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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고통에 참여하기-공존을 위하여

레비나스의 철학을 중심으로

인문쟁이 엄소연

2017-04-14


주제에 대한 고민은 아마도, 모든 글 쓰는 이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그리고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인문쟁이’로서 쓰는 마지막 글에 대해서는 몇 달 전부터 고민했음에도 주제를 정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10여 년 전 학생시절의 자료들까지 뒤적이며 고민한 끝에 결국, 마지막 에세이에는 가장 근본적인, 동시에 가장 어렵기도 한, 인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담아보기로 했다.


인문학은 구체적인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내는 대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에서 만들어지는 제도와 기술의 정당성과 의미를 살핀다. 결과물 자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닌, 산출 과정과 이후의 쓰임이 올바른가를 성찰하려는 지적 작업이라 볼 수 있겠다.


이러한 탐구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고민에 닿아 있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에서 그려진 인간의 모습과 삶의 문제들, 그리고 역사 속에서 파악되고 철학적으로 탐구되어 온 가치들은 결국 ‘어떤 주체로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연결된다.


인간을 어떤 주체로서 이해하는가는, 자연히 인간이 세상과 소통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방식에도 반영된다. 근대 이후 급격히 발달한 소위 ‘기술문명’은, 세계를 인간의 이익을 위해 활용할 대상으로 보고, 오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에 따라 대상을 평가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여기에는 인간을 ‘지배적 주체’로 이해하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근대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를 철학의 토대가 되는 ‘제1원리’로 표명하였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더라도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한 것이며, 따라서 세상을 인식하고 이에 대해 사유하는 ‘주체’는 어떤 회의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데카르트

▲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이후 서양 근대 철학에서 ‘생각하는 주체’는 다른 존재들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중심에 놓이고, 이 주체의 틀에 들어오지 못하는 존재들은 배제된다. 주체의 ‘합리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이 되는가에 따라 대상의 가치를 평가하는 도구론적 세계관은, 물질적 발전으로 이어지는 듯했으나, 파괴와 착취, 분쟁과 소외 등 더 큰 문제들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지배적인 주체’ 중심의 철학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었고, ‘탈 주체’혹은 주체의 ‘해체’ 등 기존의 주체 이해를 넘어서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어졌다. 이 글에서는 특히, 주체의 존재 가능성을 ‘타자’를 통해 찾고자 한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철학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생각하는 주체에서 응답하는 주체로

레비나스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로, 독일에서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강의를 들으며 현상학을 공부하고 프랑스에 이를 소개하였다. 2차 대전 당시 참전하여 통역을 맡았던 그는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서 5년간 강제노동을 하게 되고, 그동안 그의 가족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는다.


2차 대전의 비극은, 타자를 주체의 기준으로 규정하는 ‘존재론’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폭력을 보여주었다. 자신과 가족들에게 가해진 이 폭력을 직접 겪으며, 레비나스는 서양 근대철학의 전통적인 주체 인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을 제시한다.


레비나스

▲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레비나스는, 외부의 존재를 주체에게 지배되는 종속적 ‘대상’으로 보는 존재론적 시각은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지적하며, 철학의 중심을 주체가 아닌 타자에서 찾고자 했다. 그는 ‘주체’가 다른 존재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에 의해 주체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주체의 근거는 ‘생각하는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생물학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타자의 존재를 전제로 탄생하고, 생존할 수 있다. 타자는 주체에 의해 파악되는 대상이기 이전에, 그 주체가 존재하게 하는 근거이자 기원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타자’는 주체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주체와 동일하게 환원될 수 없는, 주체의 틀 밖에 있는 ‘무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주체는 타자를 지배할 수 없으며, 주체의 성립은 자신의 사유 안으로 타자를 종속시킴으로써가 아니라 타자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타자를 ‘수단’으로서 대상화하는 대신,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책임에 주목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주체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지와 이성을 사용하는 ‘목적론적 인간’이 아닌, 책임을 인식하는 ‘윤리적 인격’으로서의 주체이다. 데카르트가 ‘코기토(Cogito)’로부터, 즉 생각하는 자아의 존재를 통해 확고한 주체의 근거를 제시한 데 비해, 레비나스는 ‘수브옉툼(sub-jectum)’ 즉 타자를 ‘대신’하여 ‘책임’지는 데에 주체성의 핵심이 있다고 보았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타자를 책임짐으로써 주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타자는 주체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얼굴’을 드러내며 ‘스스로’ 나타나, 주체에게 말을 건넨다. 이 얼굴은 강한 자가 아닌, 낯선 이방인, 비참하고 힘없는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주체는 이 호소를 외면할 수 없다. 응답해야 할 타자의 존재에, 책임져야 할 타자의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타자에게 드러나 있는 상태, 즉 ‘상처받을 수 있음(la vulnérabilité)’에 주체성의 핵심이 있다고 보았다. 주체의 존재 가능성은,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고, 그 고통으로 함께 상처를 받으며 책임을 지는 데에 있는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과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 Essai sur l'Exteriorité, 1961) /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Au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1974) - ‘타자의 윤리학’이라 불리는 레비나스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저작들로 알려져 있다.


