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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공감 이야기 공모전 - 평전 최우수상작] 달리는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 /문주원

2017-02-17

세대공감 이야기 공모전 수상작 - 평전 최우수상

 

달리는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


문주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셨던 외할아버지는 올해로 87세가 되셨다. 9살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란 내게 외할아버지는 부모님 대신 많은 사랑을 주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직접 붓펜으로 한 장 한 장 그림을 그려 만들어주신 카드로 한글을 배웠다.

 

올 해 초 집 안 정리를 하다가 그 단어 카드 중 한 장을 발견했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그대로 느껴지는 코팅된 작은 종이 한 장. 현재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는 나는 ‘내 모든 글의 시작이 할아버지로부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우리 집에 오랜만에 놀러온 친구와 함께 꺼내본 앨범에는 함박눈이 내리던 날 할아버지가 집 앞 골목에 만들어주신 눈사람 사진이 있었다. 친구는 보통 눈사람의 손을 나뭇가지로 표현하기는 해도 두 팔이 눈으로 표현된 것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재미있어 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눈사람 앞에서 할아버지 품에 안겨있는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을 본다.

 

1990년 2월 1일, 할아버지는 외손녀만한 크기의 기도하는 눈사람을 만드시며, 어떤 기도를 올리셨을까. 보훈병원에 입원해 계신 외할아버지는 몇 년 사이 파킨슨병이 깊어지셔서 현재는 의사소통이 거의 힘드신 상황이다.

 

찾아뵐 때마다 할아버지의 말씀 중에 한마디 정도만 이해할 수 있어도 감사하다. 할아버지의 말씀은 일상에 지치고 때로는 불안한 내 마음을 늘 위로하고 따뜻하게 데워주신다.

 

6년 전 학부 시절 과제로 몇 차례에 걸쳐 외갓집에 찾아가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여쭤보고 녹음하여 인터뷰 글을 쓴 적이 있다. 지금은 할아버지와 의사소통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지만, 다행히 그 때 과제 덕분에 병이 깊어지시기 전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간직할 수 있었다. 사실 처음 내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시며 거절하셨다.

 

“법정스님이 자기의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고 하신 말처럼 나도 이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 그 분은 정말 세상을 바르게 살아오신 분인데도 그런 소릴 하는데, 나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야. 네가 대상을 잘못 택한 것 같다. 나는 사람들한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아. 나는 이력서를 써야할 때마다 상당히 고통 받았던 사람인데... 거짓말 같은 불쌍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내 얘기를 하고 싶지가 않아.”

 

처음에는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인터뷰를 하면서, 또 녹음한 내용을 다시 들으면서 할아버지가 왜 인터뷰를 망설이셨는지, 왜 인터뷰 도중 종종 말씀을 잇지 못하셨는지, 그 침묵과 슬픔의 의미를 점점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김 교장의 유년기와 청소년 시절

 

1930년 김 교장은 청빈한 유교 가정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47세, 어머니는 48세의 노산이었다. 광산 김 씨 서포 김만중 사계 자손 허주 공파로 김 교장의 아버지는 조선시대 참봉이었다. 그가 만 5살 때 숙환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후 그는 신설동에서 교원이던 25살 위인 큰 형님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장조카의 그늘에 치여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하게 되었다. 일제 시대였기도 했지만 유독 가난했던 그의 가정에서는 한 살 어린 장조카가 그보다 우선시 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조카를 귀여워하는 의젓한 삼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해 서운함이 늘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을 것이다.

 

6학년 때 집에서 교과서 살 돈을 받지 못해 학교에 다니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외가 쪽으로 6촌 되는 1년 선배인 형을 찾아갔다. 친척 형에게 헌책을 물려받은 김 교장은 다행히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었다. ‘모형항공기 만들기’와 같은 과제가 있을 때도 재료를 구입할 돈이 없어 난감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이웃집 친구의 작업을 도와주고 나머지 재료들을 주워 모아서 과제를 하곤 했다. 그렇게 만들어간 비행기가 공중에 오래 머물러 좋은 점수를 받았을 때 그는 기쁨과 아픔이 섞인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6학년 때는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지만 여비 때문에 참가를 하지 못하고 학교에 남아 선죽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수학여행을 대신해야했던 적도 있었다. 

 

김 교장은 종암소학교 시절 학업능력이 뛰어났지만 가정 형편상 바로 취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소학교 졸업반일 때 큰 형님은 아침식사 시간마다 그에게 취직했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그의 마음은 무겁고 서운하면서도 끝내는 죄송스럽기만 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동대문에 있는 ‘황민생활사’라는 출판사의 사환으로 취직을 했다. 출판사 이름을 ‘황민’, 즉 황국신민이라고 커다랗게 달아놓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여러 정황상 출판사 주인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출판사에서 심부름을 하고 전화도 받는 일을 했다. 그는 글씨를 잘 썼기에 주인이 명함에 바뀐 출판사의 주소를 만년필로 고쳐 쓰게 하는 일을 시키기도 하였다.

