의 서재 '집옥재'

인문쟁이 서예지

2016-06-23

 

 

집옥재 일대의 전경

▲ 집옥재 일대의 전경


지난 4월 27일, 경복궁에 있는 고종황제의 서재 겸 접견소였던 집옥재(集玉齋)가 작은 시민도서관으로 변모했다.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신무문(경복궁 4대문 중 유일하게 비공개였다)과 함께 2006년 일반인에게 개방된 지 10년 만에 더욱 더 제 역할을 보여줄 수 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팔우정과 복도각 집옥재 협길당

▲ 팔우정과 복도각 / 집옥재 / 협길당


집옥재는 2층짜리 팔각누각 정자인 팔우정(八隅亭)과 협길당(協吉堂)이 같이 하나의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서고로 쓰였던 팔우정에서는 차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북 카페로, 서재였던 집옥재는 미니상설전시장과 열람실이 되었다. 협길당은 아직 내부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이용자가 증가할 경우 추가적인 열람실로 사용될 예정이라 한다. 과거 4만권의 책을 보관했던 집옥재의 서재에 지금은 조선시대와 관련된 역사책 1000여 권과 왕실자료 영인본 350권, 외국인을 위한 우리 문학책 번역본 230권을 비치해 놓았다.(문화체육관광부 보도자료 인용)


고종황제 어진 당시 역사 기록물 전시

▲ 고종황제 어진과 당시의 역사 기록물 전시  


방문객은 그곳에 비치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집옥재에 들어서야 한다. 바로 오른쪽에 고종의 어진이 걸려있었고, 가운데엔 장서각 소장의 집옥재 유물과 시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심을 둘러싸고 가장자리와 양 옆의 공간에 열람대가 위치했다. 좁을 수도 있는 공간이지만 앞과 뒤의 문을 트이고 어두운 색의 목재를 선택해 서가와 열람대를 가지런히 배치해 아늑함이 더 느껴졌다. 책상에 놓여있는 이름 모를 노란색 꽃의 조그만 화분이 어두운 오동나무색 계열의 가구와 어우러져 멋스러움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집옥재 열람실 내부1 집옥재 열람실 내부2 집옥재 열람실 내부3

▲ 열람실 내부


경복궁과 집옥재

경복궁은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립한 후 정도전의 지휘 아래 성리학과 풍수지리를 고려하여 만든 조선의 제 1법궁이다. 하지만 명종 8년(1553) 임진왜란 때 큰 불이나 덕수궁에 궁의 역할을 내주다가 고종 2년,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추진으로 경복궁을 재건하지만(1867) 또 경복궁에 큰 불이 난다.
그럼에도 흥선대원군은 당백전이라는 고액화폐를 발행하면서까지 다시 경복궁을 재건(1885)하는데 그 때 창덕궁으로 옮겨와 있던 고종은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건청궁에 기거하면서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이었던 집옥재와 협길당 등을 건청궁 서쪽으로 옮겨온 것이다(1891).


집옥재의 모습

향원정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북쪽 끝에 위치한 집옥재는 근정전에서부터 쭉 궁을 돌며 올라온 사람에게도 호기심을 갖게 해줄만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청나라의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서양의 느낌이 묘하게 섞여있는 이국적인 건물이기 때문이다.
곡선의 형태로 위로 향해 뻗는 조선의 처마와 달리 직각으로 떨어지는 집옥재의 처마와 용마루에 있는 용의 형상인 이물(異物), 그리고 세로로 걸려있는 현판은 중국의 건축양식이다. 그리고 벽돌로 마감되어있는 집옥재의 측면과 후면의 가운데에 뚫려있는 중국식 만월창과 양쪽에 각각 두 개의 반월창이 청풍건축의 모습을 더해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팔우정과 복도각의 창에 쓰인 창호지가 아닌 서양자재였던 유리다.


유리문 만월창

▲유리문 / 만월창


그 밖에도 창틀무늬와 월대의 답도 등을 살펴보면 다른 건물들과 달리 화려하고 복잡하게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밖에선 단층 건물로 보이지만 내부는 다락이 설치된 복층구조라는 점도 집옥재의 특이한 점이다(지금 이곳은 관계자만 출입이 가능하다). 반면 협길당은 전형적인 조선의 건축양식을 따른 건물이다. 온돌이 깔려있어 겨울에 주로 이용됐을 것이라고 한다. 집옥재는 분합문이라는 위쪽으로 여는 문이 달려있어 뒷면의 만월창과 함께 시원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다(경복궁에 알아야 될 모든 것_양택규). 이런 집옥재의 외적인 면을 알아보며 내적인 면까지 궁금해졌다. 집옥재엔 어떤 기억이 있을까.


