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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삶이여 만세

프리다 칼로, 절망을 딛고 희망을 그리다

인문쟁이 엄소연

2016-10-18


팔을 수술하고, 재활 전까지 고정시켜 놓았던 적이 있었다. 묶여있는 것은 한쪽 팔 뿐인데도, 집안에서의 일상적인 활동조차 쉽지 않았다. 바깥 공기라도 한 번 쐬려면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보호자를 대동해야 간신히 문 밖을 나설 수 있었다.


신체의 일부를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은, 불편할 뿐 아니라, 생각보다 큰 좌절감을 느끼게 했다. 진통제를 먹어도 계속되는 통증 속에서, 이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이 들고는 했다. 그 즈음에, 금속 벨트로 상반신을 감싼 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의 <부러진 척추>였다.


부러진 척추(1944), 캔버스에 유채

▲ 부러진 척추(1944), 캔버스에 유채, 돌로레스 올메도 미술관


황량한 하늘과 메마른 땅 가운데 서있는 그녀의 몸은 외과용 코르셋으로 감싸여 있다. 척추 대신 몸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에는 여러 군데 금이 가 있어,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자신의 몸 상태를 표현한 듯하다. 얼굴부터 팔다리까지 온 몸에 못이 박혀 있는데, 이는 못이 꽂혀있는 듯한 전신의 통증을 나타낸 것 같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얼굴에는 하얀 눈물방울들이 흘러내리고 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며 꿋꿋이 서있다. 대체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길래, 몸이 이 지경이 된 걸까? 그리고 이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저리 의연하게 서있을 수 있을까? 그림의 주인공이자 화가 자신인 그녀가 궁금해졌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로 이주한 독일인 아버지와 스페인/인디오 혼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혁명의 열기가 넘치던 시절의 멕시코에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매우 총명하여 당시 멕시코에서 가장 수준높은 교육기관인 국립예비학교에 최초의 여학생들 중 한명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2천명의 학생들 중 여학생은 35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프리다는 의학 과정을 선택했고, 이후 그녀의 그림에서도 생물학과 해부학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엿볼 수 있다.


1925년, 명문 학교에 다니던 19살의 프리다에게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하교길에 타고 있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면서, 손잡이 철봉이 튀어나와 그녀의 몸을 뚫고 나갔다. 상상조차 되지 않는 끔찍한 장면이다. 강철 막대가 관통해나가면서 척추 세 군데와 갈비뼈 두 개, 골반 세 군데와 쇄골이 부러졌고, 오른발은 탈구되어 으스러졌으며, 왼쪽 어깨 탈골, 복부와 질 천공까지… 생존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사고 이후 프리다는 몇 달동안을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어야 했는데, 그녀는 이 시기에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기둥이 달린 침대를 마련하고, 거울을 걸어 작업대를 설치해주었다. 침대에만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자화상은 이후에도 프리다의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프리다는 자기 자신을 그린 이유를 “너무도 자주 외롭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병상에서의 외로운 시간과, 그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마주하고 탐구한 시간을 엿볼 수 있는 대답이다. 자화상들 속에서 프리다는 다양한 의상들을 입고 나타나는데, 여성성과 당당함, 우아함과 의연함, 멕시코의 민속적 색채와 모성애 등 그녀에게 공존했던 여러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1926)

▲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1926),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 공식적으로 알려진 프리다 칼로의 첫 작품으로, 19세 때 사고 이후 병상에서 그려졌다. 

미술을 배우지 않고 혼자서, 다친 몸으로 그렸음에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준다.


오랜 시간을 병상에서 보낸 뒤, 프리다는 또 다른 사고와 같은 일을 만난다. 프리다는 자신의 삶에서 두 번의 대형사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18살에 일어났던 끔찍한 교통사고이고, 두 번째는 디에고와의 만남이라고 했다. 그 엄청난 교통사고와 견줄 정도로, 디에고와의 만남은 그녀의 삶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교통사고로 인해 육체의 통증이, 디에고로 인해 마음의 고통이 평생 계속되었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는 멕시코 벽화운동의 주역으로, 멕시코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국민화가였다.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여성편력으로 악명 높았다. 1929년, 21살의 프리다는 21살 연상인 42살의 디에고의 세 번째 부인이 된다. 작고 가냘픈 프리다와,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몸무게는 150킬로그램에 달했던 디에고의 결혼을 두고 사람들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했다. 외양의 차이뿐 아니라 나이 차이도 많았지만, 두 사람은 뛰어난 예술가이자 혁명가로서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디에고의 외도는 계속되었고, 심지어는 프리다의 여동생과의 불륜까지 저지른다. 이런 여성편력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디에고를 떼어놓을 수 없는 자신의 일부로서 매우 사랑했고, 그래서 수없이 상처받고 끊임없이 고통받았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1929)

▲ 결혼할 당시의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1929)


여러 번의 수술을 거듭했지만 건강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혼과 재결합을 오갔지만 디에고의 여성편력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를 원했고 세 번 임신했지만, 세 번 모두 유산했다. 멈추지 않는 극심한 통증과 계속되는 절망 속에서 그려나간 프리다의 작품들에는, 삶의 고통과 그 고통을 마주하는 그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상처 입은 사슴(1946)