 

주인은 출판사에서 생활을 했는데, 건물 안에 변소가 없어 밤에는 요강을 썼다. 아침 일찍 출근한 김 교장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 요강을 들고 전찻길과 버스길을 건너 지금의 이대병원 앞에 있는 공중변소까지 가서 비우고 오는 일이었다. 또래의 중학교생들은 교모를 쓰고 학교에 가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출근을 하던 10대 중반의 김 교장은 혹시라도 아는 아이를 만날까봐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운동화와 구두를 신고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게다, 그것도 가게에서 파는 것이 아닌, 나무때기에 혁대 같은 것을 대서 못 박은 게다를 신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자 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집과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인쇄소에서 급사모집을 하는 공고를 보게 됐다. 그는 출근하던 발걸음을 되돌려 이력서를 써 그곳에 가지고 갔다. 인쇄소의 사장은 이력서를 보고 직접 쓴 것이냐고 물으며 다시 써보라고 했다. 그는 사장 앞에서 글씨를 써 보였다.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을 한 사장은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김 교장의 어머니에게 인쇄소 사장은 아들이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을 하며, 일을 잘하면 월급을 매달 올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새로 취직한 인쇄소는 이전 직장보다 급료가 3원 더 많았는데 약속대로 다달이 1원 씩 더 올려주기도 하였다. 그는 흙으로 만든 풍로에 불을 피우는 일이나 청소하는 일을 했는데 인쇄소에 일이 많을 때는 글씨 쓰는 일도 함께 하곤 했다.

 

그러다 김 교장의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고 그의 가족들은 의정부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15살에는 신문에 난 공고를 보고 조선총독부 체신이원양성소 관비생(官費生)에 시험을 봐 합격했고 서울중앙전신국사무원으로 발령받아 서기 일을 하며 경리일도 함께 했다. 일처리를 깔끔히 해 상사에게 인정을 받아 그 덕분에 여가 시간에 별 다른 어려움 없이 독서도 할 수 있었다. 매 봉급 때마다 동갑내기 사환에게 책을 사보라고 자신의 용돈을 쪼개주어 함께 독서의 기쁨을 나눈 일도 있었다.

 

평소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그는 체신국 일을 하다가 준교사 자격시험이 있는 것을 알게 됐고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시간만 있으면 책을 본 덕택에 합격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바로 발령이 나질 않고 18살이 되서야 발령이 났다. 김 교장이 만 18세 되던 해 2월, 그는 경기이천초등학교에 초임 교사로 부임했다.

 

그에게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가르친다는 기쁨도 컸지만 오히려 배울 수 있다는 기쁨이 더욱 컸다. 지난날처럼 남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는 ‘로봇형 생활’이 아닌, 이제는 창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는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 마냥 기뻤다.

 

김 교장이 만난 일본인 선생님들

 

그가 종암 심상소학교 3학년 때 담임교사는 일본인 미야노 선생이었다. 일제시대였기 때문에 일본어를 중심으로 교육과정이 편성됐는데 어느 날 미야노 선생은 학생들에게 “이제 내년부터 조선어가 없어진다고 한다. 너희 나라 글씨니까 지금 잘 외워둬라”라고 말했다. 김 교장은 일본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여름방학 때 당직을 서던 미야노 선생은 김 교장을 학교로 불렀다. 선생은 학교 텃밭에서 토마토를 따 그에게 주었다. 원래 비린내가 나서 토마토를 못 먹던 그였지만 선생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감사히 받아먹었다. 의외로 맛있다고 느껴졌고 그 날을 계기로 토마토를 잘 먹게 되었다.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3년 간 가르쳐주셨던 담임교사도 그의 기억에 남아있다. 그의 어머니가 하시던 작은 가게는 담배도 팔았는데 그 당시는 왜정 때라 사기 힘든 담배도 있었다. 담임이 그 담배를 살 수 있냐고 물어봐서 가게에서 담배를 가져다 드린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냥 가져다 드려라” 해도 좋았을 것을, 나중에 계산이 맞지 않으면 당신의 큰 아들에게 한 소리를 듣게 되니까 그에게 담배 값을 받아오라고 하셨다. 담배 한 보루도 아니고 한 곽이었는데 그 돈을 받아왔던 것이 아직도 그의 마음에 걸려있다.

 

김 교장은 후에 자신이 졸업한 종암국민학교에 교무부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어느 날 숙직을 하다 문득 소학교 시절 선생님이 자신의 생활기록부를 어떻게 써주셨을지 궁금해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생활기록부를 찾아 읽어 보니 “장래가 유망하다”라는 고마운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바라는 대로 된다는 깨달음을 얻은 김 교장은 아이들을 항상 긍정적으로 평해야 한다고 평교사인 시절부터 동료교사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가 15살에 드디어 조국은 해방을 맞았다. 집 밖으로 나가 ‘해방만세’를 불렀다. 일본 헌병들이 총을 쏘면 집으로 도망쳐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썼다가 다시 길거리로 나가 만세를 불렀다. 패전한 일본군이 기를 쓰고 마지막 발악을 했기 때문에 해방이 되고도 서울 용산에서는 만세를 맘대로 부르지 못했다. 해방되기 하루 전날, 체신국 사무실에 한 일본 사람이 한국인 국장을 찾아 왔다. 그는 국민복을 입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군인이었다. 그는 북쪽에 소련군이 들어오게 돼서 탈출했다며 곧 중대 방송을 할 거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 라디오에서는 일본 천황이 “나는 신이 아니다”라고 발표하는 방송이 나왔다. 일본인이었던 체신 양성소의 담임은 좋은 사람이었는데 해방직후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그를 찾아와 본인이 쓰던 책상을 가져다 쓰라고 했다. 선생이 고마웠지만 그는 친일파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겁이나 책상을 가지러 가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종종 3.1 운동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기 때문에 김 교장은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가 일본과는 독립적으로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는 또래들이 많았지만 그는 태극기도 그릴 줄 알았다. 김 교장이 집에서 조선어로 된 책들을 몰래 읽곤 했던 무렵, “왜 조선 밥 먹고 일본 방귀 뀌느냐”고 일본말 하는 조선 아이들에게 보자기를 씌우고 여러 명이 때리고 도망갔던 ‘종암소학교 조선어사건’이 있었다.