타자는 고립되어 있지 않고, 무수한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주체는 타자를 마주하며 그와 이어져 있는 ‘제3자’들과 이어지고,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이들뿐 아니라 다른 모든 제3자들에게도 ‘책임’을 가지게 된다. 주체는 왜 제3자에 대한 책임까지 갖는 것일까? 수많은 제3자에 대한 책임은 개별 주체가 아니라 국가나 사회의 몫이 아닐까? 국가적·사회적 규범은, 물론 제3자를 포함한 ‘모두를 위한 정의’를 추구한다. 그러나 이 체계의 실현 과정에서 적용되는 ‘보편적인 기준’아래서 누군가의 특수한 상황은 고려되지 못하고, ‘제도의 합리성’이라는 명분으로 일부의 고통이 정당화되는 결과 역시 함께 발생한다.


더 나아가면 이는 ‘전체’에 공유되는 ‘보편적’인 기준 밖의 존재들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살해하기까지 하는,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비극에까지 이르게 된다. 일상에서의 배제부터 정당화된 살인에 이르기까지, 소위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합리적’인 이론과 ‘체계적’인 제도가 배제와 폭력의 근거가 된 예는 인간 역사에서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 수백만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 P.Sawicki (UNESCO)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제시한 ‘윤리적 폭력’의 개념도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버틀러는 근대의 역사가, 주체의 기준을 일종의 윤리처럼 ‘보편적인 행위준칙’으로 제시하고, 여기서 벗어나는 타자들을 제거하는 폭력을 ‘보편’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왔음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이런 폭력을 극복하는 주체로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기-이해’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 한계를 주체 자신만이 아닌, ‘공동체’의 문제로서 인식함을 뜻한다. 레비나스가 이야기했던 각자의, 각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에 응답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국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체제 속의 질서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경우에도 폭력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국가로 대표되는 제도적 체제는 ‘보편성’을 추구하므로, 개별 존재들의 구체적인 고유성을 모두 살필 수가 없고, 때문에 의도하지 않더라도 일부에게는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고통 받는 누군가의 ‘숨은 눈물’은 사회의 눈이 아닌 개인들의 ‘양심’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고,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이 눈물에 응답하는 주체들의 책임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체제가 완전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모든 제3자에 대한 주체의 책임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각자가 주체인 동시에 서로에게 타자인 존재들이 폭력 없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나와 다르더라도) 타자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내가 직접적으로 야기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의 고통을 함께 책임지는 연대가 필요하다. 이 연대는, 생각하는, 고로 타자를 지배하는 주체가 아닌, 타자와 함께 고통받을 수 있는, 책임에 응답하는 주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다른 존재들에게 무관심하며, 그래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고, 모른다는 것을 이유로 책임을 면제받고자 한다면, 타자를 배제하고 제거하는 폭력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언제라도 이 폭력에 의해 추방되는 대상이 될 수 있다. 각 주체는 결국, 타자에 대한 응답과 책임의 연대가 없이는 언제든지 그 주체성을 잃고 제거될 수 있다. 타자를 통해 주체의 성립과 존속이 가능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되는 부분이다.


폭력을 넘어서는 길 - 타자와 함게 아파하기

지금까지 ‘타자’를 중심으로 한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짧은 글에서 그의 방대한 사상을, 그리고 관련 연구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지만, 레비나스 철학의 일부를 통해서나마 우리에게 요청되는 주체에 대해 생각해본 것은 의미 있는 시도일 것이다. 개성이 존중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충’과 같은 혐오발언이 일상화될 정도로 ‘다름’에 대한 배제가 만연해있는 지금, 타자의 얼굴에 주목한 레비나스의 철학은 시사 하는 바가 매우 크다.


혐오적 표현들

▲ 혐오적 표현들이 신조어로 연이어 등장하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 구경하 (KBS)


한병철은 최근의 저서 『타자의 추방』에서,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타자는 모두 ‘추방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다양한 가치 추구가 가능한 세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폭력은 여전히, 도처에 존재한다.


주체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서로에게서 고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은 각 주체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그들의 책임이 아닌 것으로 외면된다. ‘보편’적 기준에 맞지 않는 타자는 고유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제거되며, 주체들은 타자에게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을 통해, 이에 동조한다.


