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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외진 곳

장은진 소설

장은진

2020-05-25

당신의 외진 곳 장은진 소설 민음사

▲ 장은진/민음사/2020/324/13,000

 

 

열려 있는 녹슨 대문을 지나 마당 한가운데 서서 잠시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불이 들어온 방의 개수를 세었다. 그래도 다섯 군데나 되었다. 동생이 가고 나면 나는 더 자주 저 네모난 불의 개수를 세며 지내게 될 것이다. 그때 등 뒤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혼잣말인 듯한 작고 부드러운 말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은 좀 늦었네요. ”

당신의 외진 곳40

 


처음에는 그냥 물건인 줄 알았다. 아니, 물건이었다.

여행자들이 여행 다닐 때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바퀴 달린 검은색 트렁크.

이런 물건이 왜 난데없이 내 집에 있나 싶어 여자는 무심코 발로 푹, 건드려 봤다. 딱딱하고 차갑고 어두운 그것이 구석으로 조금 움직였다. 분명 건드려서 밀린 게 아니라 여자의 발을 피해 스스로 움직인 것이었다. 딱딱한 듯 말랑한 느낌이 들기도 해서 이번에는 건드리지 않고 푹, 차 봤다. 그러자 그것이 구석으로 좀 더 움직였다. 찰 때마다 구석 쪽으로 움직이기만 할 뿐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래서 여자는 소리를 낼 때까지 계속 찼다. 물건이 아니라면 소리를 낼 것이 분명하므로. 구석으로 완전히 몰려 더 이상 움직일 공간이 없을 때까지 발로 찼더니 왼쪽 어깨에 해당하는 부근이 조금 솟았다 가라앉았다. 왼쪽 어깨를 들썩이는 버릇.

아버지였다.

당신의 외진 곳277~278

 


장은진의 소설집 <당신의 외진 곳>에서는 세상의 그늘진 곳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따스하게 품어안는 작가의 시선이 빛난다. 표제작 <외진곳>에서 두 자매는 집 한 채를 9개 방으로 나누어 쓰는 이 벌집 같은 협소한 공간 네모집에서 힘겨운 일상을 꾸려가지만 결코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애써 서로에게 관심을 주려 하지 않지만, 주인공은 어느 추운 크리스마스이브, 이 네모집 9개의 방에 전부 빛이 밝혀져 있는 것을 보고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9개의 방이 마치 9개의 아름다운 환한 전구처럼 그들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온 크리스마스 전날 밤을 따스하게 밝혀준다. 빛은 대도시의 대낮처럼 환한 중심만이 아니라 이토록 외진 곳, 9개의 네모집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인공은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외진 곳은 오직 마음의 촛불만이 밝힐 수 있는 따스한 이웃의 속삭임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추천사 : 정여울 위원(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저자)





○ 출 처 : 책나눔위원회 2020<5월의 추천도서문학 https://www.readin.or.kr/home/bbs/20049/bbsPostDetail.do?currentPageNo=1&tabNo=0&childPageNo=1&postIdx=1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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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진

1976년 광주 출생. 200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와 2004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에 소설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키친 실험실』, 『빈집을 두드리다』, 장편소설 『앨리스의 생활 방식』,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날짜 없음』이 있다. 2009년 문학동네작가상, 2019년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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