 

조선어 사건으로 겁이 난 그는 읽던 조선어 책들을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렸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잘하는 학생에게 기장을 주었는데 김 교장은 반에서 기장이 가장 높았다. 그러면서도 고려대 쪽 뒷산을 넘어 집에 갈 때면 친구들에게 “우리나라는 꼭 독립된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김 교장이 친구들에게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기 때문에 조선어 사건이 나자 자신이 오해받진 않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교사로서 첫발을 내딛다

 

‘주어진 자리,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김 교장의 인생관이었다. 그 인생관을 따라 살면서 성취감과 자존감을 키웠고 힘든 가운데서도 ‘하면 된다’라는 도전정신을 품게 되었다. “공부해서 남 줘?”란 말이 있지만 김 교장은 남 주기 위한 공부가 참된 공부고 그렇게 할 때 학습도 더 잘된다고 확신했다.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준교사 자격시험에 도전하여 뜻을 이루었다. 안개 속에서 해매 듯 방황하는 어린이들의 길 도우미가 되어 그들이 저마다의 천분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돕는 안내자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사람은 꿈을 가지고 살 때 힘을 얻고 꿈을 이룰 수 있다. 꿈은 칭찬을 먹고 살고 칭찬이 없으면 꿈은 죽는다. 꿈은 에너지고 소망이다’라는 마음으로 수십 년의 교직생활동안 김 교장은 칭찬을 통해 학생들이 꿈을 갖게 하려 노력했다.

 

먼 일가친척인 기자 어른 앞에서 일본 순경들이 쩔쩔 매는 모습을 본 어린 시절의 그는 ‘기자보다도 높은 판검사가 되면 일본 사람들한테 큰소리 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교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적인 직장(체신국)이 있었는데도 준교사 시험을 본 것이다.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내가 선생님이 되면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꿈이 있었다. 소학교 시절, 조선어 책을 학교에 가지고 가서 반 아이들에게 읽어주곤 했었는데 하루는 일본인 교사에게 걸려 교장실로 끌려가 추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김 교장은 그때 “교장에게 학생을 고자질 하는 선생은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유당 3.15 부정선거 때 야당 쪽 삐라를 학교에 가져와 돌리는 학생을 보고도 못 본척하고 교무실로 내려온 적도 있었다.

 

김 교장에게는 지금도 찾아오는 나이 지긋한 제자들이 있다. 특히 자양동에서 쌍둥이 딸을 낳던 무렵 가르쳤던 자양초등학교 학생들이 그의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에는 학교가 동네마다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강 건너 잠실, 신천에서 배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비 오는 날이면 학생들이 포대자루를 뒤집어쓰고 학교에 왔는데 김 교장은 수건을 몇 장 준비해뒀다가 젖은 아이들을 닦아주곤 했다. 그 학생들이 방과 후면 그의 집에 놀러 왔고 자기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해 이긴 아이들이 쌍둥이를 업어주곤 했던 날도 있었다.

 

한번은 김 교장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반에서 육성회비를 걷은 봉투 중 하나가 없어진 사건이 있었다. 그는 사과가 먹고 싶어서 훔친 가난한 아이를 용서하고 사과를 주었던 사과장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이들의 양심에 호소를 했다. 그 날 저녁에 한 학생이 육성회비 봉투를 돌려주려 그의 집에 찾아왔다. 이렇게 교직생활 중 특별히 자양초등학교 학생들과 많은 추억이 있다. 김 교장이 정년퇴임할 무렵, 50대가 된 20여명의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를 축하했다.

 

교직에 있으면서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4.19 때 아이들 사이에서도 데모가 한창 유행했는데, 그 전 해에 김 교장의 반이었던 학생들이 “담임을 다시 김 선생님으로 바꿔 달라”라고 데모를 해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 학생들의 담임교사는 김 교장이 아이들을 사주했다고 오해를 했다. 그런데 마침 아이들이 데모를 하던 시간에 김 교장이 학부모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 나가 아이들을 말렸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증인이 되어 다행히 별문제는 없었다. 알고 보니 그 교사가 학생들을 차별해 아이들이 그런 요구를 한 것이었다. 김 교장의 쌍둥이 딸들이 교사로 발령이 나던 해에 그는 사범학교를 나오지 않아 자격미달이라고 해서 강릉 연수원에 가야했던 적도 있었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면서 연수원 생활을 했던 김 교장은 혹시 연수 과정에서 과락이 있어서 다시 교사 생활을 하기 어렵게 될까봐 염려가 많았다.