현판 숨어있는 집옥재의 2층 (다락방으로 통하는 계단)

▲ 현판 / 숨어있는 집옥재 2층 (다락방으로 통하는 계단)


집옥재의 기억

실제로 그 곳 그 자리에서 무엇이 일어났나를 생각해보면 씁쓸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먼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1895)이 집옥재 옆 건청궁에서 일어났다. 그 사건을 전후로 1884년 급진개화파였던 김옥균, 박영효의 주도로 일어난 갑신정변을 시작으로 여러 번의 변란을 겪고 내정의 폐단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극도로 치달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1874)까지, 그 시기 조선은 내외적으로 휘청거리고 있는 시기였다.
고종 그 자신 또한 민씨 정권과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갈등과 권력싸움으로 자신의 힘을 내세우지 못한 때이기도 했다. 집옥재에서는 고종 30년(1893) 한 해만해도 영국, 일본, 러시아, 오스트리아 공사 등 외교사절을 5회나 맞이했다고 한다. 불합리한 조약과 주권을 빼앗겨가는 상황 속에서도 이미 힘이 약해진 조선이기에 도움을 요청 할 수밖에 없는 고종이 사신들을 보내고 그 곳에서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었을까 생각해보았다.
보관되었던 4만권의 책 중 약 1400권의 책이 비교적 단기간에 중국에서 집중적으로 들여온 이른바 개화서적이었다고 한다. 개화서적은 대개 부국강병에 관한 신서적이었다고 하는데(새마갈노칼럼_노관범) 끝까지 여러 번의 개혁을 통하며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말했던 고종은 그 서적들을 보며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강구했을 것이다. 집옥재는 을미사변 이후 단발령과 같은 일본의 노골적인 간섭을 하게 되는 을미개혁(1895)과 그것에 반발해 일어난 을미의병, 많은 관료들의 죽음 그리고 집옥재 서쪽에 있는 신무문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가는 고종을 보며 이제 자신이 오랫동안 방치될 것을 알았을 것이다. 외세의 압력과 국내 정치적 갈등 속에서 조선은 저물어져가고 있었다.


집옥재의 후면  협길당의 후면

▲ 집옥재, 협길당의 후면 모습


항원정에서

과거의 암울했던 기억과는 다르게 현재의 이곳 집옥재는 평화로웠다. 팔우정의 북 카페에서 ‘가배차(coffee)’를 마시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창살이 햇빛에 비쳐 바닥에 진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다른 궁궐들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구석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지 외부와 단절된 내 방과도 같은 아늑함이 느껴졌다.


팔우정에 있는 카페로 통하는 복도 카페에서 팔고 있는 음료 카페로 변신한 팔우정에서 담소를 나누는 시민들

▲ 팔우정에 위치한 카페


향원정집옥재의 문을 닫는 시간은 5시 30분. 짐과 함께 생각을 정리하고 내려오는데 향원정과 그 연못이 보였다. 아름다운 모습에 바로 내려가지는 못하고 잠시 돌로 된 의자에 앉아 오전에 설명해주신 해설자분의 말을 떠올렸다. 최초로 보빙사를 통해 전기를 들여온 고종이 발전소를 향원지 뒤쪽에 설치하게 됐는데 발전기 때문에 물의 온도가 상승해서 물고기들이 죽고 또 그 소리 때문에 궁녀들이 잠을 못자 요상한 것이 들어왔다며 증어망국(蒸魚亡國)이라며 흉을 본 얘기였다. 새로운 문물에 놀라웠을 당시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제 문을 닫을 시간임을 알려주는 안내원이 휘파람을 불며 표시를 했다.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로 편안하게 우리에게 다가온 집옥재가 아직은 무분별하게 관광콘텐츠의 목적으로만 모습을 띠는 하나의 도구가 된 것 같지 않아 다행이었다. 집옥재의 작은 도서관을 방문하며 정도전이 경복궁을 지으며 했다는 말, 즉 “최소한의 갖출 것만 갖추며 사치스럽지 않게 위엄을 나타낼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그런 조선의 미덕과 정신을 관광객과 우리 시민들이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되길 기대해 본다.

(사진=서예지)

 

장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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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쟁이 2기]


서예지는 경기도 판교동에 산다. 즐거웠던 융합예술과 학생으로서의 신분을 마친 후 내가 살고 있는 공간 안에서 또 다른 구성원으로 무엇을 표현을 하고 나타낼수 있는지에 대한 매체나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문門’을 자유롭게 넘나들길 바라며 인문 360도 기자단을 하며 더욱더 인문학이란 무한한 색의 파레트안에서 꾸준히 배워가고 알아가고 경험하고 싶다.jaulosoe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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