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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고 응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존재한다.

더 나은 내일, 유토피아를 꿈꾸며

황정운

2018-12-19

 

유토피아’, 불가능한 미래로 나아가는 힘!


토마스 모어가 1516년 소설 <유토피아(Utopia)>를 출간했을 때 이는 기존에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희랍어로 ‘없는(ou)’, ‘장소(topos)’ 이 두 단어를 조합하여 새롭게 만든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을 의미했다. 흔히 이상향으로 통용되는 이 단어는 사실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를 상정한다. 언뜻 보기엔 정적인 느낌이다. 그러나 유토피아라는 단어의 이면에는 도달 불가능한 지점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運動)이 내재되어 있다. 도달 불가능한 지점에 닿을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의 여부와는 별개로, 계속해서 그곳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신기루라고 하여도 어쩔 수 없다. 진보를 향한 분투(奮鬪)다. 다시 정리해보자. 유토피아는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정적인 의미, 그리고 현재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목표를 향해 운동한다는 동적인 의미. 운동의 방향이 직선일 수만은 없다. 끊임없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며 지그재그로 나아갈 것이다. 어쨌거나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게 핵심이다.


토마스모어,유토피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 이 씁쓸한 이유'


유토피아는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했다.

저녁 일곱 시. 광화문 직장에서 5호선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가끔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지나게 된다. 서점에 들어서 신간을 소개하는 입구를 지나 인문, 소설 코너를 거쳐 왼편으로 돌아 계산대를 지나면 지하철 연결통로에 다다르는데 그 시간이 채 1분도 걸리지 않는다. 1분 동안 천천히 걸으며 통로에 진열된 책을 눈여겨 본다. 밖으로 꺼내져 통로에 진열된 책은 지금의 화두를 가장 잘 나타내는 책들일 테다. 그런데 요새 아내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 언젠가부터 비슷한 제목의 책이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나다운 것, 사소한 것, 소중한 것, 이런 것들을 테마로 일상의 행복을 소개하는 책이 우후죽순으로 출간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런 책들은 대개 표지도 비슷하고, 표지를 열어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달하는 메시지도 다 비슷해”라며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 웃음의 의미는 공감보다는 조소에 가까웠다. 그들은 한결같이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서 확실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작은 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삶의 방점이 미래를 향할수록 현재는 단지 견뎌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오늘은 괴롭지만 겪어야 할 통과의례처럼 취급된다. 책들은 그런 것에서 벗어나자고 했다. 그들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좇자고 했다. 미래가 아닌, 바로 오늘.


무라카미하루키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이 말이 크게 인기를 얻은 건 아마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가 2018년 주요 소비 트렌드 10개 중 하나로 제시한 ‘소확행(小確幸)’ 때문일 거다. 지금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행복 담론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무려 30년 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 비롯되었다. 30년 전 1986년 무라카미 하루키는 <랑겔한스섬의 오후> 수필집에서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처음 제시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이것이 하루키가 말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큰 것보다는 작은 것, 위대한 것보다는 일상적인 것, 갈증 속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이쯤이면 되었다며 수긍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것, 하루키는 그런 것들에서도 행복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보자. 하루키는 작은 순간들에서도 행복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미래가 아닌 현재에서도 행복은 존재한다고 했다. 이 말은 미래에도 행복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미래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있다. 어디에도 발견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행복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우리 시대에 도달 불가능한 유토피아는 어느 순간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유토피아를 말하는 자가 있다면 홀로 무게 잡는 것이라고 여길지도 몰랐다. 바로 그것이 아내와 내가 교보문고를 지나며 나다운 것, 사소한 것, 소중한 것을 내세우는 책을 보며 씁쓸함을 느낀 이유였다.


그런책들은 대개 비슷



다시, 유토피아를 꿈꾸며


유토피아는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했다. 우리 시대는 더 이상 미래를 말하지 않고 있다 여겨진다. 유토피아가 미래에 존재하는,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도달 불가능하더라도 계속해서 그를 움켜쥐려 진보하려는 운동(運動)의 힘은 멈춘 지 오래되었다. 우리는 미래가 없는 삶에 계속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손을 들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우리가 욕망을 버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공동체의 교류와 선한 화합을 꿈꾸고, 더 오래 살고 싶어 하며 오늘보다 내일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사회적 위치, 재산의 수준, 사상의 차이와는 무관하게 사람으로서 가진 본질적인 욕망이라고 여긴다.


자신의욕망에는거리감을두고


그래서 자신의 욕망에는 거리감을 두고, 혹은 애써 모른 척하며 나의 작지만 확실한 일상(日常)에 몰두하자는 말이 다소 이질적으로 들린다. 누구나 가진 욕망대로 더 크고 높게 살아가는 것.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인간으로서의 사상(思想)이라고 하면 어색한 표현일까. 자신만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괴롭고 지루해도 현재를 진지하게 살아나가는 것. 그리하여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계속해서 꿈꾸고 유토피아를 향해 움직이려는 것. 그런 태도를 잃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인간이 인간다운 본성을 지켜나가는 것이라 믿는다. 역설적으로 삶이 현재로만 가득하지 않을 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할 때에야 우리의 현재가 더 풍요로워질 것은 아닐지. 서점을 스쳐 지나가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금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어떤 미래가 우리를 관통하는 공통의 유토피아인지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이상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 미래로 투사되는 움직임이 사라진 오늘이 곧 디스토피아일지도 모르겠다. 최승자 시인은 1981년 <이 時代의 사랑> 발문을 통해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현실에서 상처받고 괴로울 수 있다. 그러나 상처받은 동시에, 상처받은 이들끼리 서로 응시하고, 현실은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것이 유토피아로 향한 첫걸음은 아닐는지. 미래를 꿈꾸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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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Amy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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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황정운
황정운

9년 차 직장인입니다. 블로그 <생각의 건축> (http://blog.naver.com/marill00)에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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