 

한국 전쟁

 

사범학교 출신이 아닌 교원은 징병의 대상이라 김 교장은 50년대 초에 징병검사를 받아 갑종 합격을 했다. 그러니 사변이 나지 않았더라도 군대에 가야 했을 것이다. 그해 중공군이 내려오던 12월에 군에 입대하여 보병으로 전방에 배치되었고 그 중에서도 척후조 2번이라 최전방에 있게 되었다. 수색대에서 인정받고 정보하사관으로 교육받아 빨치산 토벌에도 참가했었다. 철의 삼각지대의 치열했던 전투에서 전략을 세운 공으로 부대장 표창장과 대통령으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은 김 교장에게 명예 못지않은 크나큰 아픔을 남겼다. 그의 어머니는 선하시고 재주도 많으신 분이었다. 글씨도 잘 쓰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부탁받고 대신 많이 써주기도 하셨다. 마흔 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자신을 낳은 어머니에 대해 김 교장은 다른 형제들보다도 애정이 깊었다. 한국전쟁에 참전 중, 큰 형님에게서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편지가 도착했다. 그는 그 편지를 받고 ‘아 지금쯤 돌아가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튿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편지를 받았다. 어머니의 기일은 김 교장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가 막내인 자신을 생각하다 돌아가신 것 같다고 느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에게 생일은 울적한 날이 되었다. 추석이나 어머니의 기일이 되면 마음이 많이 괴로웠다. 산소 위치도 모르니 그 근처라도 다녀와야 마음이 편했다. 전쟁 중 큰 형님이 근무하던 학교 뒷산에 어머니를 묻었는데 전쟁 통에 그 곳이 공동묘지가 되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전쟁 중 수원에서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김 교장의 큰 형님은 모두가 피난을 떠나는 와중에 서울을 사수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을 듣고 학교에 남았다. 이미 서무실 직원들은 학교 돈을 가지고 피난을 갔지만 오로지 학교와 교육밖에 모르는, 청렴하고 강직했던 큰 형님은 학교를 지켜야한다고 끝까지 남아 있다가 인민군들에게 구속됐다. 당시 인민군에게 직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반동분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민군 중 큰 형님의 제자가 자신의 은사가 잡혀있는 것을 알고 구금을 해제해 주었다. 국군이 다시 수원에 들어서자 큰 형님은 그 일로 인민군에 부역을 했다고 교직에서 해임되었다. 큰 형님은 억울한 마음에 복직을 신청하고 교육청 앞에서 구둣방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다 끝내 복직하지 못한 채 화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가정을 이루다

 

군에 있을 때 여기저기서 혼담이 나온 곳이 있었지만 감히 결혼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제대하고 난 뒤에도 옷 사 입을 돈이 없어서 군복을 입고 출근을 할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전후에는 미군 바지를 사다가 염색이나 탈색을 해서 입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것도 잘 입는 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많은 집들이 가난했지만 ‘대표적’으로 가난했던 김 교장의 가정 형편에 그는 결혼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전쟁이 끝나자 한 소위가 자신의 조카딸을 소개시켜주려 했다. 한 소위는 사변 전 김 교장과 한 학교에서 근무했던 동료 교사였다. 한국 전쟁 동안, 정보장교 한 소위는 사령부에 정보하사관으로 있던 김 교장의 직속상관이기도 하였다. 김 교장은 그만큼 한 소위와 절친했기도 하고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 혼담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함께 벌어야 할 텐데 한 소위의 조카딸은 학력이 없어 맞벌이를 하기엔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에 고민이 되었다.

 

한편 김 교장은 이전 학교에서 교장으로 모셨던 홍 교육감의 집에 자주 가곤 했었다. 그가 평소 가깝게 지내던 홍 교육감의 둘째 부인에게 한 소위의 조카딸과 혼담이 오가고 있다고 사진을 내밀자 그녀는 “내가 봐서 뭐하느냐”면서 보지 않았다. 며칠 뒤 지서 주임 그 당시는 학교에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경찰서 지서로 연락이 왔다.