▲ 상처 입은 사슴(1946), 메소나이트에 유채, 캐롤린 휴스턴 콜렉션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는 사슴이 어딘가로 다급히 향하고 있다. 사슴의 몸에 연결된 사람의 머리는 프리다 자신의 얼굴로 그려져 있다. 주위에는 메마른 나무들뿐이고, 그나마 잎이 있는 나무는 가지째 꺾여 바닥에 떨어졌다. 멀리 바다가 보이지만,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고 번개가 친다. 어떤 희망도 없고, 더 큰 고통이 몰려올 듯한데, 이 사슴은 어디로 가야할까? 절망적인 가운데 온몸에 화살이 꽂힌 채 피를 흘리며 헤매는 사슴의 모습에서, 프리다가 겪고 있었던 몸과 마음의 고통, 그리고 그녀가 처했던 절망적인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화살처럼 날아와 피할 수 없었던 사고와 몸에 박혀 빼낼 수 없는 상처들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살아낸 의지도 함께 느낄 수 있다.


그녀가 남긴 일기 역시 삶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문장의 내용이나 필체는 물론, 스케치와 수채화 등 그림의 색채와 선의 느낌에서도 당시 겪었던 감정들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생에 대한 의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부분들은 특히 인상적이다.


1950년

… 7번의 척추 수술 … 아직 휠체어에 앉아 있다. 언제 다시 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 만취한 듯한 피로가, 그리고 당연하게도 매우 자주 절망이 찾아온다. 절망은 그 어떠한 단어로도 정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싶다.


1954년 3월 21일

나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걷는다는 확신, 그린다는 확신. … 내 의지는 강하다. 내 의지는 변함이 없다.


1954년 4월 27일

…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디에고를 비롯해 … 나에게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한다. 나 자신에게도 감사하다. 나를 아끼는 모든 이들과, 내가 아끼는 모든 이들을 위해 삶을 지탱하려는 나의 강한 의지에도 감사한다. 즐거움 만세, 삶이여 만세…


프리다는 이 일기를 쓴지 3개월여 후,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른발 절단과 7번의 척추 수술을 포함한 32번의 수술, 세 번의 유산, 친동생에게까지 이른 남편의 끝없는 외도… 그토록 극심한 몸과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프리다가 보여준 삶에의 의지는, 예술가로서 혹은 여성으로서의 강인함을 넘어서 실존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숭고함을 전해준다.


프리다 칼로의 일기, 프리다 칼로 박물관프리다 칼로의 일기, 프리다 칼로 박물관

▲ 프리다 칼로의 일기, 프리다 칼로 박물관

- 왼쪽은 1953년 오른발을 절단하는 수술을 앞두고 있던 시기의 일기로, 썩어가는 자신의 발을 그리고 이렇게 썼다. 

“발이 왜 필요하지? 내게는 날개가 있는데”


프리다 칼로의 그림에 대하여, 앙드레 브르통이 극찬했던 초현실주의적 표현과, 의상과 인물표현에서 잘 나타나는 멕시코의 민속 재현, 그리고 우주와 대지를 아우르는 보편적 자연에 대한 성찰 등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평가보다도, 그녀의 작품에서 가장 꾸준하게, 또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난,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그 고통을 마주하며 살아나간 인간의 모습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프리다 칼로의 삶에 대하여, 천재화가의 아내로서 남편의 그늘에 머물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품세계를 구축한 여성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접근과, 산업화 속에서 멕시코의 전통을 지켜내려 한 민족주의적 노력을 주목하는 시각, 공산당에 가입하여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도 시위에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참여적 예술인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평가보다도, 그녀의 삶에서 마지막까지 계속된, 모든 고통을 마주하며 걸어나간 생의 의지를 기억했으면 한다.


프리다칼로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회복된 듯하더니 다시 악화된 통증 때문에 한쪽 손에 깁스를 하고 있다. 다른 한손으로 자판을 누르면서, 통증 속에서 그림을 그리던 프리다를 다시 떠올려본다. 삶은 자주, 고통스럽고, 아픈 일들의 연속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든 엄청난 후유증을 남기는 사고와 같은 일들이 생길 수 있고, 또 누구에게든 평생 마음을 찢어놓는 상처들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통 속에 놓이게 되더라도, 혹은 평생을 안고 갈 고통을 만나게 되더라도, 생의 걸음을 멈추지 않고 딛고나갈 수 있기를. 자화상 속 얼굴들에서처럼 눈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고통스러워도 그 삶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 나갔던 프리다처럼, 절망을 딛고 희망을 그려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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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소연
인문쟁이 엄소연

[인문쟁이 1,2기]


엄소연은 경기 고양시에 살고, 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한다. 춤과 음악에서 힘과 용기를 얻고 있으며, 이를 무대에서 사람들과 나눌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어디에서든, 누구에게서든 그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인문쟁이에 지원했다. 더 많은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함께할 수 있길 기대한다. like_ball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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