타자에 대한 폭력은 테러나 전쟁과 같은 극단적 형태나, ‘블랙 리스트’와 같은 제도권의 억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타자에 대한 지배와 배제는 일상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타자를 책임지지 않는 주체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누구나 언제나 소외되고 추방될 수 있다. 이런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자에게 응답하는, 타자의 고통을 책임지는, 연대하며 공존하는 주체가 필요하다. 특정인이 아니라 모든 개인에게 이런 ‘주체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보편적’ 기준만이 폭력적으로 작용하는 현재의 상황을 한병철은 ‘같은 것의 지옥’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모든 차이를 소멸시키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길은 타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레비나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주체의 틀 바깥에 존재하는 무한한 타자들을 인정하고, 타자들의 고통에 응답함으로써, 고립과 폭력을 넘어서 공존의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획일화된 기준을 강요하며 이를 벗어나는 타자들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폭력적 주체가 아니라, 타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를 받아들이는 주체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통해, 추방시킨 타자들의 자리를 되찾아 주어야 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폭력을 외면한다면, 그 주체 역시 언제라도 또다른 폭력에 의해 소외되고 제거될 수 있다. 주체는 타자를 지배함으로써가 아니라, 타자에 대해 책임을 짐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타자의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당장 생업을 포기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익명성 뒤에 숨어 무관심으로 책임을 회피하지 말자는 것이다. 누가 어디에서 고통 받든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 말고, 이 폭력이 왜 발생하고 있으며 어떻게 멈춰질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타자의 고통은 언젠가 나의, 혹은 나와 가까운 이들의 고통이 될 수도 있다.


내전을 피해 탈출하여 표류중인 시리아 난민선

▲ 내전을 피해 탈출하여 표류중인 시리아 난민선 © UN난민기구(UNHCR)


타자에 대한 응답은, 우월감에서 나오는 시혜적 행위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공존하는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타자에 대한 폭력을 외면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인격적 주체’가 필요하다. 근대적 주체에 대한 반성적 성찰, 인간이 어떤 주체로서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추상적인 탐구에서 시작되었지만, 새로운 주체를 통해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구현될 수 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민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길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평론가 김현(1942~1990)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때문에, 그의 표현을 빌리면 ‘써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어떻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이야기했다.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문학의 ‘쓸모’는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문학뿐 아니라 인문학의 다른 영역에서도 그렇다. 인문학은 직접적인 부의 창출이나 권력의 획득과 같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써먹을 수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특정 주체를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되는 대신, 인문학은 억압과 폭력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주목하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삶의 주체로서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평가의 척도 혹은 상업적 소재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는 지금, 인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겠다.


글을 맺으며, 지난 2015년 인문360˚의 기획을 처음 접하고, 인문쟁이에 지원하던 때의 설렘을 떠올려본다. 문학을 전공했지만 졸업한 뒤로는 수년간 금융회사에서 숫자에만 파묻혀 살았고, 다시 글을 쓴다는 것, 더구나 세상에 글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정말 어렵게 용기를 냈고, 감사하게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인문포털에 기고하는 귀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취재를 하면서, 바쁜 삶 속에서도 꾸준히 인문학을 공부하며 소통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열정을 만나볼 수 있었고, 에세이를 쓰면서, 인문학과 예술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부족하나마 글로 담아낼 수 있었다.


여러 날을 고민하며 글을 쓰고, 수없이 고치며 공들여 다듬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쏟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했지만, 미약하나마 인문학의 즐거움과 소중함을 왜곡 없이 공유할 수 있었기를 바래본다. 인터뷰에 기꺼이 응해주시고 취재를 여러모로 지원해주신 분들, 매번 늦어지는 원고를 받아들고 애써주신 ‘인문360˚’ 담당자분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인문학을 통해 더 많은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두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더 나은 삶을 인문학에서 함께 찾아나갈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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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번 글을 쓰기 위해 공부하면서 아래의 자료들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 함께 읽어보기를 제안하고 싶다. 쉽지는 않지만 흥미롭고 의미 있는 탐구의 여정이 될 것이다.


강영안,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5

김현, 한국문학의 위상, 문학과지성사, 2009

윤대선, 레비나스의 타자철학 - 소통과 초월의 윤리를 찾아서, 문예출판사, 2009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옮김, 윤리적 폭력 비판 -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인간사랑, 2013

콜린 데이비스, 주완식 옮김, 처음 읽는 레비나스 - 타자를 향한 존재론적 모험, 동녘, 2014

한병철, 이재영 옮김,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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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소연
인문쟁이 엄소연

[인문쟁이 1,2기]


엄소연은 경기 고양시에 살고, 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한다. 춤과 음악에서 힘과 용기를 얻고 있으며, 이를 무대에서 사람들과 나눌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어디에서든, 누구에게서든 그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인문쟁이에 지원했다. 더 많은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함께할 수 있길 기대한다. like_ball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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