이 교육감이 부른다는 전화가 왔다고 일러줘 사택으로 찾아갔더니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날이 지금의 부인인 홍 여사를 처음 본 날이었다. 홍 교육감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본처에게서 낳은 자신의 큰 딸을 소개해주려 한 것이었다. 그 날은 그녀와 아무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 뒤 홍 교육감의 둘째부인이 다시 만나보라고 재촉해 또 한 번 사택으로 찾아갔다. 김 교장은 처음으로 둘만 있게 된 자리에서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벙어리가 앞에 서고 장님은 그 뒤에서 벙어리가 쥔 끈을 붙잡고 가는 두 내외를 그리고 그 옆에 그의 이름을 썼다. 그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는 조용히 그 옆에 자기 이름을 쓰기만 했다. 그가 그림을 그린 것은 ‘부족한 사람 둘이 만나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하나가 되는 것이 나의 결혼관인데 당신도 동의하느냐’를 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그저 그녀가 말수가 적은 사람인가보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홍 여사는 그 순간 그저 김 교장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만 생각했지 그 그림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후에 그 사실을 안 김 교장은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김 교장은 남들보다 예리하고 섬세한 감성을 지녔지만 홍 여사는 그와 반대되는 성격이었고, 때문에 결혼 생활에서 크고 작게 부딪치는 날들이 많았다. 김 교장이 이끌어가고 싶은 방향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가 오고 가지도 않고 따로 다방에서 만나자고 해도 그녀가 싫다고 거절하자 홍 교육감 딸과의 혼담은 미결로 두었다. 그러면서 한 소위의 조카는 부모가 없으니 자신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 김 교장은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렇지만 역시 경제적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홍 여사는 국민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가정형편상 그녀와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았다. 당시에 맞벌이 하는 가정은 별로 없었지만 그는 형편이 어려우면 부부가 함께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 여사를 만나 “나는 지금 아무것도 없다. 군복 입은 이대로 가정을 이루려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노력을 착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살기 위한 것인데 결혼 한 뒤에도 계속 함께 벌 수 있느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그녀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고 그것이 김 교장에게는 아직까지 서운함으로 남아있다.

 

홍 교육감 딸과의 혼사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을 때 한 소위의 조카가 학교로 찾아와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편지를 아이들을 통해 보내곤 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결혼을 한다고 동네에 소문을 냈는데 김 교장은 그런 그녀에게 실망을 주게 될까봐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녀에게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김 교장의 마음은 편치 않다. 그렇게 한 소위의 조카는 학교에 찾아오고, 교육감 측에서는 결혼을 서두르자고 독촉하는 상황에서 김 교장은 큰 형님에게 사정을 말씀 드렸다. 큰 형님은 홍 여사의 가정이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김 교장은 본처의 자식이면서도 떳떳하게 “아버지” 소리를 한번 하지 못하고 자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했다고 큰 형님께 말씀드리고 결혼 승낙을 받았다. 해를 넘기기 전에 결혼하고 싶었기에 1954년 12월 31일에 그는 홍 여사와 결혼을 했다.

 

섬세하고 가정적이었던 김 교장의 삶

 

김 교장 부부는 결혼하고 나서 한 동안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김 교장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부발국민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고 부인인 홍 여사는 용인 제일국민학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7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부부는 살림을 합쳐 서울 자양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자양국민학교 교장이 시내에서 출퇴근을 했기 때문에 김 교장 부부는 비어있는 교장 사택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1956년 10월, 첫 자녀를 낳았다. 김 교장은 그날 산기가 있는 부인을 데리고 산부인과에 가다가 그녀가 더 걷기 힘들어하는 바람에 그 근처에 있는 산파를 찾아 갔다. 아이가 곧 나올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중앙시장에 가서 베넷 저고리를 사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 산파는 그리 반갑지 않은 소리로 방으로 들어 가보라고 했다. 혹시라도 아기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아기에게는 문제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부인을 보고 ‘혹시 딸이라 못마땅한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김 교장은 웃으며 “딸을 기다렸는데, 딸을 낳아서 좋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홍 여사가 말없이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쌍둥이였다. 그는 “내가 쌍둥이를 좋아해서 쌍둥이를 낳았나 보다”라고 부인을 위로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쌍둥이를 낳은 것을 별난 것으로 생각해서 쉬쉬하는 일이 많았지만 김 교장은 두 딸이 무척이나 소중했다. 버스가 하루에 몇 번만 운행하는 시대였다. 가을이지만 그날은 유독 더 추웠다. 몸이 얼대로 언 그는 다시 중앙시장에 가 둘째 아이의 배냇저고리도 사왔다. 그 당시에는 임신 중에 쌍둥이인지를 알아낼 만큼 의학 수준이 높지 않았다. 홍 여사가 임신 중에 한 병원에서는 태아가 자리를 잘 못 잡은 것 같다고 오진을 하고 태아의 자리를 잡게 해야 한다고 압박 붕대로 위험한 방법을 시도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큰 딸은 둘째 딸보다 성장 발육이 꼭 일주일을 앞섰다. 큰 딸이 먼저 엎으면 둘째 딸은 일주일 뒤에 엎었다. 큰 딸이 기기 시작하고 일주일을 기다리면 작은 딸도 기기 시작했다. 젖이 모자라서 우유를 먹여야했는데 아기들이 우유를 먹지 않아 걱정이 많았다. 그 당시는 국내산 우유가 없었다. 가게에 가서 일제 우유 중 가장 좋은 우유를 달라고 해 그것을 먹이곤 했는데 이것 또한 설사를 자주해서 마음을 졸였다. 두 딸이 우유를 먹고 설사만 안하면 그것이 그리 기쁠 수가 없었다. 그는 부끄러운 생각보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부인과 한 아이씩 포대기를 둘러업고 다니곤 했다. 그 당시 왕십리에서 광나루까지 가는 궤도차를 타고 다녔는데 쌍둥이를 업고 다니던 부부는 궤도차를 타는 손님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김 교장 부부는 쌍둥이 자매 뒤에도 두 살, 세 살 터울의 아들 둘을 더 낳아 4남매를 키웠다. 그 당시 초등학교 평교사 월급은 박봉이었기 때문에 김 교장 혼자서만 버는 월급으로는 4남매를 키우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퇴근 후 여러 부업을 통해 생활비를 벌었다. 집에서 기름종이와 잉크 롤러를 이용해 문제지를 만들어 학교에 납품하기도 했고 학교 교장이 인쇄소 대신 그에게 원고를 맡겨 인쇄소 비용을 받기도 했다. 한때는 과외금지 조치가 내려졌는데도 계속 과외를 해야지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고통스럽기도 했다.

