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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번째 소원

나의 첫 번째 새로운 소원

정혜윤

2015-12-22

나의 첫번째 소원

요즘 자주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몇 년 전에 제주도에서 취재했던 할머니다. 내가 만났을 때 그녀는 몇 살이나 먹었을까? 아마 칠십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녀는 그보다 젊었을 때도 당신은 참으로 아름답군요! 라는 말을 듣지는 못했을 것 같다. 대신 다른 말을 들었을 것이다. 당신은 참으로 강인해 보이는군요. 그녀의 얼굴 표정 때문에 내가 그런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녀는 좀처럼 잘 웃지 않고 깐깐해보였고 말도 꼭 필요한 말만 하는 편이었다. 할머니의 젊은 날 별명도 ‘강장군’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녀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가 나이 들어서 얻은 별명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칠십이 넘어 노인대학에 나가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노인대학에서 새로 얻은 별명이 ‘잘 듣는 사람’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별명에 흥미를 느꼈다. 할머니는 그런 별명을 얻게 된 이유를 내게 설명해주었는데 그 대답의 한 부분이 영 잊혀지지가 않는 것이다. 할머니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는 이 세상이 어떻게 이 세상이 되었는지 궁금해. 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 지금 들으면 이제 더 이상 그 말은 못 듣는 거잖아. 한번이잖아. 그런 생각이 들면 말이 귀에 쏙 들어와. 또 내가 이 말을 듣고 죽으면 천국 가서도 그 말을 기억할까 싶고 내가 이 말을 듣고 죽으면 그 천국이 달라질까도 싶어.”

잠든 가족의 나이 들고 시든 얼굴을 슬쩍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슬픔을 느끼면서도, 그 슬픔에 관해서라면 차마 입 밖에 내지 않기를 택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무게를 알 것이다. 정말로 우리에게 기회는 한번뿐이다. 우리의 삶은 한번이다. 초원의 빛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매 순간은 너무나 소중하다. 만약 우리가 작별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손을 아주 크게 흔들어서 작별을 해야하고 우리가 사랑을 한다면 한번 만나고 다시 못 만날 듯이 사랑해야할 것이다. 이런 덧없음을 생각도 하지 않는 날도 있고 이런 덧없음을 견디기만 하는 날도 있고 이런 덧없음에 차라리 위안을 받는 날도 있고 이런 덧없음 때문에 오히려 숭고해지는 날도 있다. 그런데 요즘 내게 할머니의 말이 다른 식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바로 이 부분이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죽으면 천국이 달라질까도 싶어.”

나는 할머니의 질문을 순진하게 나에게 돌려본다. 우리가 어떤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정말로 천국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을까? 나는 할머니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천국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란 점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없는 천국은 절대로 천국일 리가 없다. 잠 못 이루는 밤에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떠올려본다. 내가 내 가슴보다 더 높게 들어 올렸던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우리가 함께 존중했던 생각들, 우리를 가슴 뛰게 하고 고양시켰던 질문들, 태도들. 순간들. 기억들. 너무나 그리운 미소. 다정한 손길. 빛나는 세계를 담은 눈동자. 나는 2016년을 새롭게 시작하기를 열망해 마지않는다. 나의 시작은 나의 꿈을 갖는 것이다. 사실 꿈은 있다. 내 꿈은 천국을 낳는 것이다. 지금 이 곳에. 이 세상 한 가운데에. 내 깨끗하고 열렬했던 사랑을 닮은 천국.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희귀하고 좋은 것을 알아보고 사랑했던 사람들을 닮은 천국. 그리고 앞으로 할 사랑을 닮은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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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혜윤
정혜윤

CBS 라디오 프로듀서. 탁월한 북 칼럼니스트이자 감각있는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독서기 『침대와 책』과 『삶을 바꾸는 책 읽기』, 고전 에세이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여행 에세이 『런던을 속삭여줄게』와 『여행, 혹은 여행처럼』, 르포르타주 에세이 『그의 슬픔과 기쁨』 등을 썼다. 《김어준의 저공비행》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등 ‘사람’의 ‘이야기’를 채집하는 방송을 오늘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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