 

1960년도 한국에 처음 텔레비전이 들어왔을 때 일제 산요 TV가 학교에 몇 대 배당이 되었다. 교사들이 제비를 뽑았고 김 교장이 당첨되어 싼 값에 구입하게 되었다. TV가 나온 지 초창기에 집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김 교장은 개똥이네서 셋방을 사는 형편에도 집에 TV가 있게 된 것이다. 텔레비전을 틀어 놓으면 동네 사람들이 놀러와 마당에 서서보고 가곤 했다. 이렇게 방문을 열어놓고 생활을 하는 것이 재밌고 즐거우면서도 때로는 불편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동료 교사가 자신에게 TV를 팔라고 졸라서 결국 텔레비전은 그 집으로 팔려갔다.

 

처음 셋방을 산 뒤로도 계속 셋방살이를 했기 때문에 17번이나 이사를 했다. 1968년에 18번째 이사를 할 때서야 비로소 김 교장은 면목동에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정확한 년도를 바로 기억하는 것은 면목동 집에서 1968년 겨울에 발표된 국민 교육헌장에 대한 해설을 소년한국일보에 썼기 때문이다. 그는 교원이었고 또한 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기 때문에 4.19 등 민주화의 물결에 참여하지 못했다. 남들이 민주화를 위해 일할 때 본인은 역사적 발자취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것이 떳떳하진 못했다. 전 학교에서 그가 모셨던 교감은 교사용지도서 등 교육에 관련된 글을 많이 써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교감이 그에게 실과 교사용지도서를 대신 써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고 그 후로 그의 능력에 좋은 평가를 해 주었다. 그녀가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난 뒤 신문사에서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부탁을 하자 그녀는 김 교장을 찾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김 교장은 쓸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이미 신문에 예고가 나갔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치적 의미인 것을 알면서도 소년한국일보에 국민 교육헌장에 대한 해설 글을 써줬다. 원고료를 받아 집에 과일을 사들고 와 가족들에게는 행복한 기억을 남겨 주었지만, 그 일은 김 교장에게 불편함으로 남아 있다.

 

1972년에는 중곡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사한지 며칠 만에 연탄가스가 새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김 교장은 새벽에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울음소리에 깨서 일어났다가 어지러워 쓰러지자 연탄가스가 샜다는 것을 알았다. 김 교장은 지기(地氣)를 마시면 된다는 말이 기억나 두 아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마당에 엎어놓고 급한 마음에 맨발로 뛰어나갔다. 이사 간지 얼마 안 된 동네라 길도 잘 모르고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녹색불은 경찰서 아니면 병원이라는 생각으로 무조건 녹색 불만 찾아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파출소를 찾아 들어가 백차를 불렀다. 그 파출소가 담당하고 있는 행당동에 있는 병원으로 가 두 아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밤을 꼬박 샌 김 교장은 아침에 출근해야했기 때문에 택시를 불러 아들들을 중곡동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택시 기사가 내복만 입고 있는 아들 둘을 집에 내려 주면서 가족들에게 김 교장이 고아원 원장님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일은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김 교장의 가족들에게 아찔하면서도 웃을 수 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76년, 김 교장은 길동에 집을 지었다. 그 당시 길동은 간간히 밭이 남아있는 서울의 변두리였기 때문에 땅 값이 쌌고 김 교장이 아는 중학교 교무주임의 동생이 외상으로 공사 자재를 제공해주었기에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집을 지으면서 조금씩 외상을 갚아나가고 입주할 때는 은행에서 융자를 얻어 잔금을 치룰 수 있었다. 김 교장은 기초 설계를 직접 해서 설계 사무소에 가져갔다. 내 집을 처음 짓는 것이기에 더욱 정성을 쏟았고 본인의 구상대로 짓고 싶었던 것이다. 집을 지어 놓자마자 복덕방에서 집을 팔라고 여러 번 찾아 왔지만 그는 그렇게 공들인 집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팔지 못했다.

 

김 교장의 집은 다른 집보다도 튼튼하게 지었을 뿐만 아니라 구조도 요즘 아파트처럼 편리했다. 집 주변에 다른 집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김 교장은 보안을 위해 밤에 문이 열리면 비상벨이 울리도록 전선을 설치해두었다. 부인은 다른 집들처럼 인터폰을 현관 옆에 달아야한다고 반대했지만, 김 교장은 안방에서 나오면 바로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인터폰을 달았다. 그 당시 아파트들도 현관 옆에 인터폰이 설치했었는데 그는 그것이 꽤나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작은 것 하나에도 생각이 많고 매우 섬세했다. 대추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목련, 소나무 등 여러 종의 작은 나무들을 작은 마당에 심었다. 안방 창문 가까이에는 향기가 좋은 라일락을 심었다. 그렇게 알맞은 위치를 고르고 골라 하나씩 심은 작은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았다. 한 밤중 잠에서 깨 밖으로 나와 마당에 서면 대추나무 가지에 달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는데, 그 그림 같은 풍경들 때문에 그는 길동 집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부인이 아파트로 이사하기를 원해서 20여년을 살던 그 집을 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집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했다.

 

힘든 시기의 벗이 되었던 문학과 예술, 그리고 전우

 

해방 직후 이념 대립으로 시끄러울 시기에 좌우익 양 쪽에서 선전용으로 ‘음악의 밤’이나 ‘문학의 밤’ 같은 행사들을 열곤 했다. 김 교장은 이념에 상관없이 모든 문화 행사에 참석했고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울 수 있었다. 그는 「보리피리」를 쓴 나병환자인 한하운이라는 문인의 글에 감동받고 그의 작품들을 좋아했다.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성경말씀 구절이 생각나듯이 책을 읽을 때 감동받았던 내용들이 삶에 적용된 것들도 많았다. 누구의 글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랑하는 아들아, 내 등을 딛고 일어서라”라는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아 자녀들에게 그런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해왔다. 책 뿐 아니라 공자의 ‘三人行則 必有我師’(삼인행즉 필유아사 – 세 사람이 있으면 그 중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란 말처럼 그는 주변 모든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면 즉시 메모를 하기도 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부정적인 면을 보면 ‘내가 저렇지는 않은가?’하고 철저히 반성하고 그렇게 살지 않도록 힘썼다. 젊은 시절에는 양정여자고등학교 미술선생인 임 선생이라는 멋쟁이를 동경하다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군대에 있을 때는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받아 교회에 나가기도 했다.

 

김 교장에게는 서로 문학 이야기를 주고받다 가까워지게 된 전우가 있다. 그는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장(경제학과)으로 정년퇴임한 이해주 교수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연락이 끊어졌었지만, 몇 십 년 뒤 이 교수가 경찰을 통해 김 교장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다시 연락이 이어지게 되었다. 이 교수가 김 교장의 집에 오면서 몇 십년간 간직해오던, 김 교장이 보냈던 편지들을 가져왔다. 김 교장은 부끄러운 마음에 편지들을 없애려고 “내 것이니까 달라”고 했지만 이 교수는 “그럴 줄 알고 복사해왔다”고 대답하며 복사본을 주고 원본은 가져갔다. 그 뒤로 다시 10여년이 흐르면서 그 편지의 복사본들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이 교수가 김 교장 집에 다녀와서 쓴 수필에서 그 편지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몇 해 전 정년을 앞두고 옛날에 받았던 편지들을 정리하다가, 고암(古巖)이라는 아호를 가진 옛 전우의 편지 몇 통을 발견하고 어찌나 반가운지, 새삼 그때의 편지들을 곰곰이 읽어 보았다. 가장 오래된 편지에는 "차라리 암야(暗夜)의 여사 속의 돼지 못 된 게 한 되오."라는 구절이 있어, 당시의 숨 막히는 젊은이의 고뇌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새삼 되새기게 했다. 저격 능선 전투가 불꽃을 튀기고 있을 당시, 그는 사단 본부에 배속된 졸병이었고 나는 연대 의무대 졸병이었는데 그 때 주고받은 편지였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가 약간의 부상으로 우리 의무대에 치료를 받으러 왔을 때인데, 내 호주머니에 꽂아 넣고 있던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일본 문고판)이 그와의 사이에 우정의 징검다리를 놓아 준 셈이다. 알고 보니 그는 경북 울진(이는 이해주 교수가 잘 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입대했는데, 성격이 성실하면서도 묵중하고 정이 많은 문학청년이었다. 우리는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생을, 문학을, 젊음의 꿈을 신명나게 논하다가도 암담한 현실 앞에 절망하고 고뇌했다.


그 후 내가 먼저 제대하고 나서 받은 편지에는 "나는 멀리 외떨어진 사막에 내쳐진 것 같은 고적감에 사로잡혀 변함없이 되풀이 되는 생활을 계속 영위하고 있을 뿐"이라는 넋두리와 함께 "언제 설움과 웃음을 나누게 될는지 그립고도 그리워 울고만 싶다."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던 그도 마침내 제대하여 경기도 이천 교육청에 복직이 되었다는 낭보를 보내왔다.


오늘만은 예외로서 금주의 규율을 깨고 술대접을 하겠다는 그와 술잔을 나누다 보니, 취기와 더불어 젊은 날의 추억이 더욱 생생히 떠올라 감회가 깊었다. 조그마한 한옥에 낡은 가구들이 옛 선비들의 청빈을 방불케 하고, 그의 살아온 발자취를 돋보이게 하였다.

 

김 교장은 군 시절 본인이 편지를 검열하는 정보원이었기 때문에 쓰고 싶은 내용들을 자유로이 쓸 수 있었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에게 전쟁은 더욱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우와 나누고 마음을 터놓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다.

 

사변 전에 김 교장과 같은 학교에서 형제처럼 지내던 문 선생은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하고 작곡도 하는 친구였다. 김 교장이 시를 써서 보내면 문 선생이 그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었다. 김 교장은 그 노래가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터져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 노래가 그들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불안했다. 그는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혹시라도 배운 사람들이 보면 결점이 드러나진 않을까 두려워서 자신의 생각이나 글들을 세상에 떳떳하게 내놓지를 못했다.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에 감사과에서 그의 이력서를 보고 ‘어떻게 이 어린 나이에 체신국에 있을 수 있었느냐’라고 캐물었다. 준교사 시험에 합격한 것도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더 뒤에 발령을 받았는데도, 감사과에서는 ‘배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이른 나이에 발령을 받을 수 있었느냐’라며 이해하지 못했다. 김 교장은 그럴 때마다 무척 괴로웠지만 “많이 못 배워서 미안합니다. 부끄럽습니다. 내가 할 얘기가 그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교사들에게 서예 지도를 해서 우수지도자 상장을 받았을 때도 누구에게 사사했느냐는 질문에 김 교장은 어린 아이처럼 “나요, 내 자신이요.”라고 할 수도 없어서 어물어물 넘어가곤 했었다. 그렇게 자신도 없고 제대로 배우지 않았어도 오랜 친구가 인정해준 것과 우수지도자 상장을 받은 것이 김 교장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새로운 도전, 64세에 운전면허를 따다

 

김 교장은 무릎이 아픈 부인을 위해 정년퇴임을 앞두고 64세, 늦은 나이에 자동차 면허를 땄다. 처음 주행 시험에서는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느라 시간초과로 두 번 떨어 졌지만 뒤에 탈락 이유를 알고는 ‘폭주’를 해서 “축하합니다!” 합격 통보를 받았다. 60대의 노인이 면허를 따려고 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걱정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운전면허 학원 매점 노파는 김 교장에게 무엇을 하러 왔냐고 물었고 그는 개인면허를 따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노파는 설마 그가 첫 면허를 따러 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개인택시는 10년 무사고여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김 교장은 “나는 운전해본 적이 없어서 10년이 아니라 수 십 년 무사고”라고 농담을 했다. 노파는 노인네가 망령됐다고 면허가 그리 쉬운 건 줄 아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그 뒤 김 교장이 면허시험에 합격한 것을 알고 노파는 “참 별꼴”이라고 하면서도 놀라워했다. 남들이 놀라워할 만큼 늦은 나이에 자동차 면허를 딸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의 특별한 경험과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 교장이 소학교 3, 4학년 때 큰 형님의 자전거를 몰래 끌고 나간 적이 있었다. 큰 형님은 키가 컸기 때문에 그 분의 자전거는 보통 자전거인 6호보다도 바퀴가 더 큰 7호였다. 김 교장은 어른도 타기 힘든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가 결국 개울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한 번 떨어지고 나니, ‘개울에 떨어져도 다치지 않았는데 평지에서 넘어진다고 설마 다칠까’하고 오히려 자신이 생겼다. ‘달리는 자전거에 폐달을 계속 돌리면 넘어지지 않는다. 겁이 나서 멈추려고 할 때 넘어지는 것이다’라는 체험을 하고 난 뒤부터는 두렵지가 않았다. 김 교장은 그때 그 경험을 통해 ‘두발 자전거도 타는데 네발 자동차야 더 쉽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으로 담대히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쉽지 않았던 한 평생의 삶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자전거를 배우며 스스로 터득한 삶의 지혜 덕분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는 그 뒤로 십 여 년 간, 부인과 딸들 그리고 손녀들의 기동력이 되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차를 탈 때마다 자랑스러웠다. 늦은 연세에 면허를 따셨지만 젊은 사람들보다도 부드럽고 편안하게 운전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할아버지처럼 운전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인터뷰를 하고 글을 쓰다 문득 6살 무렵 할아버지께 두 발 자전거를 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달리는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 폐달을 계속 돌리면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 겁이 나서 멈추려고 할 때 넘어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셨다. 이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직접 체득하신 교훈이었다. 모두가 어렵던 시기, 유독 더 아픔이 많았던 할아버지는 “달려야 넘어지지 않는다.”라는 믿음으로 숱한 삶의 위기들을 이겨내셨던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믿고 용기를 내어 두발 자전거를 배웠고, 자동차 면허도 땄으며, 힘들어서 잠시 쉬는 시간들은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살아오고 있다.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체험에서 나온 소중한 깨달음은 내게도 귀한 유산으로 남아, 나도 모르는 사이 삶의 여러 고비마다 지침이 되어 온 것이다.

 

참봉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으로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시기 까지 다사다난했던 날들... 일제시대와 한국 전쟁, 한국사의 여러 곡절마다 그의 삶에 크고 작은 무늬로 남았을 사건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또 이 글을 쓰면서, 모든 것을 그 분이 경험한 그대로 알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와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나의 성향이나 삶에 대한 태도에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이 얼마나 깊이 새겨져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세대가 다른 이들의 시간을 똑같이 살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살면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그 일이 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가다 보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다보면 더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며 사랑할 것이다.  

 

 


♣ 이 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회)에서 진행된 인문360˚ 세대공감 이야기 공모전 수상작입니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 글의 내용을 무단복제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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